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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효율과 자유는 보수의 전유물이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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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효율과 자유는 보수의 전유물이어야 하나?"

[이태경의 고공비행] "다시 헨리 조지를 생각한다"

언제나 토지가 문제다. 토지가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이었던 고대나 중세 봉건 혹은 아시아적 전제주의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도 토지는 특정 국가와 사회 안에서 심대한 중요성을 지닌다. 토지는 여전히 주요한 생산요소 일 뿐 아니라 주거의 기반이고 투기의 대상이며 가계의 최대 자산이다. 토지가 지닌 이러한 복합성과 중층성으로 말미암아 토지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토지문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해결하고 있는가에 따라 한 사회의 발전정도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다.

조금 도식적으로 표현하자면 토지 소유의 편중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수다한 문제들-자산 양극화, 주택가격의 앙등 및 소비위축, 부정부패의 만연, 불필요한 토건사업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낭비와 왜곡, 주기적인 불황, 노사분규의 심화, 고지가로 인한 제품경쟁력 약화 등-을 그나마 잘 해결하고 있는 국가들 가운데 선진국이 아닌 나라가 드물고, 토지문제 해결에 대체로 실패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후진국 아닌 나라가 많지 않다.

헨리 조지는 누구이며 무엇을 주장했나?

한 국가나 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에 너무나 중대한 토지문제를 주제로 평생을 씨름한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이 바로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9.2~1897.10.29)다.

미국 출생인 헨리 조지는 가난 때문에 대학을 나오지 못했고 선원. 인쇄공 등을 전전했지만, 독학으로 우뚝한 지적 성취를 이뤘다. 그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만든 저작은 1879년에 나온 <진보와 빈곤 (Progress and Poverty)>인데, 이 책은 한 때 성경 이외의 부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진보와 빈곤>에 담긴 헨리 조지의 주장은 간명하다. 그는 산업혁명 이후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상품이 넘쳐 흐르는 데도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가난한 이들의 삶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 이유를 지대의 상승 및 지주에 의한 지대의 독점에서 찾았다. 즉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지주들이 자본가와 노동자들이 생산한 부를 가로채 자본가들에게 돌아갈 이윤과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임금을 각각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헨리 조지는 지대 가치 상승 및 지주에 의한 지대 독점을 해결하기 위해 지대가치 공유(토지소유권의 공유가 아니다!)를 천명하며, 그 구체적인 해법으로 지대를 조세로 징수하는 토지보유세를 제시한다. 또한 그는 이렇게 징수한 토지보유세를 사회복지 등에 사용할 것과 다른 세금의 전면적인 폐지를 주장한다. 헨리 조지 당시에는 지대를 전부 조세로 환수하면 미국의 국가재정을 전부 충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덕분에 헨리 조지가 제안한 세금을 토지단일세라 칭하기도 한다.

헨리 조지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신뢰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주에 의한 토지가치의 전유가 건강한 자본주의 체제의 구성 및 작동에 질곡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토지단일세의 신설을 주장하고 다른 세금의 폐지를 천명한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쉽게 말해 토지단일세를 신설해 지주들이 사유하는 토지가치를 사회가 공유하면 토지 가치 사유화에 따른 시장 교란 요인이 제거돼 1차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정상화되고, 생산과 거래에 부담을 주는 다른 세금을 감면하면 2차적으로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활성화 돼 사회적 후생이 증가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헨리 조지는 빈곤문제의 사회적 해결이라는 문제의식에 관해서는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5.5~1883.3.14)와 궤를 같이 했지만, 빈부격차 심화의 원인 및 해법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와 의견을 달리했다. 마르크스는 빈부격차 심화의 원인 등을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 소유의 사적 성격과 생산의 사회적 성격 간의 대립 등에서 찾았고,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매해 노동과정에서 항상적으로 잉여가치(剩餘價値, surplus value)를 수취하는 것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보았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구조적으로 빈부격차, 불의, 부정의와 비효율을 양산할 수 밖에 없다.

