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복지'는 대개 시혜적, 잔여적 복지차원의 사회정책을 의미하고, '복지국가'는 보편적 복지를 포함한 사회정책, 재정정책, 경제정책을 축으로 하는 국가모델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명확히 구분된다. 박근혜의 '복지'가 가짜 복지로 의심받는 건 그 때문이다.
'복지국가'담론이 담론시장을 장악하게 된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복지국가' 담론이 지닌 이론으로서의 우수성이다. '복지국가' 담론은 총체적이고 체계적인데다 수미일관한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복지국가' 담론은 좁게 보아도 노르딕 모델이라는 실증적 성공사례를 가지고 있다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 '복지국가'담론이 한국사회의 담론지형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는 원동력은 대다수 국민들의 우호적 관심 덕택이다. 착시효과 혹은 과잉해석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맹위를 떨친 무상급식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호응은 '복지국가'에 대한 국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중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복지국가'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전환하고 있는 까닭은 현재와 같이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방식으로는 국민 대다수가 루저(loser)가 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97년 체제'성립 이후 한국사회가 직면한 최대 현안은 양극화라고 할 수 있는데, 양극화 현상은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한국사회를 매우 빠르게 해체시켰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덮친 양극화라는 해일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리고 사적(私的)으로 노력했는데, 부동산 및 주식 등의 자산에 투자하는 것이 대표적인 해법이었다.
이명박 정부를 출현시킨 국민들의 자멸적 선택의 배경에는 이 같은 자산가치의 상승에 대한 기대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총체적 실패와 함께 국민들의 각개약진을 통한 활로 개척의 꿈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대신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집단적, 사회적 기획이 대안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증세나 적자재정 전에 해야 할 일들
▲ 무모한 토건 사업 등 낭비적인 지출만 줄여도 복지 예산을 대폭 늘릴 수 있다. ⓒ프레시안(조형·사진=손문상 화백) |
따라서 '복지국가' 모델을 건설하고 장기 지속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고려 요소 가운데 하나가 국가재정의 확보인데, 국가재정의 확보문제는 '복지국가' 건설의 로드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즉 '복지국가' 구현의 주요정책 수단인 보편적 복지, 적극적 복지, 공정한 경제, 혁신적 경제 등을 단시간 내에 전면적으로 시행하느냐 혹은 비교적 긴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시행하느냐 하는 정치적 결정과 이를 뒷받침하는 재원의 마련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사이라고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취할 국가모델을 '복지국가'라고 생각하는 정치인과 학자, 시민운동가, 시민들이라 할지라도 '복지국가' 건설의 로드맵에 대해서는 각자 의견이 다를 것이고, 지금 현재로서는 어떤 견해가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도 매우 어렵다. 다만 '복지국가' 시현의 구체적 정책수단인 보편적 복지, 적극적 복지, 공정한 경제, 혁신적 경제 등을 단시간 내에 전면적으로 시행하건, 비교적 긴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시행하건 간에 재원 마련과 관련해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정부가 증세나 적자재정 감수 전에 반드시 수행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예산 낭비를 줄이고 탈세를 방지하는 것이다. 정세은(2010)에 따르면 예산절감을 통해 6.6조 원, 자영업자들이 탈세한 세금 7조 4379억 원의 환수를 통해 약 13조원 정도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증진되는 사회적 후생에 비해 폐해가 큰 각종 비과세 감면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혁해야 할 것이다. 김종면(2004)의 분석에 따르면 2003년 저소득층 및 취약계층에게 돌아간 조세지출의 규모는 전체 비과세 감면금액 17조5080억 원 가운데 1조 3407억 원에 불과하였다고 한다.(정세은 2010) 2006년의 각종 비과세 감면제도에 의한 조세지출 규모는 무려 21조 원에 이르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절반 정도만 감면 혜택만 환수하더라도 무려 10조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복지에 사용할 수 있는 셈이다.
한편 영세 자영업자에 대한 간이과세 제도 폐지, 금융종합소득에 대한 과세 개혁, 상장주식 양도차익에 대한 과세 도입 등을 통해서도 적지 않은 복지재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지출구조의 혁신을 통해 엄청난 복지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건호(2010)에 따르면 콘크리트 지출, 국방비 지출, 경제지원 지출 등을 복지 분야로 돌리는 지출전환 프로그램을 통해 40조 원 정도를 복지예산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남북의 군사적 대치상황, 토건세력의 강고함 등을 감안할 때 지출구조의 혁신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복지재원 마련을 위해 지출구조 혁신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하는 과제다.
증세를 한다면 부동산에 대한 과세부터
위에서 열거한 정책수단들을 동원해 '복지국가' 건설에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원이 부족할 경우에는 별 수 없이 증세를 해야 할 것이다. 증세를 함에 있어서 심사숙고할 사항 중 하나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과세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동의하는 조세원칙을 기준으로 따져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조세원칙을 들자면 ① 조세가 생산에 주는 부담이 가능한 한 적을 것(중립성), ② 조세의 징수가 쉽고 비용이 적게 들 것(경제성), ③ 조세가 확실성을 가질 것, 즉 공무원의 재량의 여지가 적고 투명할 것(확실성), ④ 조세 부담이 공평할 것(공평성) 정도가 될 것인데 흔히 토지보유세가 이에 가장 부합하는 세금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증세를 단행함에 있어서는 토지보유세를 우선적으로 높이는 것이 옳다.
또한 부동산 처분 및 임대 시에 발생하는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인 양도세, 임대소득세 등을 우선적으로 높이는 것이 타당하다. 증세 추진 시에 토지보유세, 양도소득세, 임대소득세 등을 최우선적으로 인상하는 것은 단지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한 증세를 통한 복지 재정확보라는 정책목적만을 달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엄청난 사회·경제적 편익을 발생시킨다. 토지보유세, 양도세, 임대소득세가 상향되어 토지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되면 빈부격차 심화, 정부 재정운용 왜곡, 산업구조 후진화, 부정부패 양산, 주기적인 경제위기, 노동과 자본 간 갈등격화 등의 한국병이 눈에 띄게 호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에 대한 증세를 통해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재원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선대인(2010)의 연구결과를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선대인(2010)은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선진국 수준으로 환수할 때 보유세 26.8조 원, 양도세 5조원, 임대소득세 6조원 합계 39조 원을 징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물경 40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복지재원이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를 통해 확보되는 것이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증세에 앞서 이전에 열거한 정책수단들만 충실히 동원해도 수십조원의 복지재원이 마련되며,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한 증세를 통해서 40조 원에 가까운 예산이 추가로 확보된다. 이정도의 예산만 마련되면 적어도 당분간 돈 때문에 '복지국가' 건설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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