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국으로 건너간 이 새로운 물결은 사운드 시스템 문화와 함께 영국의 클럽신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역시 차별받던 흑인들이 게토를 이룬 브리스틀, 런던 등의 클럽에서 덥 사운드가 유행했고, 이는 기술의 발달과 맞물려 전자음악의 거대한 도약을 이루는 기폭제가 됐다. 덥은 곧 드럼 앤드 베이스, 테크노 덥, 하우스, 정글, 영국(UK) 거라지 사운드 등으로 확대 재생산됐고, 클럽에서의 이 활발한 음악적 교류는 2000년대 런던 남부에서 덥스텝(Dubstep)이라는 하위 장르로 이어졌다.
최근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ME)> 등이 주목하는 덥스텝은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베리얼(Burial), 스크림(Skream), 루스코(Rusko) 등의 정규음반을 통해 대중음악신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여느 전자음악이 그렇듯, 이 신생 장르는 주류음악 장르와 활발한 교류를 했고(착취당했고), 그 결과 주류 음악에서도 덥스텝 특유의 울리는 드럼과 증폭된 베이스, 당김음이 활용되고 있다. 런던 태생의 23살 신예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가 지난달 발표한 데뷔 앨범 [제임스 블레이크]는 덥스텝의 대중화를 가장 극적으로 이끌어낸 사례를 보여준다.
▲제임스 블레이크 [제임스 블레이크] ⓒ유니버설뮤직 |
극도의 단순함을 담은 이 음반은, 느릿하게 흘러가는 곡 전개에 샘플링된 보컬이 더해진 것만으로 덥스텝에서 한걸음 나아간 신세계를 열어 보인다. 과장된 베이스와 흩어지는 드럼은 앨범 전체에 텅빈 공간감을 만들어내고, 그 위에 분절돼 얹어진 보컬이 섬뜩한 기분 너머 흘러넘치는 정서를 제공한다.
제임스 블레이크가 대중에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계기인 <리미트 투 유어 러브(Limit To Your Love)>는 이 '덥스텝 소울'의 성격을 요약하는 곡이다. 파이스트(Feist)의 곡을 리메이크한 이 노래는 서늘함과 슬픔을 청자에게 마구 쏘아대고, 특유의 공간감은 원곡과 완전히 다른 감상의 재미를 준다.
두 번째 싱글 <빌헬름즈 스크림(Wilhelms Scream)>은 음절을 대충 뭉개버리는 제임스 블레이크의 왜곡된 목소리 주위로 효과음들이 물처럼 흘러가는 곡이다. 보컬과 효과음의 지위가 뒤바뀐 이 곡은 [제임스 블레이크]가 기존의 EP와 달리 덥스텝에서 한걸음 더 멀어진 앨범임을 웅변한다.
이어지는 곡인 <와이 돈트 유 콜 미(Why Don't You Call Me)>, <아이 마인드(I Mind)>는 앨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곡이다. 단순한 피아노를 타고 단 한 문장으로 구성된 가사가 왜곡되지 않은(!) 제임스 블레이크의 목소리를 통해 곡을 이끌어 가는가 싶더니, 곧바로 샘플링된 피아노가 고장난 기계장치처럼 삐걱대고 그 위로 역시 잘려나간 보컬이 대충 붙여놓은 듯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러나 이 샘플링이 극에 달하는 <I Mind>에 들어서면 어느새 곡은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심지어 리듬감까지 불어넣은 채 잔향을 남기고 페이드아웃된다.
초기 덥스텝 특유의 미니멀하고 어두운 색채가 앨범 전체를 관통하고, 영혼(soul)을 뒤흔들어 놓는 제임스 블레이크의 보컬이 덧붙여진 이 음반은 영국의 전자음악이 90년대 이후 그려내는 음울한 도시인에 대한 서사를 훌륭히 잇는다. 덥의 영향 아래 태어난 90년대의 음악 트립합(Trip-hop)이 대처 시대 이후 도시인의 목소리를 반영했다면, 제임스 블레이크의 이 음반은 아예 골방에 스스로를 가둔 21세기 상처 입은 젊은이의 정서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40여년 전 밥 말리와 웨일러스의 데뷔앨범, 20년 전 매시브 어택의 데뷔앨범이 그러했듯, 자메이카에 뿌리를 둔 제임스 블레이크의 창백한 데뷔앨범 [제임스 블레이크]는 올해의 중요한 음반이 될 것이다. 이 음반은 비워냄과 덧씌움이 조화를 이룬 덥이고, 듣는 이의 감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소울이며, 희미하게 남아 있는 리듬으로 대중의 귀를 잡아챌 완벽한 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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