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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노조는 한국노동운동의 미래다"

[이태경의 고공비행] 위기의 대기업 정규직 노조

정년퇴직자와 25년 이상 장기근속한 노동자 자녀들에 대한 우선채용을 명시하는 단협안을 작성한 현대차 노조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유사한 내용의 단협을 이미 기아차와 한국지엠이 시행하고 있고, "채용규정상 적합할 경우"라는 단서가 달려 있는 단협안일 뿐이며, 단협안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조항도 담겨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에 억울해하는 눈치다.

현대차 노조의 항변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차 노조가 비등하는 비난여론에 억울해 하기에는 현대차 안팎의 고용 및 노동조건이 너무나 열악하다. 현대차 안만 들여다봐도 8000명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들과 동일한 노동을 제공하면서도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용의 안정성, 급여 및 복리후생 면에서 철저히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 현대차 밖의 사정도 녹녹치 않다. 전체 노동자 가운데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신분에 속해 희망 없는 시간들을 연명하고 있고, 청년 실업도 극심한 상태다.

절박한 처지에 놓인 게 노동자만은 아니다. 대부분 기업 구조조정에 의해 자영업 시장에 진출한 영세 자영업자들의 처지는 더 곤궁하다. 가지고 있는 자본이 소규모인데다 특화된 기술도 지니고 있지 못한 영세자영업자들이 진입할 수 있는 업종은 치킨집, 식당, 여관 등인데 이런 업종들은 이미 과잉경쟁상태다. 과잉경쟁시장에서 영업을 영위하는 영세자영업자들 중 상당수는 이미 폐업을 했지만, 용케 버티고 있는 사람들도 폐업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영세자영업자들에게 폐업은 도시빈민으로의 편입을 의미한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및 영세자영업자들이 처한 여건이 비참한 터에, 현대차 노조가 정규직 신분을 세습(?)하려는 듯한 단협안을 확정하자 현대판 음서제(蔭敍制)라는 비판이 나오는 건 당연지사다. 정규직 노동자 신분을 대물림 하려는 듯 한 현대차 노조의 단협안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사회적 책임이나 약자들의 연대의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납득하기 어렵다. 노동조합이 조합원의 이익(고용의 안정성 및 처우)을 우선적으로 옹호하는 성격이 짙은 조직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현대차노조의 단협안은 민주공화국 시민이 지니고 있는 윤리적 감수성에 반한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물론 외환위기 직후 몰아닥친 구조조정의 광풍을 경험한 현대차 정규직 노조원들이 극단적 조직이기주의 행태를 보이는 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정규직 노동자 신분으로 재직 중일 때 최대한 자기 것을 챙기자는 생존본능이 조직이기주의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97년 체제 성립이후 구조조정이 일상화하고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성이 약화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좋은 일자리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정년은 짧아지며, 한 번 잃은 정규직 신분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여전히 사회적 안전망이 미흡하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거나 실업자가 된다는 것은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언제든지 비정규직 노동자나 실업자로 신분이 바뀔 수 있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고려할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자신들이 구축한 성채 안에서 단기적인 이익을 극대화한다고 해서 그 이익이 영속적인 것도 아닐 뿐 더러 정규직 노조라는 울타리가 그리 견고한 것도 아니다. 과학기술혁명(STR)의 여파로 상품 및 서비스의 유통주기는 매우 짧아지고 있으며, 경제의 글로벌화로 말미암아 사경제의 주체인 기업들의 무한경쟁도 가속화하고 있다. 세계 자동차 시장을 좌우하던 미국의 빅3(GM, 포드, 크라이슬러)의 충격적인 몰락이 극명하게 보여주듯 세계 1등 기업도 자칫하면 파산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의 세계시장이다. 이런 대외질서 속에서 개별 기업 노조가 기업 내에서 고용의 안정성과 처우를 극대화한들 그 한계는 자명하다. 대기업 노조는 사측과의 협상에 올인해 협애한 이익을 얻어내려고 하기 보다는 자기희생에 기반한 사회적 의제를 선점해 해고나 신분 변화에 따른 불이익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편을 택하는 것이 옳다.

임금동결을 내걸고 유연안정성 도입을 정부에 촉구했더라면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신분세습이라는 비난에 직면한 현대차 노조의 단협안은 매우 어리석은 판단의 결과물인 셈이다. 현대차 노조는 실현가능성도 희박하고 장기지속될 가능성도 옅은 단협안을 확정해 사회적 고립을 자초한 것인데, 이는 소탐대실의 전형적인 사례다.

만약 현대차 노조가 정규직 임금 동결을 조건으로 사측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정부에는 유연안정성(flexicurity) 모델의 도입을 촉구했더라면 현대차 노조의 사회적 영향력은 훨씬 커졌을 것이고, 노동조합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한결 따뜻하게 변했을 것이다. 임금동결이라는 자기희생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확실한 연대의식을 보여주고, 자본과 노동이 상생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현대차 노조를 조중동이 제아무리 노동귀족이라고 폄하한 들 그런 악의적 이데올로기 공세가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차 노조는 장기적ㆍ사회적ㆍ공익지향적인 단협안이 아닌 단기적ㆍ기업별ㆍ사익지향적인 단협안을 확정해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 현대차 노조의 행보가 상징하듯이 한국노동운동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원인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조합이기주의적 단견에만 갇혀있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몫일 것이다. 만약 현대차 노조를 위시한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이 이번 현대차 단협안 사건을 환골탈태의 계기로 삼지 못한다면 현대차 노조 단협안 사건은 한국노동운동의 조락(凋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사회적 연대의식과 자기희생이 결여된 노동조합운동은 필연적으로 쇠퇴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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