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을 옆에 두고 밥을 먹을 수 있지만, 굶는 사람을 옆에 두고 밥을 먹을 순 없지"
그런데 우리 사회의 배웠다는 사회지도층은 그 소박한 인간애조차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 시대를 살던 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굶다가 죽었다. 최고은, 그도 노동자라면 노동자다. 쌍용차 대량해고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6명의 노동자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해고는 살인이다"는 말은 그저 투쟁구호가 아니었다. 살고자했던 호소였으며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러나 정부와 자본은 그 희망을 무참히 꺾었고, 지금도 노동자들의 생명은 하나 둘 꺾이고 있다. 니들이 나가야 회사가 산다고 했던 자들은 어느 누구도 죽음을 아파하지 않고, 정부와 보수언론이 과잉복지를 걱정하는 이 잘난 대한민국은 대책은커녕 이렇다 할 관심조차 없다.
지난해 쌍용자동차 정리해고특별위원회가 해고노동자 10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그들은 평균 6047만 원의 빚을 지고 있고 빚을 갚지 못해 파산하는 노동자도 늘고 있다. 해고자 중 64.2%는 해고 1년이 넘도록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보수언론이 피부에 찍어 논 반란노예의 불도장 덕에 재취업은 번번이 거부된다. 쫓겨난 가장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식구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가장은 밤에 대리운전을 한다.
그리고 아침에는 무심히 돌아가는 쌍용차 공장 울타리 밖에서 간간이 시위를 한다. 가시지 않는 상처를 달래고 우리를 잊지 말라고 호소해보지만, 누군가는 오늘 또 몹쓸 결단을 고민하고 있을지 모른다.
▲ 쌍용차 파업 현장. ⓒ프레시안(손문상) |
절망의 행렬은 언제 끝날 것인가. 한진중공업에서는 400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쫓겨났거나 쫓겨날 예정이다. 오늘은 해고 명단이 통보되는 날이다. 반면 해고계획이 발표된 다음날 주주들은 170억 원에 달하는 주식을 배당받았고, 사내이사들은 1인당 2000만 원이 넘는 월급을 챙겨갔다. 약속을 저버리고 배 수주물량은 계속 해외로 빼돌려진 상태였다. 홍익대는 새해 첫날 날벼락 같은 새해선물을 안겼다. 최저임금도 주지 않고 하루 10시간씩 부려먹던 청소노동자 170명을 모조리 해고한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사용자분들은 하나같이 책임이 없으시단다. 아무리 호소해도 사용자들의 대화태도는 불성실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삼성은 났다고 해야 하는가. 무노조경영의 복종과 과로에 짓눌려온 노동자가 자살하자 돈이라도 발라 덮으려했으니 말이다. 그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얼마 전 "(한국이)일본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는 말로 언론지상을 장식 했다. 그런데 그 일본은 자살률에서 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세계 최초로 '카로시(과로사)'란 용어를 탄생시킨 나라이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아직도 과로사를 매우 일본적인 현상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건희 회장은 일본의 뭘 배우고 앞지를 욕심인지 궁금하다.
우리나라에서 자살로 죽는 사람의 대부분은 노동자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니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그럼 국민 대다수인 노동자의 삶은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대한민국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국가가 맞는가. 지난해 OECD는 우리나라가 노동시간과 자살률이 최고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특히, 빈곤으로 인한 자살은 최근 수년 동안 눈에 띄게 늘고 있으며, 빈곤은 고령인구에게 더욱 치명적이어서 고령자의 자살도 급격히 늘고 있다. 최저임금도 안 되는 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홍대 청소노동자 대부분도 50~60대 고령빈곤층이다. 이들은 회사와 학교재단에 시린 무릎을 하소연하지도 못했고, 남의 일까지 시켜가며 무시해도 항의하지 못했다. 월급 75만 원과 점심값 300원이 곧 생존이기 때문이다. 노조를 만들었다고 그 생존의 끈을 잘라버릴 권리를 누가 주었는가. 법적으로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하는 홍대재단과 총학생회가 앞세우는 그 따위 법은 누가 만들었는가. 힘 있는 자와 돈 가진 자들이 합의하면 법이고 법은 절대선인가. 노동자를 절망과 죽음으로 내모는 이 합법적 세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참혹한 살처분의 계절, 노동자들은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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