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그랬다. 한국 대기업 경영진의 예상과 달리, 아이폰은 일부 마니아의 장난감에 그치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 애플리케이션, 앱스토어, 안드로이드, 증강현실, 와이파이 등 대중에게 낯설었던 낱말들이 순식간에 언론 지상을 장악했다. 불과 1년 사이 벌어진 일이다. 빨라도 너무 빠른 변화다. 그래서인지, 이런 변화를 차분히 돌아보는 눈길은 찾기 힘들다.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안간힘, 또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광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하루하루의 세상살이가 너무 버거운 탓에 다른 데 관심을 둘 여유가 없어서, 아니면 신기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종종 부작용을 낳았던 기억 때문에 지난 1년 동안의 변화에 무신경했던 많은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아이폰 출시 이후 쏟아진 정보기술(IT) 관련 기사들은 아직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이들 역시 인터넷과 휴대폰 없이 하루를 지내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IT생태계의 변화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런 변화를 균형있게, 입체적으로 살피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전망대는 찬양과 냉소, 집착과 무관심 사이의 어디쯤에 세워져야 할 게다. <프레시안>이 그 자리를 찾아 나섰다. 일상에 깊이 스며든 IT, 그 배후에 있는 거대한 생태계를 요모조모 뜯어보는 기획이다. 물론, 지난 1년 동안의 변화에 무관심했던 이들도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기획 과정에서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편집자>
컴퓨터 시장에 있어 한국은 '마이크로소프트(MS)'의 나라다. MS 윈도에서 제공하는 인터넷 브라우저 '익스플로어'가 없으면 인터넷뱅킹도, 홈쇼핑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정부 관공서의 홈페이지도 익스플로어가 없으면 제대로 이용할 수 없다. 시스템이 개인의 컴퓨터 선택권을 제하는 땅에 '애플'이나 '맥'이라는 이름이 들어설 자리는 넓지 않았다. 용산의 '조립PC'에 익숙한 이들에게 고가의 '맥'은 일부 컴퓨터 관련 종사자들의 전유물로 인식됐다. '아이팟'이라는 휴대용 MP3플레이어가 그나마 선전했지만 'IT의 주류'와는 거리가 있었다.
지난해 11월 한국에 뒤늦게 상륙한 애플의 스마트폰 '아이폰3'는 '애플'에 대한 기존의 통념, 혹은 무관심을 일거에 뒤집었다. 애플은 단순히 컴퓨터 시장에서 '컬트 문화'로 생존 전략을 짜는 컴퓨터 제조회사가 아니었다. 멀티미디어 콘텐츠와 IT기기를 연동해 독자적인 'IT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야심을 실행하고 있었고, 해외의 급격한 IT환경 변화에 빗장을 걸었던 한국이 당한 충격은 그래서 더욱 컸다. 국내 IT 시장에 '스마트폰 바람'을 몰고 와 경종을 울린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에 사람들이 이목을 집중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 애플의 새로운 제품인 아이폰4를 발표하고 있는 스티브 잡스 애플 CEO ⓒ로이터=뉴시스 |
스티브 잡스의 굴곡진 인생
스티브 잡스는 단순히 '지구에서 가장 프레젠테이션을 잘 하는 CEO'만이 아니다. 아이폰3를 접했던 이들이 감탄하는 단순한 외양에 사용자의 편의성을 배려한 조작법 등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제품의 완벽함을 향한 그의 편집증적인 열정이 항상 성공한 것도, 일찍 빛을 본 것도 아니었다.
195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잡스는 리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다 1학기 만에 중퇴했다. 이후에도 1년 반 동안 대학에서 자유롭게 강의를 듣던 잡스는 1977년 휴렛패커드에서 임시직으로 일할 때 만났던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벤처기업인 애플을 차렸다. 회사를 세우는데 든 비용은 1300달러. 사무실은 잡스와 워즈니악의 방, 그리고 잡스의 차고였다.
이들이 그해 제1회 서부 컴퓨터 박람회에 내놓은 '애플Ⅱ'는 업무용 프로그램을 내장한 데스크톱 컴퓨터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잡스와 워즈니악은 훗날 대부분의 컴퓨터에서 쓰이고 있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의 아이디어를 제록스로부터 착안해 '리사' 등의 제품을 선보였지만 고가 정책을 지향한 탓에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1984년 애플은 매킨토시를 발표하며 다시금 인기를 끌었지만 잡스 본인에게는 위기가 닥쳤다. 1983년 새로운 CEO로 부임한 존 스컬리와의 불화 속에서 밀려나 2년 뒤 애플에서 퇴출된 것이다. 잡스는 애플을 떠난 후 교육용 컴퓨터 회사인 넥스트를 세워 제기를 도모했다. 1986년에는 루카스 필름으로부터 현재의 픽사를 인수, 흥행작인 '토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잡스가 떠난 애플 역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노트북 제품인 '파워북' 등을 발표하며 인기를 이어갔지만 1995년 제품 결함으로 대규모 리콜을 단행하면서 체면을 구겼다. 새로운 시장에 눈을 돌려 PDA인 '뉴턴'과 게임기 '피핀' 등도 선보였지만 시장의 수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1997년 애플은 잡스의 넥스트사를 인수하면서 12년 만에 그를 귀환시켰다.
