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노인들은 온 가족이 떠받드는 분이요 온 마을의 인사를 받는 분이었다. 노인 곁에는 늘 가족이 있었고, 친척이 있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요새 노인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외톨이로 할 일 없이 세월이나 씹고 있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노인들은 노령화 문제를 일으키는 말썽꾸러기 골칫거리다. 물론, 정부가 노인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고는 있다. 하지만, 돈 몇 푼 쥐어준다고 해서 노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노인 문제를 비롯해서 교육 문제, 가정 해체 문제, 아동 문제 등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우리 사회의 기강이 전반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무언가 근원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체질 그 자체가 매우 허약해져서 시도 때도 없이 온갖 병에 걸려 골골하는데, 정부나 사회 지도계층은 사회의 체질을 강화할 생각은 않고 병들 때마다 적당히 약으로 때우려고만 한다고 어느 가정학자는 탄식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사회의 허약한 체질을 강화하는 한 가지 방법은 이른바 사회적 자본을 확충하는 것이다. 대권을 꿈꾸는 어느 정치가가 사회적 자본을 역설하면서 이 개념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퍼지게 되었지만, 정작 사회적 자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약간 헷갈린다. <신뢰>라는 책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후쿠야마 교수는 사회적 자본을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조직이나 집단을 구성하고 상호 신뢰 아래 서로 협력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하면서 신뢰와 호혜를 사회적 자본의 핵심적 요소로 꼽았다.
그러나 신뢰와 호혜만으로 사회적 자본을 얘기하기에는 약간 미흡한 면이 있다. 아무리 국민들이 정직하고 이들 사이의 믿음이 강하더라도 이것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활용되지 않는다면 사회적 자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미국 하버드 대학의 퍼트남 교수는 "사회구성원들(개인, 집단, 조직) 사이의 자발적 연대 또는 사회적 연결망"을 사회적 자본의 핵심으로 삼았다. 시민들의 자발적 모임이나 사회적 연결망이 신뢰와 도덕심을 활용하는 메커니즘이 되며 또한 거기에서 신뢰와 도덕심이 자라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떻든 이 두 학자의 주장을 종합한다면, 사회적 자본이란 신뢰와 호혜를 바탕으로 한 시민들의 자발적 모임이나 사회적 연결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정의된 사회적 자본이 의외로 많은 다양한 경제적 이익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사회적 자본은 거래비용을 줄여줌으로써 상거래를 활성화하며, 생산현장에서 생산성을 높이며, 각종 경제적 비리와 불공정 거래를 줄여줌으로써 경제의 경쟁력을 높여준다. 그래서 요새는 경제학자들도 사회적 자본을 얘기하고 있다.
후쿠야마 교수와 퍼트남 교수가 사회적 자본을 부각시킨 중요한 이유는 미국 사회에서 사회적 자본이 점차 감소하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나라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미국사회에서 왜 사회적 자본이 점점 감소할까? 미국이 세계에서 시장경제가 최고로 발달한 나라라는 사실은 자본주의 시장의 힘이 사회적 자본을 갈아먹는 요인이라는 추측을 낳는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이 이 추측이 사실임을 다각도로 밝혀냈다. 우선, 자본주의 시장은 사회문제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나 사회적 연결망의 필요성을 없앤다. 마을에 범죄가 발생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대처하기보다는 각 개인별로 방범시설을 구매하거나 방범요원들을 고용할 생각부터 한다. 강이 오염되어서 물을 마실 수 없게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강을 깨끗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생수를 사 마실 생각부터 하며, 공기가 오염되면 공기를 깨끗하게 만들려고 힘을 합치기보다는 공기청정기를 구입하거나 아예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다. 이와 같이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다보니 자발적 시민의 모임이나 사회적 연결망이 점점 없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그 많던 지역공동체나 혈연공동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사회적 자본이 감소하면 경제가 활력을 잃게 될 뿐 아니라 사회 자체가 살벌해지고 피폐된다.
