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이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한글본의 번역 오류가 모두 160여 개에 달한다며, 이를 수정한 내용을 정리해 외교통상부에 제출했다고 22일 밝혔다.
민변은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해당하는 법률' 제9216호를 9616호로 오기한 것과 같은 단순 착오는 모두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외통부는 '한·EU FTA 한글본 국민의견 온라인창구'를 개설해, 시민들이 오류를 신고해달라고 한 상태다.
'혹은'이 '그리고'로 오기
민변이 제출한 자료를 보면, 외통부는 법률상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용어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향후 중대한 무역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실수를 범했다.
우선 민감한 내용인 역진방지조항(래칫)의 가부를 결정할 수 있는 문구에서 중요한 문장을 통째로 번역에서 빠뜨렸다고 민변은 지적했다.
송기호 변호사는 그간 영문본을 바탕으로 "한·EU FTA에는 래칫 조항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으나, 정부는 '한·미 FTA에는 이 내용이 포함됐으나, 한·EU FTA는 관련이 없다고 반박한 바 있다.
민변은 또 "(한글 번역본이) 법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단어인 'any'를 상당부분 번역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송 변호사가 예로 든 협정문 한국어본의 부속서 2-다 제9조 '자동차 및 부품 작업반'의 제1항이 한글 번역본에는 "이 부속서의 적용범위에 해당하는 제품의 무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치를 서로에게 통보하기로 합의한다"고 돼 있으나, 영문본은 'any measure'라고 돼 있다.
단순히 '조치를 서로에게 통보하'는 게 아니라 '모든 조치'를 통보해야 한다는 얘기다. 송 변호사에 따르면 이처럼 'any'가 번역에서 누락된 부분은 50여 곳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지적에 대해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문학 작품도 직역과 의역을 염두에 둔다"고 해명해 빈축을 샀다.
이 밖에도 한글번역본은 전혀 다른 뜻을 가지는 '혹은(or)'을 '그리고'로 번역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고, 유럽과 한국의 다른 상황을 전제하지 않고 무리하게 번역한 부분도 많았다.
예를 들어, 한글번역본은 'university degrees'를 '학위'로 번역했으나, '대학 학위'로 명확히 번역하는 게 맞다는 지적이다. 양허표 영문본은 학위와 대학학위를 분명히 나눠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
또 영문본은 포장(packing)과 즉석 포장(immediate packing)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한글 번역본은 총 82개의 품목 분류에서 '즉석'을 해석하지 않고 단순히 '포장'이라고만 표기했다.
"국회 비준동의권 침해 간과 못해"
한·EU FTA 협정문의 번역 오류는 지난달 21일 송 변호사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한·EU FTA 국회 동의안, 번역 오류…"원본과 달라"'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송 변호사의 글이 소개된 이후 정부는 지난달 28일 비준동의안을 철회하고 다시 국회에 제출했으나, 외국인 건축사의 한국 건축사 시험 응시 요건에서 불일치가 또 발견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민변은 "한·EU FTA에 한글본도 영문본과 대등한 정본이라고 되어 있다"며 "단순한 번역의 오류가 아니라, 애초의 진정한 합의가 무엇이었는지를 학인한 후, 그 내용과 다른 한글본이나 영문본을 고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오늘 제출한 160개의 불일치는 모두 아직 바로잡지 않은 것"이라며 "오류를 바로잡지 않은 한글본 비준동의안을 정부가 그대로 두고, 이를 비준 동의할 것을 국회에 요구하는 건 헌법이 보장한 국회의 비준동의권 침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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