회사를 떠나 있던 시절 잡스는 애플의 제품에 쓴 소리를 내뱉었지만 애플의 시도 자체를 비난하지 않았다. 당시, 자금부족 등 애플이 '실험'을 밀어붙이기엔 어려움이 많았지만 새로운 것을 선도하려는 애플의 철학은 잡스의 '화려한 귀환'이 성공하는 밑바탕이 됐다. 1997년 복귀한 잡스는 숙적인 MS의 자금을 끌어들이며 정체돼오던 OS 개발 등에 주력했고, 이는 곧 맥북-아이팟-아이폰까지 애플의 연이은 성공신화로 연결됐다.
현재 IT산업에서 벌어지는 스마트폰 전쟁을 흔히 'OS'의 싸움으로 비유한다. OS란 컴퓨터나 이동통신 단말기의 운영체제(operating system)를 뜻한다. 흔히 국내 휴대전화 단말기에서 '펌웨어'를 업그레이드 한다는 말도 OS를 상위버전으로 바꾼다는 말이다. 휴대전화가 작동 중에 멈추거나 버벅거리는 현상이 생기는 것도 결국 OS의 결함으로 인한 경우가 많다. 아이폰이 처음 발표된 지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OS과 관련이 있다. 정부는 지난해 상반기까지 국내에서 유통되는 휴대전화 단말기의 플랫폼(이 역시 OS와 비슷한 개념이다)을 국내 표준인 위피(WIPI)로 제한했다. 애플처럼 독자적인 OS를 개발해 만든 스마트폰은 인가를 내주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소비자들은 국내 휴대전화 제조사들이 단말기에 내장한 프로그램만을 사용해야만 했다. 무선인터넷에 접속해 게임 등의 프로그램을 내려받을 수 있었지만 비싼 데이터 요금을 감수해야 했고, 무선인터넷 환경 역시 일반적인 통신 환경이 아닌 이동통신사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만이 이용 가능했다. 방통위가 위피의 의무 탑재 조항을 폐기하고 난 뒤 등장한 아이폰은 이러한 국내 이동통신 사용 문화를 일거에 뒤엎었다. 사용자들은 아이폰이 제공하는 기본 기능 이외에도 온라인장터에 받은 애플리케이션을 자유롭게 설치하고 삭제할 수 있다. GPS 기능을 이용해 현재 자신이 있는 곳에서 다양한 정보를 받아볼 수 있는 증강현실도 경험할 수 있었다. 웹브라우저인 사파리를 이용해 PC와 유사한 인터넷 검색도 가능해졌다. 비싼 무선인터넷 비용을 물지 않고도 무료 와이파이(Wi-Fi)에 접속해 데이터 통신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동안 정부와 이통사가 쳐놓은 장벽을 뛰어넘은 한 단면이다. |
잡스가 구축한 'IT생태계'
아이폰은 터치스크린 기술을 접목한 아이팟 터치에 휴대전화 기능을 더한 제품이다. 휴대전화 단말기와 MP3 재생기 등이 결국엔 하나의 모바일 기기로 수렴할 것이라는 잡스의 선견지명이 반영된 것이다. 리서치 인 모션(RIM)의 블렉베리 등이 장악하고 있던 스마트폰 시장에서 아이폰은 빠르게 점유율을 넓혀갔다.
잡스는 아이폰의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와 결합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2000년대 초반 무료 음원 사이트였던 냅스터 등이 저작권 침해 논란 등에 휘말려 사장되는 것을 지켜본 잡스는 저가의 콘텐츠를 광범위하게 제공하는 쪽으로 전략을 세웠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이튠스는 올해 초 내려받은 누적 건수가 100억 회를 기록하는 등 전 세계 음원 유통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다.
애플리케이션과 콘텐츠를 융합해 'IT 생태계'라 불릴만한 환경을 구축한 곳은 애플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애플의 '닫힌 생태계'를 넘을 수 있는 스마트폰이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구글의 안드로이드 제품군이 최근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면서 올해 상반기 미국 내 모바일 OS 점유율에서 애플을 뛰어넘었지만, 애플리케이션은 애플의 25만여 개에 미치지 못하는 10만 여개로 아직 갈 길이 멀다.
