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9월이다. 동물원의 <가을은>과 윤종신의 <9월>을 다시 들어주어야할 때가 왔다. 사실 시기상으로는 이미 10월이 다 되었지만 체감 상으로 가을의 도래는 아직 요원하다. 수도권 물난리를 야기하고 있는, 이제는 저주스럽기까지 한 이 빗방울이 그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계절의 바뀜을 실감할 수 있을 듯하다.
가을에 관한 클리셰가 있다. 문학적으로는 '독서의 계절', 음악적으로는 '알앤비의 계절'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사시사철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 나에게 전자는 전혀 와 닿지 않는 반면, 가을이 되면 힙합보다 알앤비 앨범의 아이팟 재생 횟수가 증가하는 경험을 매년 하고 있는 나에게 후자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는 진리다.
그래서 준비했다. 가을과 함께 돌아온 남자들. 최근 새 앨범을 발표한 세 명의 알앤비-맨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풀어보기로 한다. 그들의 새 음악을 들으며 가을을 앞당겨 보자.
라이프 제닝스 - 마지막 앨범이다, 들어라!
라이프 제닝스(Lyfe Jennings)가 돌아왔다. 그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방화(放火) 전력이다. 스무 살 적인 1992년 그는 방화 혐의로 수감되어 무려 10년을 복역하고 나왔다. 20대 전부를 감옥에 바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감옥 안에서 음악에 눈을 떴고 출소하자마자 녹음을 시작해 데뷔 앨범 준비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수감 번호를 앨범명에 새긴 데뷔 앨범 [Lyfe 268-192]는 백만 장 이상이 판매되며 큰 성공을 거둔다. <Must Be Nice>, <Stick Up Kid> 등의 싱글에 힘입었음은 물론이다.
최근 발표한 [I Still Believe]는 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정규 앨범이다. 정확히 말하면, 마지막 정규 앨범이 될 가능성이 높은 앨범이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음악활동은 이어나갈 것이지만 가족 및 신변 문제로 인해 더 이상 앨범은 발표하지 않겠다고 그가 선언한 바 있기 때문이다.
외부작업도 늘리고 유행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던 지난 앨범 [Lyfe Change]와는 달리 그는 이번 앨범에서 다시 독자적인 작업을 감행했다. 흥행을 보증해줄 프로듀서의 이름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앨범은 그만의 향기를 짙게 풍긴다. 그의 걸걸한 보컬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그가 자신만의 색깔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구체적인 통계 수치를 제시하며 '좋은 남자 감별 전략'을 가르치는 재미있는 가사가 관심을 끄는 <Statistics>, 짝사랑하는 그녀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한 <Whatever She Wants>를 비롯해 13곡이 담겨 있다. 최고의 소울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인 앤서니 해밀턴(Anthony Hamilton)과의 협연(<Mama>)도 놓쳐서는 아니 되겠다.
트레이 송즈 - 메인스트림 알앤비 씬의 젊은 왕
트레이 송즈(Trey Songz)도 돌아왔다. 트레이 송즈라는 이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 미국 메인스트림 알앤비 씬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보컬리스트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 1순위로 할 수 있는 대답 되겠다. 침대 위 질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슬로우 잼은 물론 순애보 가득한 발라드, 그리고 래퍼들과 함께 으스대기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는 데뷔와 함께 시종일관 알. 켈리(R. Kelly)와 비교당해 왔으며 한 때 알. 켈리가 차지했던 '알앤비 멀티 플레이어 왕좌'를 현재에 손에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새 앨범 [Passion, Pain And Pleasure]가 지난 앨범 [Ready]와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더 가지런하게 정돈되었다는 것이다. 알앤비와 힙합의 다양한 면을 아우르며 (개별 곡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조금 산만한 느낌을 주었던 [Ready]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트레이 송즈는 상대적으로 알앤비 본연에 충실한 고전적인 곡들로 돌아왔다. 마치 본인의 앨범에서는 철저하게 알앤비 보컬리스트로 인정받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그중에서도 '체념'과 '나약'의 상징과도 같은 프로듀서 겸 보컬리스트 마리오 와이넌스(Mario Winans)가 일본의 뉴에이지 거장 류이치 사카모토의 <Bibo No Aozora>([바벨 OST] 수록곡)를 샘플링해 만든 <Can't Be Friends>, 90년대 알앤비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곡으로 전화를 받지 않는 여성의 행태를 질타(?)하고 있는 <Please Return My Call> 등이 귀에 들어온다. 이 가을, 젊은 알앤비 왕의 신보를 외면할 자 그 누구인가.
비랄 - 질 좋은 소울 푸드
비랄(Bilal) 역시, 돌아왔다. 앞서 소개한 트레이 송즈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알앤비 보컬리스트라면, 비랄은 굳이 말하자면 마니아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는 네오 소울 보컬리스트다. 비랄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그가 소울쿼리언스(Soulquarians)의 일원임을 밝히는 것이다.
소울쿼리언스는 네오 소울 아티스트와 그와 비슷한 음악적 성향을 가진 힙합 아티스트가 친분과 유대를 갖고 뭉친 집단으로서, 루츠(The Roots)의 퀘스트러브(Questlove)를 필두로 커먼(Common), 故 제이 디(Jay Dee), 에리카 바두(Erykah Badu), 제임스 포이저(James Poyser), 디앤젤로(D'Angelo), 큐-팁(Q-Tip) 등이 속해 있다. 비랄은 다양한 작품을 통해 이들과 협연하며 이름을 알려왔다.
비랄이 최근 발표한 두 번째 정규 앨범 [Airtight's Revenge]는 사실 횟수로 따지면 세 번째 정규 앨범이다. 지난 2001년 발표했던 데뷔 앨범 [1st Born Second]에 이어 2006년 [Love for Sale]을 두 번째 앨범으로 발표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으나 예상치 못한 인터넷 유출로 정식 발매가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를 제외하면 무려 9년만의 두 번째 앨범인 셈이다.
앨범에는 소울을 기반으로 한 넓은 음악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11개의 곡이 실려 있다. 특유의 중성적인 보컬을 원 없이 만끽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비록 이번에도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렇다고 음악의 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질 좋은 소울 푸드, 놓치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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