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DS와 티시스, 비리 구조는 판박이
이런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초처럼 등장하는 게 있다. 바로 재벌 계열 SI(System Integration)업체다. 삼성의 경우, SI업체인 삼성SDS가 경영권 세습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BW(신주인수권부사채)를 헐값에 발행해 회사 자산을 넘겼고, 그래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태광 비리 사건도 마찬가지다. 태광 계열 SI업체인 티시스(옛 태광시스템즈)가 비리의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호진 태광 회장은 2006년 티시스에 대규모 유상증자를 단행했다. 이 회사 주식 수를 두 배 가까이 늘리며 발행 주식 전량을 이 회장 아들 이현준 씨에게 배정했다. 이현준 씨는 이 회사 지분 48.98%를 보유해 이 회장(51.02%)에 이어 2대 주주가 됐다. 문제는 당시 신주 발행가격(1만8955원)이 턱없이 낮다는 점이다. 적정 발행가격을 정확히 산정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20만 원은 된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삼성SDS BW 헐값 발행 사건과 닮은꼴이다. 태광 비리를 수사하는 서울 서부지검 역시 이 대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건설사와 SI업체, 재벌가의 필수 아이템?
그런데 왜 유독 SI업체가 이런 일에 자주 끼어드는 걸까. 이유가 있다. 재벌들이 주력업종에 관계없이 건설사 하나쯤은 꼭 갖고 있으려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SI사업은 다른 IT사업과 마찬가지로 초기자본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다른 IT사업에 비해 기술적 진입장벽이 낮다. 게다가 재벌의 경우, 일단 회사를 세우기만 하면, 일감은 저절로 확보된다. 계열사 전산 시스템 구축 및 관리 업무를 도맡는 것이다. 재벌 계열 건설사가 계열사 공사를 싹쓸이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다른 효과도 있다. 계열사의 전산망을 관리한다는 것은 계열사의 모든 정보를 샅샅이 들여다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열사 장악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다.
재벌 계열 SI업체가 부당 내부거래의 주범로 종종 꼽히는 것은 그래서다. 하지만 아직까지 바뀐 것은 별로 없다.
재벌 후계자가 얻은 이익만큼 회사가 손해보는 구조
매출이 내부거래에 의존한다는 점은 다른 비리로 이어진다. SI업체의 매출 및 이익을 그룹이 제멋대로 조절할 수 있으므로, 불법·편법 상속의 수단이 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SI업체의 주식을 자식에게 헐값에 넘긴다. 그리고 나서 내부 거래 단가를 높여서 SI업체의 수익을 높인다. 헐값에 주식을 넘겨 받은 자식은 저절로 돈이 불어난다. 만약 이 SI업체가 비상장 회사라면, 상장으로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얻은 이익은 결국 다른 계열사의 부(富)가 옮겨온 것일 뿐이다. 따라서 다른 계열사는 그만큼 손해를 본 셈이고, 다른 계열사 주주들 역시 같은 손해를 본 셈이다. '불법' 딱지가 붙는 이유다. 또 내부거래 과정에서 돈을 일부 빼돌려 비자금으로 챙길 수도 있다. 이 경우 역시 '불법'이다.
이재용, 정의선…. 재벌 후계자라면 누구나
실제로 태광그룹의 티시스는 설립 첫해 32억 원에 불과했던 매출이 2005년 289억 원, 2006년 325억 원, 2007년 528억 원, 2008년 907억 원으로 뛰어 올랐다. 지난해 매출은 1052억 원이다. 태광 후계자인 이현준 씨가 2대 주주가 된 2006년 이후 매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검찰이 주목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지분을 넘긴 뒤, 내부거래로 수익성을 높이는 재벌가(家)의 통상적인 수법이 그대로 반복됐다는 것.
어쩌면 태광 측은 억울할 수도 있다. 삼성을 비롯한 대부분의 재벌이 다 마찬가지인데 왜 자신들만 문제 삼느냐는 게다. 실제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은 삼성SDS 지분 8.81%를 보유하고 있다. 정의선 현대기아차 부회장은 현대차그룹 SI업체인 오토에버시스템즈 지분 20.1%를 갖고 있다. SK그룹 계열 SI업체인 SK C&C는 최태원 회장이 1대주주이며,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회사다.
내부 거래에선 초과 이익, 외부 거래에선 '헐값 수주'…"중소기업만 운다"
하지만 SI업체가 재벌의 계열사 장악 및 승계에 동원되면서 생긴 부작용은 이밖에도 많다. 재벌 계열 SI업체는 내부 거래에서 초과 이익을 얻는 대신, 외부 거래에선 '헐값 수주'에 나서곤 한다. 한때 SI업계에서 유행했던 '1원 입찰'이라는 말은 그래서 생겼다. 이런 행태에 따른 피해는 중소 SI업체가 뒤집어 쓴다. 이들은 따로 손해를 메워줄 곳이 없으므로, '직원 쥐어짜기'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
SI개발자들이 겪는 살인적인 노동강도는 기형적인 재벌 지배구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헐값 수주'와 '직원 쥐어짜기'가 SI업체의 경영 노하우로 통하는 상황에서 IT산업이 제대로 된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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