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일상의 것들을 사유하게 만든다. 일차적으로 그의 영화는 춘천과 경주, 제천과 제주도, 그리고 설악산과 통영이라는 우리나라 지역의 이미지를 영화의 이미지로 만든다. 지역에 대한 과거의 이미지가 고정된 이미지라면,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변화와 생성의 이미지이다. 고정된 지역의 이미지에 영화라는 인물과 풍경이라는 변화와 생성의 이야기가 만드는 새로운 이미지가 삽입되는 것이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본 관객들은 지역의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영토화하여 각각의 지역들에 대한 홍상수의 영화와 자신의 삶이 결합된 변화와 생성의 새로운 이미지로 재영토화할 수 있다. 영화 이미지가 새로운 지역에 대한 이미지와 관계적 삶의 이미지로 재결합되는 것이다. 그것은 춘천과 경주, 제천과 제주도뿐만 아니라 영화 보는 관객의 자아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춘천과 경주, 그리고 제천과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프랑스, 혹은 베네주엘라와 이라크 등등의 지역들에 대해서도 고정된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 고정된 이미지는 할리웃 영화난 매스컴이 근대적으로 가공한 근대의 일상적 이데올로기이다. 이러한 근대의 일상적 이데올로기에서 탈영토화하여 변화와 생성의 새로운 탈근대적 이미지로 재영토화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새로운 생성적 관계의 이미지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그러한 새로운 관계의 이미지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하하하>(2010)에서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이미지로 등장하는 영화감독 문경(김상경 분)과 영화평론가 중식(유준상 분)의 사랑 이야기는 통영에 살고 있는 관광해설가 성옥(문소리 분)과 시인 정호(김강우 분)의 지역성과 폭력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청계산에서 마시는 막걸리와 함께 "하하하"의 웃음소리로 이어지는 문경과 중식의 사랑 이야기는 통영을 지역성과 폭력성에서 벗어나 사랑이라는 로맨스의 이미지로 재구성한다.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영토화한다는 것은 근대적으로 구성된 언어의 세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는 교수, 영화감독, 시인, 그리고 남성과 여성 등등의 근대적으로 구성된 서열적이고 폭력적인 언어의 이미지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진다. 근대의 언어 이데올로기에서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혼상수 감독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사와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적 대화의 언어나 이야기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일관성이 없으며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한 언어와 이야기의 부서진 틈새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것은 몸과 마음이 관계를 맺는 수없이 다양한 인간과 인간이 만드는 사랑의 변주곡이다. 그 사랑의 변주곡 속에서 드러나는 이미지와 이미지, 그리고 몸과 몸의 관계가 새로운 언어와 마음을 창출시키는 것이다. <옥희의 영화>는 그 사랑의 변주곡 속에서 몸과 마음이 관계를 맺는 방식을 두 남자와 한 여성의 삼각관계 속에서 옴니버스 형식으로 보여준다.
II. 몸과 마음의 사랑 변주곡
<옥희의 영화>는 <주문을 외울 날>, <키스 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라는 네 개의 단편영화들이 서로서로 뒤엉켜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옴니버스의 영화이다. 관객들은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옥희의 영화>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주문을 외울 날>과 <키스 왕>, 그리고 <폭설 후>라는 또 다른 각각의 완결된 단편의 이미지들을 다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즉, 각각의 단편에서 만들어진 정규직 교수, 비정규직 교수, 학생, 대학, 강의, 영화 등등에 대한 영화 이미지의 언어들은 <옥희의 영화>를 보고나서 다시 산산조각이 나고 또 다른 이미지의 언어들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서 남는 것은 영화감독 성 교수(문성근 분), 또 다른 영화감독 비정규직 교수 진구(이선균 분), 그리고 옥희(정유미 분)의 상호관계가 지니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변화하는 생성적 이미지들뿐이다.
근대적인 사유와 지식과는 달리 언어와 이미지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몸과 마음(정신)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와 이미지는 근원적으로 하나이고, 몸과 마음도 근원적으로 하나이다. 순간적인 관계의 이미지가 언어를 만들고, 순간적인 관게의 몸이 마음을 만든다. 이미지가 언어를 만드는 것처럼 몸이 마음을 만는 것이다. 문제는 이미지로부터 만들어진 언어가 이미지를 지배하는 것이고, 몸으로부터 만들어진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 일시적 현상들이다. 이러한 언어가 이미지를 지배하고, 마음이 몸을 정신의 감옥에 가두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주문을 외울 날>은 비정규직 교수 진구의 언어가 성 교수의 이미지를 지배하고, 진구의 마음이 진구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현상을 아주 잘 보여준다.
