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여전히 원인 파악이 힘들다. 서버 복구 시기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심지어 중요한 고객들의 거래내역이 백퍼센트 복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을 농협측이 내놓는 지경이다.
이는 이번 사태의 파장이 예상보다 훨씬 클 것임을 암시한다. 만일 손실된 데이터량이 크다면, 농협은 다른 거래처에서 찍힌 전표나 서버에 남아 있는 데이터베이스 로그 파일(서버에 접근한 모든 정보가 기록된 파일)을 모아, 거래내역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복구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오류가 난다면 분기말, 연말정산이 어그러지고, 이는 회계연도말 대차대조표 작성에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무엇보다, 농협의 전산시스템을 믿었던 고객들의 큰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원인을 찾는 것 못지 않게 신속하고 정확한 복구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게 쉽지 않을 전망이다. 배경에 있는 문제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IT업계에 고착화된 하도급 구조다. 업계의 환경을 개선하지 않는 이상, 이런 사태는 언제고 재발할 수 있다고 IT개발자들은 지적한다.
터질 게 터졌다
금융 IT종사자들은 앞으로도 전산망 관련 사고가 끊이지 않으리라고 전망한다. 이번 농협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언젠가 터질 일이 이번에 터진 것 뿐'이라는 냉소가 짙게 묻어난다. 오케이제이에스피, 데브피아 등 개발자들의 커뮤니티 게시판을 조금만 훑어봐도 이런 분위기를 단박에 포착해낼 수 있다.
농협 전산망 복구가 어려운 이유는 분명하다. 이미 언론을 통해 소개됐듯, 당사자인 농협중앙회 측의 전산망과 서버에 대한 이해도가 낮기 때문이다. 농협 측에 따르면 전산망은 하도급 업체와의 공동 개발로 구축됐다. 그만큼 깊은 이해도에는 한계가 생긴다.
농협이 발주해 제작된 전산 시스템이 가동에 들어가게 되면, 이를 유지·보수·운영하는 또 다른 하도급 업체가 기술지원 업체로 들어온다. 이번 경우, 이 역할을 IBM이 맡았다.
최종성 IT노조위원장은 "농협은 관리·감독만 하고, 서버 유지를 하청업체가 하다보니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어차피 서버 관리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을 가장 정확히 아는 개발자들도 서너단계로 나뉜 하청업체에 흩어져 있다. 게다가 이들 사이에서 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이런 사태가 터진 후 수습이 제대로 될 리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 위원장은 시스템 통합(SI) 개발자로, 국내 유수의 금융사 전산 시스템을 개발한 경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SI업계의 하도급 구조
그렇다면 개발에 참가한 이들 사이에서 인수인계만 제대로 이뤄졌어도 이런 일이 터졌을 때 보다 신속한 수습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 역시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는 어렵다는 게 최 위원장의 지적이다.
최 위원장은 "농협데이터시스템 내에 인수인계를 받을 인력 자체가 부족하다. 농협뿐만 아니라 국내 발주업체 대부분의 현실"이라며 "전산인력은 '돈을 벌지 않는 인력'이라는 인식이 강해 최소화하려다보니, 이런 문제가 터질 때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농협중앙회 최원병 회장이 14일 오후 서울 충정로 농협중앙회에서 열린 대국민 사과 기자간담회에서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과연 개발자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질지는 의문이다. ⓒ뉴시스 |
쥐어짜기식 노동환경, 베껴쓰기식 개발과정
당장에는 농협이 문제이지만, 이런 일은 언제고 재발할 수 있다. 시스템 자체의 안정성이 떨어진다. 개발자들이 좋은 시스템을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게 현실이라는 게 최 위원장의 평가다.
이는 <프레시안>이 지난해 보도한 IT개발자들의 잔혹한 업무환경에서도 이미 드러나 있다. (☞관련 기사: '일의 노예'…한국의 IT개발자가 사는 법, "사람 잡는 야근…폐 잘라낸 SI개발자", IT개발자 잔혹사, 정부는 無대책)
다단계로 하도급 구조가 구축된 탓에, 개발일정은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개발인력의 노동강도는 그만큼 강해진다. 그마저도 제때 약속된 대금이 입금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연히 개발자의 집중도가 떨어지고, 회사의 경쟁력도 약화된다.
개발자들의 이직은 더욱 잦아진다. 업계에 정이 떨어져서 떠나는 개발자는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충분한 교육 없이 개발에 투입된 신임 개발자는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처리한다. 기존의 소스 코드(컴퓨터 프로그램을 프로그래밍 언어로 기술한 것)를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한 채, 대충 베껴서 쓰는 식으로 개발 일정을 맞춘다. 이런 식으로 경력을 쌓으면, 시간이 지나도 실력이 붙지 않는다. 문제가 생겼을 때,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농협만 하더라도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3대 악성 프로젝트'를 발주하는 곳 중 하나로 유명해, '개발자들의 무덤'이라 불린다. 앞서 <프레시안>이 무리한 야근 끝에 폐를 잘라냈던 개발자로 소개한 양모 씨도 농협데이터시스템 소속이었다.
개발자는 흩어지고, 문서는 엉망…유지·보수 힘든 게 당연
하도급 업체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개발비를 두고 경쟁을 벌여야 한다. 대개의 발주자는 턱없이 낮은 금액으로 프로젝트를 발주한다. 수주업체는 그만큼 최소한의 개발기한 내에 프로젝트를 마쳐야 한다. 그래야 비용이 줄어들어 회사가 수익을 올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2개월이 걸릴 프로젝트가 6개월에 끝난다. 그리고 개발자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회사에 쌓이는 경험은 없고, 결과물은 엉성하다. 당장 소프트웨어가 작동하게끔 하는 데만도 급급한 상황에서, 향후 유지보수에 필수적인 '문서화' 작업은 사치다. 미국, 유럽 등에선 개발 업무의 상당 부분이 '문서화' 작업이지만, 한국에선 아직까지 먼 이야기다.
소프트웨어의 개발 과정, 구조 등을 제3자가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기록물이 부실한 상태에서, 개발에 참가했던 이들은 회사를 떠났다. 문제가 생겼을 때, 관리자들이 책임 회피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무리한 개발일정, 겉으로만 잘 돌아가는 프로그램…한국 SW는 삼풍백화점?
최 위원장은 "개발자들을 쥐어짜고 일정은 빡빡하게 잡으니, 개발자들이 당장 눈에 보이는 곳만 제대로 돌아가도록 프로그램을 대충 만들어 납품하는 게 태반"이라며 "부실공사한 건축물처럼, 누군가 던진 폭탄 한 방에 건물 전체가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부실 공사 관행이 낳은 삼풍백화점의 참극이 소프트웨어 분야, 특히 SI(시스템 통합)에선 언제라도 재연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IT업계의 고질적 문제인 하도급 구조를 개선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마저 쉽지 않은 지금의 농협과 같은 사례가 계속 생겨날 위험이 남아 있다.
최 위원장은 "우선 하도급 규모나 단계를 제한하는 식으로 업계 환경을 개선하고, 노동법에 따라서 야근을 철저하게 감독해야 한다"며 "정부가 국내 IT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업계 환경을 바꾸는데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발자 커뮤니티 '데브피아'에 올라온 한 개발자의 비판글. ⓒ데브피아(http://www.devpia.com) 스크린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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