자본주의 시장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하고 개인주의가 성행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사익추구에 방해가 되는 것이나 여러 사람에 관계되는 것들은 귀찮아한다. 그리고 모두들 정부가 이런 것들을 해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아이 돌보기, 노인 돌보기, 장애아 돌보기, 출산과 산모 돌보기, 성범죄 방지, 환경미화 등, 옛날에는 혈연공동체나 지역공동체가 맡아서 해주었던 온갖 일들을 요즈음에는 몽땅 정부가 해주어야 하는 판이다. 오늘날 각 개인은 사익추구에만 골몰하고 약간이라도 공익에 관련된 것은 전부 정부의 몫으로 미루어버린다. 각 개인들의 뒤치다꺼리까지 모두 정부가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요즈음 세상의 민심이다. 그러니 시장주의자들이 아무리 작은 정부를 외쳐대도 정부는 점점 더 비대해질 수밖에 없다. 시장주의자가 주장하는 "시장의 활성화"와 "작은 정부"는 상호 모순된 개념이다.
자본주의 시장이 발달할수록 각 개인들은 더욱 더 이기적으로 변하고 공익을 외면하면서 시민과 정부 사이에 존재하던 수많은 공동체들이 말라버리고 그래서 결국 자본주의 사회는 "가운데가 텅 빈 사회"가 되고 만다고 오래 전에 이미 칼 마르크스가 경고하지 않았던가. "가운데가 텅 빈 사회"는 그야말로 메마르고 황량하고 허약한 사회다. 오늘날 우리의 노인들은 그런 사회에 내팽개쳐진 존재다.
사회적 자본에 대한 후쿠야마 교수와 퍼트남 교수의 연구에서 한 가지 우리의 눈길을 끄는 점은, 이 두 학자 모두 경제적 측면보다는 이 사회적 측면을 더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후쿠야마교수에 의하면,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상호 신뢰 아래 서로 협력하다보면 시민들이 사회적 관계에 대하여 공동책임을 지며 공동이익을 강하게 의식하는 구성원으로 탈바꿈하면서 결과적으로 사회적 결속도 굳어진다. 퍼트남 교수도 "참여할 능력은 참여함으로써 함양된다."는 말과 함께 시민들이 자발적 모임에 참여하다보면 자아의식을 가지게 되며, 남과 더불어 사는 지식을 얻게 되고, 나아가서 같이 일하는 보람을 느끼게 되며, 결과적으로 시민정신이 함양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교수의 뒤를 이어 오늘날 많은 사회학자들이 사회적 자본의 여러 가지 사회적 이익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적 자본의 확충은 노인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효과적인 방책이 될 수 있다. 노인들은 외로운 사람들이요, 할 일이 없어 빌빌대는 사람들이요, 그래서 불행한 사람들이다. 사회적 자본을 확충함으로서 이들을 사회적 연결망 속으로 끌어들인다면, 우선 이들은 많은 사람과 어울림으로써 인간관계를 풍성하게 가질 수 있게 된다. 이 뿐만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다 보면 자아의식을 가지게 되며 일하는 보람을 느끼게 된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사회(예컨대, 선진국)에서 가장 빈번히 꼽히는 행복의 요건은 세 가지다. 화목한 가정, 좋은 인간관계, 그리고 보람 있는 일이 그것이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지만, 행복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가정 화목하고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보람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건강하다. 달리 말하면 행복이 건강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선진국의 문턱에 선 우리나라에서도 앞으로 이 세 가지 행복의 요건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사회적 자본의 확충은 노인들로 하여금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게 하고 보람 있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이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노인이나 젊은이에게나 결국 각자의 행복이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닌가. 노인을 행복하게 주는 것, 이것이 근원적이 대책이다.
물론, 사회적 자본의 확충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을 우리 모두가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긴요하다. 사회적 자본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낳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익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시장의 힘이 부단히 사회적 자본을 잠식하는 주된 요인이라는 점에도 주목하고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 결국, 사회적 자본의 확충 문제는 날로 위세를 더해가고 있는 시장의 힘을 어떻게 적절한 수준과 범위 안으로 통제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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