요약하자면 헨리 조지는 지주에 의한 지대의 사유화를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지대가치의 공유화를 해법으로 본 반면 마르크스는 자본가에 의한 잉여가치의 전유를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임노동의 폐절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의 생각이 더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분분할 것이다.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은 시장을 계획으로 대체하려 했고, 임노동 관계의 폐절을 시도했던 현실 사회주의 실험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 부동산 문제에는 한국 경제의 모순이 집약돼 있다. 이런 문제를 푸는데 헨리 조지의 상상력은 유익한 힌트가 된다. ⓒ프레시안 (조형·사진=손문상)

헨리 조지가 잊혀진 이유

그렇다면 토지 문제 더 나아가 사회, 경제적 문제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명쾌한 문제의식과 해법을 가지고 있던 헨리 조지가 경제학의 역사에서 아웃사이더로 밀려난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근대 경제학의 시조를 애덤 스미스로 꼽는다. 애덤 스미스부터 시작한 경제학은 데이비드 리카도와 맬더스를 거쳐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 완성되는데 이들을 고전주의 경제학파라고 부른다. 이들은 생산요소를 토지, 자본, 노동으로 간주하고 지주, 자본가, 노동자를 기본적인 사회계급으로 인정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전주의 경제학파에 도전하는 학파가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고전주의 경제학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이유로 마르크스 경제학파가, 고전주의 경제학이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신고전주의 경제학파가 각각 등장했다. 물론 신고전주의 경제학파가 주류의 자리를 차지했는데, 거의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있었던 마르스크 경제학파와 신고전주의 경제학파가 공유(?)했던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토지문제를 경제학에서 주변화시켰다는 점이다. 노동과 자본 간의 관계에 착목했던 마르크스 경제학파는 토지 역시 자본의 하나로 간주했고, 경제학에서 계급적 시각을 탈각시킨 신고전주의 경제학파 역시 토지문제를 경제학의 하위 분과 중의 하나 정도로만 취급했다.

이런 경향은 지금까지 이어져 신고전파 경제학의 후예라 할 신자유주의 경제학파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마르크스 경제학파 어느 곳에서도 여전히 토지문제는 찬밥신세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비주류 중의 비주류라 할 헨리 조지와 그의 주장이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한민국만 해도 토지문제로 인한 폐해가 현재진행중이고,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나 마르크스 경제학 어디에서도 토지문제에 대한 명쾌한 원인진단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헨리 조지의 부재가 참으로 아쉽게 느껴진다.

진보, 개혁 진영은 '효율을 담보한 정의', '평등한 자유'의 실현을 추구해야

▲ 헨리 조지.
지금의 한국사회에 혹은 진보, 개혁 진영에 헨리 조지의 복권이 요청되는 것은 단순히 토지-부동산-문제의 해결 때문만은 아니다. 헨리조지의 사상과 주장이 평등과 자유, 정의와 효율의 동시 달성이라는 면에서 의미있는 시사점을 주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것이다. 평등과 자유, 정의와 효율은 상호대립적이거나 길항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유와 효율은 보수진영의 전유물처럼 취급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헨리 조지의 사유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자유와 평등, 정의와 효율이 공존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불로소득인 지대에 과세해서 경제를 성장시키고 사회적 후생을 증진시키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는 동시에 효율을 담보하는 최적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이며 개인의 자유를 평등하게 신장시키는 정책 수단이다.

분명한 것은 새로운 국가모델을 디자인함에 있어 정의와 효율, 평등과 자유가 구성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진보, 개혁 진영은 '효율', '자유'라는 가치를 결코 보수진영에 빼앗겨서는 않된다. 진보, 개혁 진영이 국민들에게 '효율을 담보한 정의', '평등한 자유'를 실현할 수권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한 집권은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진보, 개혁 진영은 헨리 조지를 호명해 그에게서 정의와 효율, 평등과 자유를 동시에 추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국사회의 진보, 개혁 진영에게는 헨리 조지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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