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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소년의 절규, 한국에서 잘려나간 오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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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소년의 절규, 한국에서 잘려나간 오른손

[몽골 이주노동자, 한국을 말하다 <12>] "산재보험이 있는 줄도 몰랐다"

지난 6월 4일, 산업안전공단은 2007년부터 3년 동안 산업재해 피해를 입은 이주노동자가 2007년 3967명, 2008년 5221명, 2009년 5231명이라고 발표했다. 그 중 사망자는 2007년 87명, 2008년 117명, 2009년 101명이었다.

물론 이 숫자가 다는 아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데, 이주노동자들은 비자가 없거나 있더라도 모르거나 계속채용 혹은 재계약 약속 때문에 산재 피해를 입어도 산재로 처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한국 상황에 서툴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산업안전에 유독 취약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더욱이 이들은 '이 땅에서 떠나갈 사람들'이다. 떠나갈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쉽게 잊게 된다. 떠나간 사람들이기에 치료가 부족하거나 법적으로 보장된 여러 혜택을 받지 못해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치료해주고(!) 법적으로 규정된 모든 혜택을 받고 돌아가면 우리가 할 일은 다했다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여기고 말아도 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산재피해 후 귀환한 그들의 삶을 잠깐 살펴보고자 공익변호사그룹 공감과 외노협,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에서 작은 조사를 기획했다.

이렇게 해서 지난 6월, 노동인권회관 박석운 소장,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소장인 필자, 외노협의 이경숙 간사 이렇게 세 사람이 몽골로 갔다. 그곳에서 23명의 산재피해자들을 만났다. 모두 2000년 이후 한국에서 취업하다가 산재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다.

한국에서도 늘 하는 상담이었지만, 그들의 땅에서 그들을 만나보니, 그 감도가 달랐다. 그들은 거의 다 잔잔하게 자신의 사례를 설명해주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잔잔한 표정으로, 그 잔잔함이 듣는 한국인들에게 민망함과 미안함을 더해주었다.

그렇게 들었던 그들의 사연을 그들의 목소리로 공개한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들춰 괜히 미안함을 더하기 위함이 아니고,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비판하기 위함도 아니다. 다만, 지금도 또 앞으로도 생겨날 또 다른 그들이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게 뭔가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실관계에서는 그들이 이해했던 그대로 서술했다. 확인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 이해한 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그들이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전의 일이라거나 제도가 바뀌었다는 등의 이유로 애써 위안을 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고용허가제 노동자, 산업연수생, 미등록체류자, 10대 소년, 형제 산재피해자 등 고루고루 사례를 취합하였으니 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말이 있다. 어떤 피해자가 한 말이기도 하고, 한국으로 몽골인을 송출하는 업무를 맡은 몽골인이 한 말이기도 하다.

"한국에 갈 때, 몽골인들은 모두 건강검진을 받고 간다. 우리는 건강한 젊은이들을 보내준다. 그러니 돌려보낼 때도 건강하게 돌려보내줘야 하는 것 아니냐!"

다음은 취업한 지 10일 안 돼서 산재를 당한 16살 소년이 자신의 사연을 구술한 것이다. <필자 주>

나는 16살이던 2001년에 한국에 입국했다. 당시 부모님은 한국에서 미등록자 상태로 취업중이셨다. 부모님이 나를 한국으로 오라고 하신 것은, 부모님이 한국에서 취업하시는 동안 내가 몽골에서 제대로 학교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걱정되어서였다. 할머니와 살았는데, 할머니 말도 잘 듣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고 놀러 다니고, 그러니까 부모님이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게 하려고 나를 한국으로 입국시켰다.

한국에 오긴 했지만 나는 학교에는 가기 싫어서 학교에 가지 않고 엄마, 아빠가 일하는 회사 바로 옆 공장에 있는 공장에 취직했다. 부모님이 아는 몽골인의 소개로 그 공장에 취직했다.

그공장은 부천에 있는 가구 손잡이 만드는 공장이었다. 쇠를 자르고, 모양을 만들고, 세척도 하고 도색도 했는데, 세척할 때 사용하는 약품에서는 냄새가 많이 났다. 그때는 회사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이도 어려서 딱히 고정적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때그때 시키는 일을 했다. 주로하는 일은 크림이 많이 묻어 있는 쇠를 가져오면 세척하거나 물건을 운반하는 일이었다. 세척할 때는 장갑과 토시를 착용하는데, 장갑은 앞뒤로 빨간 게 도톨도톨하게 있는 면장갑이었다. 그 장갑을 끼고 손으로 쇠를 세척제에 넣었다. 장갑은 금방 해지는데 해진 장갑 사이로 세척제가 닿으면 손이 저린 느낌이 들었고 손이 하얗게 불었다. 마치 물속에 오랫동안 손을 담가놓은 것처럼 되었다.

일하는 시간은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였고 잔업할 경우 9시까지 일했다. 주변 사람들이 내 나이가 어린 건 알았는데 정확하게 몇 살인지는 몰랐을 거다. 내가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몽골서 온지 얼마 안된 때, 정확하게 5~10일 사이였던 때였는데 잔업을 하다가 쇠를 자르는 일을 했다. 톱을 사용하는 일을 그때 처음 해보았는데, 그 즈음에는 일도 힘들고 몽골생각도 나고, 친구 생각도 나고 그랬다. 그래서인지 실수를 했다. 톱으로 쇠를 자를 때 조금 남아 있는 쇠부분을 왼손으로 잡아야 하는데 왼손으로 잡을 수가 없어서 오른손으로 잡고 작업하다가 톱이 오른손을 잘랐다. 그래서 오른손 가운데뼈가 잘렸다.

