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륭전자 노사 합의가 남긴 성과는 여러 가지다. 우선 수년간의 싸움으로 노사가 평화적인 해결이 어렵다고 여겨졌던 사업장에서 '대화'를 통해 결말을 지었다. 부속 합의서 내용에서도 노사가 양보한 흔적이 보인다.
회사 매출이 2004년 1711억 원에서 2009년 222억 원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당장 이들을 고용할 생산라인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 1년6개월의 유예기간을 둔 후 고용하기로 했다. 2008년 당시 자회사 소속으로 직업훈련을 거친 후 고용하겠다는 사측 안보다 누그러진 유예 사유였고 노조 측도 이를 수용했다. 대신에 지난 5년간의 농성과 유예 기간 동안의 임금을 '노사화해기금'이라는 이름으로 복직 예정자들에게 전달키로 했다. 사측은 경영상황이 호전되지 않을 경우 1년6개월을 더 유예할 수 있지만 임금은 계속 지급된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사측 입장에서 단기 파견직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G20을 개최하는 입장에서 사측의 불법 파견 책임이 분명한 사안을 내버려두는 것도 정부와 집권 여당 차원에서 부담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에 알린 최초의 싸움이 해결됐다는 의미도 크다. 사측은 경영 정상화를 위한 합의일 뿐이라고 의미를 한정지었지만, 기업이 불법 파견에 대한 사회적 여론을 의식하고 일부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KTX 여승무원의 복직 주장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고,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이어지는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반격'에 더해 기륭전자의 합의 소식이 힘을 보탰다는 평가다.
노동단체·진보정당, 제 역할 다했나?
무엇보다 5년이 넘게 농성을 지속한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이 성과의 원동력이 됐다. 2006년 30일에 이어 2008년 94일에 달하는 목숨을 건 단식을 벌였고, 각종 고소, 고발과 벌금, 법원의 집회 제한 명령에도 이들은 기륭전자 구 사옥 부지를 떠나지 않았다. 이들의 농성으로 부지를 매입한 업체가 사업에 지장을 겪었고, 공사 지연에 따른 이자 압박이 기륭전자가 협상장에 다시 나온 원인이 됐다는 배경도 이들이 만들어냈다.
▲ 기륭전자 사태를 해결한 건 정치권도, 노동계도 아닌 끝까지 남아서 단식으로 저항했던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힘에서 비롯됐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러한 사실은 한편으로 정당이나 민주노총 등 '조직의 힘'이 기륭전자 사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로 이어진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2008년 '94일 단식' 당시 함께한 예가 있고, 최근 조합원들이 단식을 재개하면서 정치권이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게 협상을 이끌어낸 한 요인인 것은 맞다. 하지만 1895일이라는 숫자를 뛰어넘기란 역부족이다. 기륭분회를 대신해 협상한 금속노조 등 노동단체 역시 승리를 자축하기 전에 "이렇게 쉽게 될 거였으면 왜 6년을 끌었나"라는 조합원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소장은 "기륭전자 싸움을 겪으면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역량에 대한 논란이 생겼고 진보정당 역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당장은 기쁜 소식에 축하를 보낼 일이지만 '구로공단 파견 노동자들이 한 번 싸우려면 이렇게 힘든 과정을 겪을 수 있다'는 사례를 남긴 데 대해서는 조심스럽지만 거론해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2년 이하 파견 노동자, 여전이 법의 사각지대
기륭전자 사례와 별개로 파견 노동자들이 여전히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는 현실도 남은 과제다. 2005년 노동부는 기륭전자의 불법 파견을 인정했음에도 단 500만 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사측이 파견 노동자를 도급업체 소속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공정에 개입한 정황이 나왔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최근 현대차 대법원 판결에 비춰 봐도 기륭전자 조합원처럼 단기 파견직 노동자들에 대한 안전망은 여전히 요원하다. 대법원은 2005년 개정된 구 파견법에 따라 불법 파견 형태로 2년 이상 일한 사내하청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봤다. 2년 미만 일한 노동자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물음표로 남긴 셈이다. 기륭전자 사태 이후 구로공단에서 3개월, 6개월짜리 초단기 파견 계약직으로 떠도는 노동자들은 여전히 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셈이다.
회사의 복직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 지 여부도 관심사다. 회사의 의지를 떠나 산업 환경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최근 고용전략에서 파견업종 확대를 밝혔고, 제조업에서도 파견을 허용해야 한다는 요구가 재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의 싸움이 진정으로 '끝'날 수 있을 지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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