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나거나 '쪽박'차거나…계약 재배가 결정
배추 농사 경력이 40년이 넘는 윤병두(70) 씨는 '대박'을 맞은 경우다. 그는 최근 4~5년 동안 배추 대신 곰취를 재배해 왔다. 수익도 변변치 않은데다, 배추밭 관리를 하기에는 부담스런 나이라서다. 그러다가 지난해 1000평 정도 다시 배추를 심어 주변 사람들과 아파트 등지에 직거래했다. 반응이 좋아서 올해는 2000평을 심었다. 그는 계약 재배를 하지 않아 배추 파동 이후 유통 업자에게 평년보다 비싼 값에 배추를 팔아넘길 수 있었다. 윤 씨는 포기당 3000원 정도를 받았다. 투자비는 500만 원, 배추를 모두 판매한 값은 3500만 원이다. 무려 3000만 원의 이익을 봤다. 그러나 윤 씨는 큰 이익을 봤지만, 자신의 사례는 매우 특수한 경우라고 설명했다.
▲ 윤병두씨가 자신이 기른 배추를 들어 보이고 있다. ⓒ프레시안(이경희) |
대다수 농민들은 배춧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어도 별로 남는 게 없다고 한숨을 내쉰다. 배추를 밭떼기로 넘기는 계약 재배 농가가 많기 때문이다. '밭떼기'는 포전거래라고도 하는데, 생산물을 일정한 조건으로 인수하는 계약을 맺고 하는 농산물 재배를 뜻한다.
같은 마을에 사는 장석(48) 이장은 윤 씨보다 더 낮은 값을 받았다. 그는 포기당 1000원 정도를 받았는데, 평년에 4~500원 받던 것에 비하면 꽤 괜찮은 값이다. 장 이장은 "시중에 배추가 1만 원이 넘는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돌아오는 건 별로 많지 않다"고 말했다. "추석 전에 밭떼기로 다 팔아버려서 계약 단가가 낮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장 이장은 아직 계약 하지 않은 밭 4000평에서 수익이 나길 기다리고 있다.
흘리마을은 사정이 좋은 편에 속한다.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종부 3리는 10가구가 총 2만 평 정도 배추 농사를 짓는데 계약 재배 농가가 9가구에 이른다. 출하가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밭들은 '장사꾼(수집상)'들에게 모두 넘어갔다. 이항근(54) 이장은 올해 1500평을 계약 재배했는데 이익이 크지 않다. 오히려 그는 "큰 손해를 봤다"고 말했다. 작년까지는 계약 재배를 하지 않았다가 수익이 보장되지 않아 올해부터 계약 재배를 시작했다. 50일 전(8월 말)에 밭떼기 계약을 했는데 1500평을 600만 원에 장사꾼에게 넘겼다.
▲ 장석 이장이 아직 계약을 마치지 않은 배추밭을 바라보고 있다. ⓒ프레시안(이경희) |
"유통 구조 문제 해결, 농협이 나서야"
이런 유통 구조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있다. 일차적인 책임은 농협중앙회에 있다는 의견이 많다. 장석 이장은 "농협이 고리대금업자보다 더하다"고 말했다. 농민들이 농사를 위해 빚만 잔뜩 끌어다 쓰게 만들고는 정작 농민들의 수익구조 안정화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협 측 입장은 다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는 농민들의 잘못도 있다는 게다. 농협 중앙회 채소팀 허장행 차장은 "밭떼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농협을 통해 계약 재배하라고 설득해 왔다. 이미 1995년도부터 그 사업을 하고 있다. 매년 생산량이 넘으면 사서 폐기처분 했다. 작년엔 5만6000톤 정도 폐기했다. 농협 처지에서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농민들이 농협보다 일반 상인과의 계약을 더 선호하는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해 허 차장은 "일반 상인과 밭떼기 계약을 하면 농가는 씨만 뿌리고 넘기면 된다. 그러나 농협과 계약하면, 계약한 물량이 출하할 때까지 농가가 관리해야 한다. 농민들의 고령화가 원인이 않을까 싶다. 농가 입장에서는 관리를 원하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허 차장은 "농가들이 농협과 계약 재배를 하면 이익이 날 때 환원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라면서도 "계약 물량을 많이 늘려야 하는데 장비나 시설 등 한계가 있어서 더 못하는 건 아쉬운 측면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설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다. 지난 8일 농협중앙회 국정감사에서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최인기(민주당) 의원은 "농협이 올해 배추 계약재배를 한 건도 체결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농협은 배추 파동에 대한 책임을 벗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 출하가 끝난 배추밭. ⓒ프레시안(이경희) |
"수집상 계약 재배 줄이고 농협 계약 재배 늘려라"
사실, 밭떼기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국승용 박사는 "포전거래(밭떼기)는 선물거래의 일종인데, 순기능이 분명히 있다. 농가 입장에서는 포전거래를 통해 위험을 덜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농산물 유통에서 문제가 뭘까? 국 박사는 "전체 유통량의 80%가 포전거래로 이뤄지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포전거래 자체가 나쁘다기보다, 그 비중이 너무 높은 게 문제라는 지적이다. 어느 정도 물량 확보가 됐는지 파악하기 어려워 정부가 정책을 펴고 싶어도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 국 박사는 "농협 계약재배를 늘리는 게 한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농협중앙회를 통한 계약 재배 외에도 산지와 소비자 직거래, 인터넷 전자상거래 등 다양한 유통채널이 필요하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입장이다.
중간 유통단계 줄이면 농민에게 돌아가는 혜택 더 커질 것
또 하나 농민들이 공통으로 지적한 것은 중간 유통문제다. 이 이장은 "정부가 나서서 중간 단계를 줄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농산물 유통구조는 보통 '생산농가→산지수집상→도매시장→중·도매상→소매업체' 순이다. 이때 수집상이 농가를 돌아다니며 수집한 상품은 도매시장에서 상인들이 경매로 낙찰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가격이 부풀려진다. 전문 수집상들은 배추를 대량 확보한 후 물량을 시장에 내놓지 않고 가격을 주시하는 때도 있다. 생산자뿐만 아니라, 중간 유통 단계 비용을 지급해야 하는 소비자도 손해를 본다.
이 이장은 "이렇게 폭등한다고 해도 농민들은 생산비 정도만 건지니 상인들만 덕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사짓는 데 안정성만 있다면 계약 재배 안 할 것이다"라며 "우리 마을도 예전엔 30가구 정도 지었는데 그나마 다 없어지고 이것만(10가구) 남았다. (농사에) 보장된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정부 대책 근시안적", 농민 한목소리
최근 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에 대해선 농민들 모두 "근시안적 대책"이라고 입을 모았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지난 1일 중국산 배추와 무 공급 등을 골자로 한 '김장채소 수급안정 방안'을 발표했으며, 서울시는 배춧값 안정을 위해 저렴한 가격으로 배추를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흘리마을에서 한창땐 2~3만 평정도 배추 농사를 지었다는 김종선(62) 씨는 "흉작이어서 농민들이 폭삭 망할 땐 관심도 안 갖던 정부가 이럴 때만 관심 갖는 게 아쉽다"며 "지금 공급 없다고 중국에서 대거 수입하면 농민들은 제값을 못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부의 주먹구구식 대책이 오히려 문제를 심화시킨 것이라는 판단이다.
윤병두 씨는 "올해 이렇게 배추 파동이 난 것은 다 정부 탓이다. 배추가 60일에서 100일 정도면 충분히 자라는데 정부가 미리 배추 수량을 파악해서 농가에 배추를 더 심으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탁상행정이 결국 배춧값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