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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타임 연애패배자 윤종신, 결국 행복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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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타임 연애패배자 윤종신, 결국 행복을 찾다

[김봉현의 블랙비트] 아빠가 된 윤종신의 열두 번째 앨범 [행보]

또 한 번의 연애 패배 후 어김없이 찾게 된 것은 역시 두목의 음악이었다. 연애 패배단을 이끄는 윤 두목의 음악. 두목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역시 두목은 아무나 하는 자리가 아님을 깨닫는다. 혼잣말, 자책, 안 물어봤는데 안부 말하기, 미안할 일 아닌데 미안하다고 하기, 문 안 열어주는데 집 앞에 찾아가서 괜히 택시비 깨지기, 어장관리 다시 사귀자는 뜻으로 오해하기 등등 윤 두목과 나는 클래스 자체가 다름을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랜 행복의 대가로 나는 쓰디쓴 여름을 보냈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기에 입 다물고 두목의 음악만 경청했다. 훈련소는 아니지만 이곳이 내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고개를 털고 정신을 좀 차려갈 무렵 두목의 새 앨범이 나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단을 떠나면, 곧 죽음이라는 암시였다. 영원히 연애 패배하라는 두목의 저주였다.

하지만 앨범을 들어보니 살짝 내가 착각한 듯싶다. '보통사람'에서 '참여정부'까지의 긴 세월 동안 거의 변하지 않던 윤 두목이, 변했다. 이제 나는 누굴 의지해야 하나. 실은 내 부주의함의 탓이기도 하다. 11집에서 두목은 힌트를 준 적이 있다. 물론 11집은 전체적으로도 그동안 자행(?)해왔던 '참을 수 없는 초라함'과 '절절한 슬픔'보다는 '미소 띤 애잔함'으로 중심축을 살포시 이동한 앨범이었다. 그러나 좋다고 <동네 한바퀴>를 따라 흥얼거리는 대신 내가 매의 눈으로 놓치지 말아야했던 것은 <O My Baby>의 존재였다. 다시 말해 두목은 이제 더 이상 쓸쓸한 노총각이 아니다. 그는 이제 어엿한 남편이자 아빠가 되었다. 11집이 변화의 과도기였다면, 12집은 그 변화가 본격적으로 안정권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윤종신 12집 [행보] ⓒ윈드밀미디어

연애 패배주의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슬픈 노래의 비중이 눈에 띄게 줄었고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다채로운 색이 담긴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맥락에서 이 앨범의 얼굴 격인 <그대 없이는 못살아>는 상징적이다. 얼핏 슬픔이 배어나지만 결국은 당신이 있어 행복하다는 소리다. 굳이 이분법을 동원하자면 이 노래의 키워드는 슬픔보다는 행복이다. 변화라면 변화다.

아예 이 앨범에서 슬픔을 떠맡고 있는 노래들만 따로 떼어놓고 살펴보자. 대표적으로 <후회 王>과 <이별의 온도>를 보자. 천편일률적인 주류 가요계 발라드와 비교한다면 당연히 비교우위다. 그러나 윤종신은 불행하게도 과거의 자신에게 지고 만다. 다소 무뎌진 노랫말과 멜로디를 들으며 다시 한 번 깨닫는 것은, 지금껏 그가 정말로 걸출한 이별노래들을 수없이 불러왔다는 사실이다. 동어반복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긴 세월을 지나온 그이지만 듣는 이는 냉정하다. 윤종신의 수많은 이별노래 중에 굳이 이 노래들을 택할 특별한 이유는 없어 보인다.

두 가지 버전으로 수록된 <해변의 추억> 역시 비슷하다. 편곡에서 마치 4집의 <이층집 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데이 버전(Day Ver.)과 노래 자체로만 따지면 이 앨범의 이별노래 중 가장 성공작이라고 할 만한 나잇 버전(Night Ver.)은 그러나 9집에 수록된 <바다이야기>의 2% 부족한 변주로 들린다. 단순히 소재가 겹치기 때문은 아니다. <해변의 추억>이 하고 있는 말은 이미 <바다이야기>가 더 강렬하고 여운 있게 전달했다.

반면 <Walking Man>은 고무적이다. 윤종신 본인이 이번 앨범에서 가장 아낀다고 밝히기도 한 이 곡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능가하는 문학성과 리얼리즘을 내포했던 10집의 <서른 너머...집으로 가는 길>을 이어간다. 다시 처음부터 제대로 말하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에서 몇 년이 지나면 <서른 너머...집으로 가는 길>을 부르게 되고, 거기에서 또 몇 살을 더 먹으면 <Walking Man>과 마주하게 된다. 윤종신은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노래에 털어놓음으로서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살아가는 대한민국 보통 남성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음악은 결국 공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남성 뮤지션이 세월을 겪으며 자신의 노래에 자연스럽게 담아낼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 중 하나다.

그런가 하면 '일관성'이나 '짜임새'같은 단어로 이 앨범을 재단한다면 호평을 하기는 어렵다. 하나의 앨범으로서 응집력이 약하다는 것은 윤종신 본인 역시 인정한 부분이기도 하다. '월간 윤종신'의 순차적 배열은 앨범 타이틀처럼 '행보'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고, 객원보컬의 적지 않은 기용은 가수 윤종신의 솔로 앨범이라는 이미지를 흐리게 한다.

다만 <본능적으로>와 <이성적으로>, <넌 완성이었어>와 <치과에서>, <해변의 추억 (Day Ver.)>과 <해변의 추억 (Night Ver.)> 등의 2종세트들은 단순히 '우려먹는다'는 지적을 받기에는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멜로디나 코드, 편곡을 경우에 따라 한두 가지씩 달리해가며 서사가 이어지는 2부작을 만든다거나 완전히 다른 주제의 노래로 탈바꿈시킨다거나 하는 그 나름대로의 실험적 시도가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정지찬과 조정치 등의 조력자도 기억해야함은 물론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앨범이 윤종신의 디스코그라피에 큰 족적을 남길만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별 노래가 그리워질 때면 아마 나는 그의 예전 노래를 찾아들을 것이고 <막걸리나>나 <바래바래>같은 곡은 앞으로 다시 찾아들을 계획이 현재로서는 딱히 없다.

무엇보다 이 앨범은 나를 포함한 그의 오랜 팬들로 하여금 일종의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한다. 뮤지션이 하고자 하는 음악과 내가 바라는 음악이 일치하지 않을 때,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에게 기대하는 음악을 앞으로는 점점 듣기 힘들어지겠다는 예감이 들 때, 팬이자 리스너로서 가져야할 바람직한 태도란 무엇일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만 나는 지금 한창 휘날려대던 연애 패배단의 깃발을 잠시 내려놓고 윤 두목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사람의 상황과 생각과 감성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를 존중한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서만큼은 연애 패배단의 두목이자 이별 노래계의 끝판왕이며 모든 남성 찌질이의 대표자로서 그를 남겨놓을 것이다. 그의 노래와 함께 울었던 내 모든 추억에 대한 나의 수줍은 예의다.



*필자의 블로그에서 더 많은 음악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http://kbhma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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