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실패로 판명 난 '고정가격제'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 고정가격제의 부활을 의심할만한 사건이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일어났다. 정부가 한 제과업체에 "재보선 끝난 후에 초코파이 등 과자 값을 올리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주장이, 그것도 꽤 구체적인 근거와 함께 제시된 것이다.
정부가 사기업의 가격결정권을 침해하다니
민주당 이성남 의원이 14일 국회 정무위에서 한 주장에 따르면, '농식품부가 기업들의 가격 인상요구를 종합해 지경부에 보고했는데, 기재부에서 제품 값을 빨리 올리려는 기업들에게 선거가 끝나고 올렸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구두지시를 했고, 심지어 정부의 권유를 뿌리치고 초코파이 등의 가격을 인상한 특정 업체를 질타한 사실도 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 이원에 따르면 '과천에서 있었던 한 정부 합동 물가관리대책회의(지경부 주관)에서 지경부가 설탕 값의 인상폭과 시기에 대해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기업들에게 정해줬다'고 한다.
이 의원의 주장은 지식경제부가 작성한 '국내 설탕 가격 동향 및 대응 방안'이라는 문건과 기업들의 제보에 터 잡은 것으로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이 의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 사기업도 아닌 정부가 앞장서서 가격 매커니즘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려고 했고 이를 통해 시장경제의 근본 질서를 교란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대한민국은 헌법상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를 경제질서로 채택하고 있다. 독일에서 출발한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ft)'는 '사회적 책임을 진 시장경제', '규제된 자유시장경제', '사회의식이 강한 자유시장경제', 또는 '시장에서의 자유와 사회적 형평을 결합시킨 경제'로 표현된다.(Alfred Mueller Armack, <Soziale Marktwirtschaft> Beckerath at. al., Handwoerterbuch der Sozialwissenschften, (Stuttgart, Tuebingen, Goettingen, 1956), pp. 390~392)
우리나라의 경우 학계와 헌법재판소의 일부 판례를 살펴보면,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해 '사회적 법치국가에 대응하는 경제질서로서 사유재산제와 자유경쟁을 기본 원리로 하는 시장경제질서를 근간으로 하되,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경제에 대하여 규제와 조정을 가하는 경제질서'로 정의하고 있다.(한수웅, "국가경제정책의 헌법적 근거와 한계(헌법 제119조 이하의 규정을 중심으로)", <헌법논총> 16권, 헌법재판소, 2005, 635면)
여기서 말하는 자유경쟁이란 경제주체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생산, 소비, 교환, 유통 등)을 의미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다름 아닌 가격기구다.
선거를 앞두고 사기업의 가격결정권을 침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정부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질서 유지의 중핵이라 할 가격기구를 교란시켰다는 비판을 자초한 셈이다.
이명박표 시장경제의 정체는?
▲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
이명박 정부 하에서 정체가 모호해진 건 비단 시장경제질서만이 아니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상징이 경제 대통령이었기에 다른 가치들의 표류보다 실망감이 한결 크다. 불행히도 이명박 정부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경제질서를 확립하는 일, 시장실패의 영역 및 시장이 부재한 영역에서 정부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일 등에 두루 서툴렀다. 더욱이 이 정부가 애써 지키고자 했던 시장경제질서는 부자와 힘센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음 정부는 결코 이명박 정부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질서를 구축하고 운영함에 있어 사심(私心)의 흔적을 지우고, 국민 대부분의 후생과 편익이 증진되는 방향을 지향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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