진구의 언어는 실제 이미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소문과 풍문으로 만들어진 언어이다. 그리고 진구의 마음은 몸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이라는 열등감으로 구성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풍문의 언어와 열등감의 마음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근대의 감옥 속에 가두어 놓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근대적 대학제도의 문제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근대적 제도는 대학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구성체들을 풍문으로 만들어진 언어와 열등감으로 구성된 마음의 이데올로기가 실제의 이미지와 몸을 스스로 지배하도록 만드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국가장치들이다. 따라서 성 교수에 대한 진구의 풍문의 언어와 열등감의 마음이 만드는 폭력은 영화 시사회에서 한 여성관객이 진구에게 행하는 풍문의 언어와 열등감의 마음이 만드는 폭력과 동일하다.
▲ ⓒ프레시안 |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에서 보여주듯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만드는 근대적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과 동일한 풍문의 언어와 열등감의 마음이 만드는 미시적 관계의 폭력성은 몸과 몸이 맺어지는 수없이 많은 사랑의 변주곡에 내재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키스 왕>은 각각의 단편들을 매개하는 연결의 고리일 뿐만 아니라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몸과 마음을 매개하는 연결의 고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폭설 후>의 강의실에서 만들어지는 성 교수와 진구의 관계, 진구와 옥희의 관계, 그리고 옥희와 성 교수의 관계는 그들이 나누는 질문과 대답을 구성하는 언어들의 실제 이미지이다. 물론, 그 관계들의 이미지는 <옥희의 영화>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폭설 후>에서 만들어지는 언어의 유희와 상호 간 마음의 갈등은 <옥희의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재구성된다.
옥희와 진구의 관계는 상호 동일한 이미지와 이미지 그리고 몸과 몸의 관계이고, 옥희와 성 교수의 관계는 언어와 마음의 이데올로기가 만든 관계이다. 옥희와 진구의 관계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혹은 교수와 학생이라는 근대적 서열관계가 구성하고 있는 언어와 마음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이 서로서로의 이미지와 몸에 매료되어 관계를 맺는 사랑의 변주곡이다. 그러나 옥희와 성 교수의 관계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왜곡된 관계와 마찬가지로 교수와 학생,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대적 서열관계가 만든 언어와 마음의 이데올로기가 창출하여 만든 사랑의 변주곡이다. 이미지와 이미지, 몸과 몸의 관계가 만드는 사랑의 변주곡은 생성적 이미지를 창출하지만, 근대적 서열관계의 언어와 마음의 이데올로기가 만드는 사랑의 변주곡은 모든 관계의 미시적 파시즘을 만드는 원인이다.
III. 늙은 남자의 아차산과 젊은 남자의 아차산
춘천과 경주, 제천과 제주도, 혹은 설악산과 통영처럼 아차산은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이다. 그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와 만남으로 인하여 또 다른 무한한 이미지를 창출한다.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아차산의 무한한 이미지들 중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생산한다. 하나는 늙은 남자의 아차산에 대한 이미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젊은 남자의 아차산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마음이 아니라 몸, 관계의 언어가 아니라 비관계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젊은"과 "늙은"이라는 언어는 아차산에 대한 관계가 구성하는 언어와 마음의 느낌을 정반대로 재구성한다. 아차산의 이미지를 이미지 그 자체로 즐기는 사람은 늙은 남자이고, 아차산을 언어의 이데올로기 속에 가두는 사람은 젊은 남자이다. 몸이 맺는 관계의 중요성을 마음으로 구성하는 사람은 늙은 남자이고, 몸과 마음이 서로서로 분리되어 있는 사람은 젊은 남자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언어와 마음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이미지와 몸의 생산성을 사유하는 사람이 늙은 남자이고, 언어와 마음의 이데올로기에 갇혀서 이미지와 몸의 생산성을 파괴하는 사람이 젊은 남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수많은 이미지들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미지들이 만드는 언어의 예술을 인식하지 못하고 몸 그 자체가 생성적이기 때문에 몸과 몸의 관계가 만드는 수많은 생성적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젊음이고, 늙음으로 인하여 한정된 관계의 이미지 속에서 수많은 생성적 언어들을 창출하고 몸이 노쇠함으로 인하여 몸이 만드는 마음의 관계에 더 충실해지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그렇게 이미지와 언어, 몸과 마음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역설로 젊은 아차산과 늙은 아차산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언어와 마음도 젊은 아차산과 늙은 아차산과 마찬가지로 젊음과 늙음이라는 두 개의 이미지와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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