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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에 대한 잘못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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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에 대한 잘못된 생각

[이정전 칼럼] 분야마다 달리 적용돼야 할 정의 개념

2008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저탄소 녹색성장'을 선창하자 한 동안 온 나라가 녹색성장 얘기로 시끌시끌하더니 2010년에는 8·15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선창하자 이번에는 공정한 사회니 정의니 하는 얘기로 우리 사회가 온통 시끄럽다.

우리 사회의 불의를 고발하는 얘기로부터 이명박 정부가 과연 정의를 얘기할 자격이 있느냐는 비난, 그리고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서 이래야 한다는 둥 혹은 저래야 한다는 둥 갖가지 주장들이 어지럽게 언론매체를 장식하고 있다.

허나, 얘기는 무성해도 정작 정의나 공정한 사회라는 것이 콕 꼬집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우선 이명박 대통령이 강조하는 공정한 사회부터가 그렇다. 서민을 위한 정치로 집권 후반기를 장식하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에 비추어 보면 그의 정의관이 상당히 평등지향적인 것처럼 다가오는가 하면,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과거지사를 지금의 공정성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공정한 사회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다분히 김황식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사 청문회를 엄호하는 듯한 대통령의 발언을 들어보면 그의 정의관은 상당히 보수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프레시안>, 김영사, 예스24가 공동 주최한 <정의란 무엇인가> 출간 기념 대담회에 모인 사람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정의에 얼마나 목말랐는지를 보여준다. ⓒ프레시안(최형락)

정의에 대해서 얘기할라 치면 언뜻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그 첫째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책의 제목처럼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고, 그 둘째는 "과연 정의로운 사회가 우리 모두 궁극적으로 지향해야하는 가장 바람직한 사회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두 번째 질문은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첫 번째 질문부터 짚어보자.

그동안 정의 혹은 공정한 사회에 관한 여러 사회지도자들의 주장들을 들어보면, 마치 단 하나의 올바른 정의의 개념이나 정의의 원칙이 서 있음을 전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떤 분은 마치 우리 국민이 합의한 정의의 원칙이 이미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음을 은연중에 전제하고 그 원칙의 실천을 촉구한다. 사실,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줏대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한 가지 정의의 원칙을 신봉하면서 이것을 수미일관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일상 행동을 살펴보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많은 경우 사람마다 단 한가지의 정의의 원칙이 아니라 여러 가지 앞뒤가 맞지 않는 정의의 원칙들을 한꺼번에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서 상황이 달라짐에 따라서 내세우는 정의의 원칙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예컨대 어떤 상황에서는 평등을 주장했다가 다른 상황에서는 불평등을 옹호하고 나선다. 말하자면 줏대 없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줏대 없이 행동하는 것이 나쁜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상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단 하나의 정의의 원칙은 존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단 하나의 정의의 원칙만이 지배하는 사회는 곤란하다. 실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행동하듯이 상황에 따라 적용되는 정의의 원칙도 마땅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투표를 할 때는 누구나 똑 같이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어 있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모두 동등한 발언권을 가진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출마하는 후보자들 역시 누구나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굳게 믿고 있다. 그 어떤 후보자가 유리한 대우를 받으면, 부정선거라고 해서 야단난다. 법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 이런 평등주의는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다. 즉,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등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지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영역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서 야간근무까지 해가면서 많은 실적을 올린 우수 회사원과 적당히 시간 때우기나 하는 게으름뱅이 회사원에게 똑 같은 월급을 준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회사는 망하게 되어 있다. 장관의 딸이고 여자라고 해서 높은 연봉을 주고 지방대학을 나오고 남자라고 해서 낮은 연봉을 준다면 누구나 이를 부당하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회사도 망하기 십상이다. 값싸고 좋은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며, 저질이고 비싼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망해야 한다. 그런데,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면 누구나 뭔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능력과 성과에 비례해서 대우를 해주는 능력주의 혹은 성과주의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다. 특히 경제학자들이 이 점을 몹시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기반이 되는 가정을 보자. 대부분의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성과주의나 능력주의는 배격 당한다. 일 잘하고 능력이 좋은 자식은 귀여워해주고 일 못하고 능력이 부족한 자식을 푸대접하는 가정은 정상적인 가정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공부를 잘 하는 아이에게는 맛있는 음식도 많이 주고 용돈도 두둑하게 주는 반면 공부 못하는 아이에게는 용돈도 주지 않고 굶기기를 예사로 한다면 누구나 그런 부모에게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다 같은 자식이라고 해서 부모가 똑같이 대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못난 자식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쓰고 더 안쓰러워한다. 부자 아들이 준 용돈을 꽁꽁 뭉쳐두었다가 가난한 아들집에 가서 넌지시 건네는 모정의 얘기가 옛날에는 얼마나 많았던가. 건강한 아이와 병든 아이가 있을 때 엄마는 늘 병든 아이 옆에 붙어 있기 마련이다. 장애아가 있는 가정에서는 부모가 장애아에게 너무 신경을 쓰는 통에 오히려 정상적인 애들이 희생을 당하기도 한다. 장애아라고 해서 내다 버린다면, 사회의 지탄을 받는다. 식물인간이 된 아들을 둔 어느 어머니는 단순히 눈빛만으로도 매일 그 아들과 무한히 많은 대화를 나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주위 사람들은 그 아들을 포기하라고 권하는지 모르겠다는 이 어머니의 절규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저리게 한다. 그게 엄마의 마음이 아닌가. 부모가 아이들에게 용돈을 나누어 줄 때에도 큰 애에게는 더 많이 주고 작은 애에게는 조금 준다. 아무래도 큰 애가 작은 애보다 돈을 써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동창회를 보자. 정상적인 동창회에서는 돈을 많이 번 회원이 더 많은 회비를 낸다. 그리고 모아둔 회비를 불우한 회원을 위해서 더 많이 쓴다. 마을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성공한 이웃에 아첨하기보다는 불우한 이웃을 걱정하고 배려하는 것이 진짜 마을 공동체다.