치료비를 회사에서 부담해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때가 밤 9시 넘어서였는데 병원에 가서 소독하고, 다음 날 3~4시쯤 수술받았다. 수술 후 10일 정도 병원에 입원하였고 나중에 깁스하고 몇 달간 통원치료하였다. 그때 심을 박았다고 했는데 한참 지나서 심 빼는 수술을 또 했다. 입원, 통원치료하는데 총 1년 정도 걸렸다. 물리치료도 받았다. 치료비는 공장에서 부담했다. 그러나 치료하는 기간 동안 월급은 하나도 못 받았다. 원래 월급은 70만 원 받기로 했었지만 며칠 안되어 사고가 났으니 월급을 받아본 적이 없다. 당시 산재보험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부모님도 모르셨다.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사고가 산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우리가 비자없이 일을 했기 때문에 보상금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치료비만 공장에서 부담해주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치료가 다 마무리된 후에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사출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 공장에서는 2달 정도 일했다. 거기는 주야 맞교대로 일을 했는데 야간/주간으로 바뀌는 시스템이 적응하기 힘들었다. 내가 하는 일은 플라스틱에 묻어 있는 이물질을 가위로 자르는 일이었다. 월급은 80만 원 정도 받기로 했다. 그 회사에는 외국인노동자가 3명이 있었다.

어른도 하기 힘들던 일, 고기도 사주고 회식도 자주 해서 좋았다

세 번째 공장은 원단공장이었는데 가장 오래 일한 공장이다. 그 때가 2002년이었고 내 나이 17살때였다. 차량 시트에 원단과 스폰지를 붙이는 공장이었는데 원단을 자르고, 담아서, 옮겨 놓으면 기사들이 와서 배달해갔다. 그 원단이 많이 무거워서 일하러 온 다른 어른 몽골 사람들도 너무 힘들다고 1주일이면 그만두곤 했다. 일도 많아서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 일하는데 새벽 1, 2시까지 일하는 때도 많았다. 나는 그 회사에서 1년 좀 넘게 일했다.

기숙사에서 혼자 살았고, 공장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줬고, 토, 일요일에도 식사를 주었다. 그리고 과장님, 차장님이 고기도 사주고, 회식도 자주 해서 좋았다. 지내기에 괜찮았다. 월급은 70만 원으로 적었지만 그 대신 보너스를 자주 줬다. 보너스는 추석, 설, 여름 휴가 때 각 50만 원씩을 주었다. 한번은 100만 원 조금 넘게 월급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그 회사에서 가장 많이 받은 월급이었다.

그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아빠 소개로 네 번째로 청주에 있는 두부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때가 2004년이었는데 내 나이 18살이었다. 월급은 좀 올라서 100만원 받기로 했고 공장장과 나, 둘이 일했다. 콩을 갈아서 나오는 것을 뜨겁게 해서 옮기고, 통에 받고 공장장이 간을 하면 부어서 박스에 넣는데 그러면 물이 빠져서 두부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두부를 아침에는 배달하는데, 그러다보니 밤에 일을 해야했다.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일을 하고 새벽 1~2시 사이에 잠시 쉬었다.

그 회사에서는 불편한 것이 밥을 직접 해 먹어야 하는 것이고 휴일도 한 달에 2번 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나는 많이 어렸고 해서 친구들과 놀다보면 가끔 늦기도 했다. 그렇게 늦게까지 놀다와서 늦잠을 자고 제 시간에 출근하지 못한 적이 2~3번 정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공장장이 화가 나서 술을 먹고 와서 나를 때렸고, 젊은 나이의 나도 참지 않고 같이 대들어 싸움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2~3달을 보내다보니 엄마가 나를 그대로 두면 안되겠다 싶으셨는지 캐나다로 보내겠다고 해서 일단 귀국시켰다. 그런데 캐나다 비자가 안나와서 가지 못하고 몽골에 있다가 결혼하고 애도 생기고 해서 그냥 정착해버렸다.

또래 청소년노동자들, 여럿 있었다

한국에서 내 또래의 외국인 친구들을 공장에서 여럿 만났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우즈베키스탄 친구, 동갑인 몽골인 친구, 방글라데시 친구, 러시아 친구 등 꽤 많았다. 내 또래 몽골친구들만 해도 열다섯 명 정도 친구가 있었다. 그 중에는 나보다 나이 어린 14살짜리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들은 모두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어떤 아이는 양말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모두 자기 나이보다 올려서 한국에 입국하거나 취업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잘 모른다. 같이 일하는 어른들이 어려보이니까 몇 살이냐고 자주 묻지만 나이를 올려서 말하는 그런가보다고 여긴다.

우리들도 어린이날 기념행사 같은 행사때 가서 만나게 되면 처음에는 잘 모르다가 서로 친해지면 나이 물어보고 그러면서 제 나이를 알게 된다. 내가 알던 아이들 중에 일하다가 산재로 다친 아이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몽골로 귀국하고 보니 한국에서의 경험 중 도움이 되는 것은 한국말 밖에 없다. 한국에서 배운 기술들이 몽골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기술도 제대로 배운 것이 없고 하니 몽골에서 사는 데 여러 가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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