한국의 'IT 쇄국정책'에서 국내 모바일 시장을 장악했던 삼성·LG전자 등은 아이폰 열풍에 크게 당황했다. 일반 휴대전화 단말기인 피처폰 시장에서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이들 기업이지만, 향후 모바일 시장이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란 전망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전쟁'이 하드웨어만의 승부가 아닌 콘텐츠 싸움이 될 거라는 점에서도 독자적인 OS를 갖추지 못한 국내 제조업체로서는 위기였다. 이들에게 '활로'를 열어준 곳은 인터넷 시장의 또 하나의 '괴물' 구글이었다. 구글은 독자적인 OS에 자사의 단일 제품만을 고집하는 애플과 반대로 개방성을 내세웠다. 각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사들이 구글의 OS인 안드로이드를 개량해 자사 스마트폰에 탑재한다는 계획이다. 소비자들은 서로 다른 단말기로도 안드로이드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공통으로 이용할 수 있어 선택권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디스플레이 등 하드웨어 기술에 강점이 있는 삼성전자는 애플이 지난 6월 아이폰4를 발표하던 날 안드로이드 기반의 '갤럭시S'를 나란히 선보이며 맞불을 놨다. 국내 시장에서 기대됐던 구글 안드로이드 대 애플의 '7월 대전'은 아이폰4의 전파인증이 지연되면서 안드로이드의 '싱거운 승리'로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국내 스마트폰 시장이 막 열린 상태라 수요층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에서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편, 애플과 잡스의 등장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려는 삼성전자에 '기회'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경영권 불법승계 등의 혐의로 집행유예 3년에 벌금 1100억 원을 선고받았다 연말에 사면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올해 2월 전격 경영복귀를 선언했다. 스마트폰 공세 등으로 그동안 IT부문에서 입지를 다져온 삼성에 "위기"가 닥쳐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 한 이유였다. |
애플-잡스는 악?
아이폰 상륙 이후 스티브 잡스는 한국에서도 성공 신화이자 혁신과 창조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아이팟-아이폰의 성공으로 '애플=스티브 잡스'라는 공식이 일반화 되면서 잡스의 언행과 행동에 따라 애플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을 달렸다. 췌장암을 앓았던 잡스의 건강상태에 따라 애플의 주가가 춤을 추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 시장에서 IBM-MS 연합군에 밀려 '을'의 자리에 있던 애플이 모바일 기기 시장에서 '갑'으로 부상하면서 그에 대한 견제와 공격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국내 제조사와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국 언론들은 잡스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아이폰4 발표 이후 불거진 데스 그립(death grip) 논란은 제품의 완벽성을 자랑하던 애플에 큰 위기였다. '데스 그립'이란 아이폰 4의 테두리에 있는 안테나 부분을 손으로 쥘 경우 통화품질이 나빠진다는 소비자들의 불만이 제기되면서 등장한 용어다. 소프트웨어의 문제일 뿐 하드웨어 결함은 아니라는 애플의 초기 해명은 더 큰 반발을 불렀다. 결함문제를 지적하는 소비자에게 "아이폰을 잡는 방법을 바꾸라"고 답한 잡스의 이메일은 그를 천재 경영자에서 오만과 독선의 상징으로 끌어내렸다.
아이폰3가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 때도 애플의 독선적인 전략이 한국의 이동통신 문화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아이폰이 고장 날 경우 부품을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새 제품이나 중고품으로 교환해주는 리퍼 제도 등이 국내 제조사의 AS 환경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애플은 또 국내 게임물등급위원회의 검열에 반발해 국내 앱스토어에 게임 콘텐츠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아이튠스의 수익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국내 음원 제공업체의 애플리케이션을 중단했다가 최근에야 다시 허용한 바 있다.
아이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할 때 어도비의 플래시 기술을 사용하는 콘텐츠를 차단한 것 역시 애플의 대표적인 폐쇄 전략으로 지적된다. 애플은 아이폰의 성능 향상을 위해 자원을 많이 차지하는 플래시 차단이 필요하다고 해명한다. 하지만 주로 광고 배너 등의 형태로 쓰이는 플래시의 속성을 감안할 때, 애플이 차후 모바일 광고 시장에서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의도적인 차단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
애플이 언론의 악평에 휘말린 건 처음이 아니다. 1990년대 MS의 성장과 반비례해 쇠퇴일로를 겪던 애플에 미국 언론들도 관대하지 않았다. 개인용 컴퓨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MS의 윈도 시스템에 익숙한 이들은 애플의 방향에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애플은 이에 대항해 부당한 보도에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맥 에반젤리스트'를 양성했고, 공식적으로 활동을 종료한 뒤에도 애플의 골수팬들은 인터넷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한국의 주류 언론이 쏟아내는 애플에 관한 부정적인 기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이폰4와의 결전을 앞둔 국내 제조사를 '선'으로, 애플을 '악'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짙다. 그런데 이처럼 시장의 강자를 악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과거 애플이 사용했던 전략이기도 하다. 1980년대 애플이 매킨토시를 처음 선보일 당시 무명이었던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만든 광고는 IBM의 컴퓨터를 조지오웰의 소설 <1984>의 빅브라더로 묘사하며 몰개성한 디자인을 공격했다. 나중에 '악'의 대상은 MS로 바뀌었다. 실제 애플의 최대 파트너는 MS이었음에도 대중에게 이런 전략은 곧잘 먹혔다. 지금, 애플의 아이폰에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는 한국 제조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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