학교는 어떤가. 사실, 참된 교육이란 못난 녀석들을 우수한 학생으로 만드는 것이다. 똑똑한 녀석들을 우수한 학생으로 만드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가. 이런 점에서 보면, 일류대학 교수들은 참된 교육자라는 칭찬을 받을 자격이 별로 없다. 전국 최고의 수재들을 모아서 최고의 인재로 기르는 일은 웬만큼 정신이 똑바로 박힌 교수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참된 교육을 하는 학교란 뒤처진 아이들이나 못난 아이들에게 더 많은 배려를 해주고 더 많은 예산을 배정하고 더 많은 격려를 주는 곳이다.

이와 같이 더 많은 배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배려해주어야 한다는 원칙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필요의 원칙이다. 대체로 보면, 사회적 약자들은 더 많은 배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필요의 원칙은 사회적 약자 보호의 원칙과 일맥상통한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가정을 비롯해서 지역사회, 혈연공동체, 동창회, 등, 이른바 사회적 영역(혹은 사회화 영역)에서는 대체로 필요의 원칙이 실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필요의 원칙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일소에 부친다. 필요의 원칙이란 말 그대로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원칙인데, 필요하다고 해서 다 들어준다면 누구나 더 많이 필요하다고 요구할 것이니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 시대의 사회주의들도 필요의 원칙을 배격하였고 그런 주장을 한 마르크스에게도 등을 돌렸다. 그렇지만, 가정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저변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필요의 원칙이 실제로 실천되고 있다. 다수의 정상인들은 그런 필요의 원칙이 실천되는 가정과 마을에서 성장하였음을 깜빡 잊는 것 같다. 그러면서 어른이 되서는 자기들을 키워준 필요의 원칙을 우습게 본다.

요컨대, 우리 생활의 영역별로 각각을 주도하는 정의의 원칙이 달라지며,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영역에서는 평등의 원칙, 경제적 영역에서는 성과주의 내지는 능력주의, 그리고 사회화 영역에서는 필요의 원칙이 주된 정의의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일상인들도 이 세 가지 정의의 원칙을 마음속에 두고 있다가 각 영역에 따라 거기에 적합한 원칙을 뽑아든다.

물론, 일부 극단적 시장주의자들은 모든 영역에 걸쳐 한 가지 원칙, 즉 성과주의 내지는 능력주의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장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돈 많은 사람들이 돈에 비례해서 투표권을 더 많이 행사하게 허용한다면 우리 사회는 말 그대로 금전만능주의 사회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정치권이 금권에 너무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서민들이 삼성에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는 이유도 그리고 이명박 정부에 반대투표를 던졌던 이유도 그런 걱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 정치권뿐이랴. 만일 우리 가정이나 지역단체 그리고 동창회도 성과주의 내지는 능력주의에 따라 운영된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각박하고 살벌해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금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는 독일의 하버마스는 경제적 영역에 국한되어야할 정의의 원칙이 정치적 영역 및 사회화 영역으로 점차 침투되어 가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무척 우려하고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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