'구리왕' 차용규, <포브스> 부자 명단에 오른 배경
일명 '구리왕'으로 불리는 차용규 씨의 재산 형성 과정은 오랫동안 의혹에 싸여 있었다. 차 씨가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2008년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의 부자 1000명'에 이름을 올리면서다. 이건희 삼성 회장 등 낯익은 이름 옆에 낯선 한국인 이름이 놓이면서, 관심을 끌었다.
▲ 차용규 씨. 차 씨가 자신을 철저히 숨긴 탓에 언론에 보도되는 사진은 이것뿐이다. ⓒ연합뉴스 |
차 씨 본인이 얼굴을 드러내기를 극도로 꺼린 탓이다. 무명의 샐러리맨 출신이 갑자기 국내 최고의 재벌 총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자산을 갖고 있다는 점은 언론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 했고, 일부 언론은 차 씨에 대해 '파파라치 식' 추적 보도를 했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차 씨의 학교 동창 등 지인들조차 입을 닫았던 탓이다.
삼성, '대박' 앞둔 카작무스 지분 왜 헐값에 넘겼나
다른 한편에선 새로운 의혹이 불거졌다. 차 씨가 보유한 자산이 실제로는 '삼성 비자금'이라는 설이다.
이걸 설명하려면,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삼성물산은 1995년 카자흐스탄의 구리 채광 및 제련 업체인 카작무스를 위탁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성물산 직원이었던 차 씨는 1998년 카작무스 사업부장을 맡게 된다. 카작무스의 경영자 역할이다. 2003년, 차 씨는 삼성물산 상무보로 퇴임한다. 그리고 1년 뒤, 삼성물산과 삼성물산이 갖고 있던 카작무스 지분을 사들인다. 자신이 설립한 페이퍼컴퍼니를 통해서였다.
다시 1년 뒤인 2005년 10월, 카작무스는 런던 증시에 상장한다. 이 과정에서 차 씨는 약 1조원대의 매각 차익을 남겼다. 이듬해인 2006년과 2007년, 차 씨는 자신이 갖고 있던 나머지 지분마저 전부 매각했다. 이게 평범한 샐러리맨이 한순간에 재벌 총수와 맞먹는 자산을 갖게 된 과정이다.
문제는 이 과정의 고리가 모두 석연치 않다는 점이다. 구리 가격이 오르는 추세에서 카작무스가 상장한다면, 막대한 이익을 얻으리라는 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삼성물산과 삼성홍콩은 이런 이익을 포기하고 차 씨에게 지분을 헐값에 넘겼다. 그것도 상장 계획이 언론에 보도된 직후다. 지분 매각 가격은 주당 주당 1만9051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2003년 말 기준 주당 순자산가액(4만9617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삼성물산과 삼성홍콩은 일부러 손해를 본 셈이다. 합리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해외 비자금은 수사할 수 없다던 삼성특검, 묻혀진 '차용규 의혹'
미리 짜여진 시나리오에 따라 부(富)를 이전했다는 의혹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실제로 이런 의혹은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 이후 삼성특검이 출범하면서 공론화됐다. 당시 경제개혁연대는 카작무스와 삼성물산 사이의 거래에 관한 의혹에 대해 특검이 수사하도록 요구했다. 당시 경제개혁연대는 관련 의혹을 정리한 의견서를 특검에 제출했다. 그러나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조준웅 특별검사가 삼성의 해외 비자금 의혹에 대해서는 아예 선을 그었던 탓이다. 조 특검은 해외 비자금은 수사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차 씨의 이름은 잊혀졌다. 일부 매체들이 취재를 시도했으나, 차 씨의 행적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러다 최근 국세청이 차 씨에 대해 세금 추징을 시도하면서,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차용규, 국내에 아내와 재산 있다…세금 추징 근거
<조선일보>에 따르면, 차 씨는 현재 홍콩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딸은 영국에 유학 중이다. 차 씨가 해외에 머무른다는 점은, 그가 한국의 국세청에 세금을 낼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차 씨가 언론의 추적을 철저히 따돌리면서, 국내에서 자취를 감췄던 것은 이런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행 소득세법에 따르면, "국내에 1년 이상 거소(居所)를 둔 개인을 거주자로 본다"고 돼 있고, 시행령에는 "국내에 거소를 둔 기간이 2과세기간(2년)에 걸쳐 1년 이상인 경우 국내에 1년 이상 거소를 둔 것으로 본다"고 돼 있다. 그리고 국내 거주자가 아니면, 과세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차 씨는 세금 추징을 피할 근거가 있다.
그러나 차 씨에게도 약점이 있다. 부부가 왜 따로 사는지는 불분명하나, 차 씨의 부인은 현재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차 씨는 국내에 상당한 규모의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우, 과세 대상에 해당한다. 국세청이 세금 추징을 시도하는 근거다.
경제개혁연대 "차용규와 삼성물산 간의 과거 거래까지 조사해야"
경제개혁연대는 19일 논평에서 차 씨에 대한 세무조사가 "뒤늦은 감이 있다"면서도, "역외탈세자에 대한 세금 추징을 엄정히 하겠다는, 정부가 지난 3월 발표한 조세정의 실천방안의 일환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경제개혁연대는 "그러나 애초 차용규 씨가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던 이유가 2004년 카작무스 지분 인수임을 감안할 때, 국세청이 차용규 씨와 삼성물산 간 과거 거래에까지 조사 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는 "국세청은 차용규씨와 삼성물산 간 과거 카작무스 지분 거래에 까지 조사 범위를 확대하여, 삼성물산의 비자금 조성 의혹 또한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적극적 해명 나선 삼성, 의혹 한창 쏟아지던 2007년과 대조적
한편, 삼성물산 측은 지난 17일 밤 해명자료를 내고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차용규 씨 관련 의혹이 한창 쏟아지던 2007~8년 당시 삼성이 철저히 함구로 일관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 일각에선 차 씨의 자산이 카자흐스탄 정부 고위층의 비자금일 가능성도 제기한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가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세청이 어느 정도의 의지를 갖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카자흐스탄 정부 고위층의 비자금으로 판단이 모아질 경우, 외교적 갈등 가능성 등을 이유로 조사가 유야무야될 가능성도 있다. 또 이런 판단을 하는 경우라면, 비자금 의혹이 집중됐던 2007~8년 당시 삼성이 적극적인 해명을 하지 않았던 이유 역시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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