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옹성 같던 박정희 리더십에 대한 반전의 주역은 60년대의 민주당이나 신민당, 윤보선이나 유진산이 아니라 1970년 야당의 낡고 무기력한 리더십까지 일순간에 반전시킨 김영삼, 김대중이었습니다. 당시 신민당 전당대회에 나선 김영삼의 나이 43세, 김대중의 나이 46세였습니다. 야당의 법통을 이은 김대중은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70대에 이르러서야 대통령에 취임하지만, 박정희를 대체하는 정치리더십의 희망을 국민들에게 심어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뿌리를 형성했습니다.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들의 역사적 공과를 떠나, 리더의 존재와 역할이 국가의 현재와 장래에 미치는 영향을 돌아보게 합니다.
▲ 1971년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공원 연설 장면 ⓒ연합뉴스 |
양김 시대의 종말 이후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두 명의 국가지도자를 선택했습니다. 정조 이후 200년 만의 개혁군주라는 찬사까지 받으며 취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새시대의 장남을 기원한 국민적 열망에 부응하지 못하고 재임시절 스스로 '구시대의 막내'를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은 보수 진영은 물론이고 개혁 진영으로부터도 후한 평가를 받지 못했음은 물론입니다.
그 결과 권위주의 해체와 민주적 절차 확대라는 노무현 정부의 긍정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에선 효율과 실적,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최고경영자형 리더가 압도적으로 선택됐습니다. 현재 지도자의 반대급부가 미래 지도자의 조건이 되는 척박한 토양과 무관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임기 절반이 지난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보여준 불통의 리더십에 많은 국민들은 답답증을 호소합니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지지자들의 열정 속에 탄생한 이들 정부가 임기의 절반도 채 지나지 못해 냉정한 외면을 겪는 현실은 국가적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자는 5년 단임제라는 제도적 한계를 지적합니다. 제왕적 대통령의 권위가 해체되면서 이를 대체할만한 새로운 리더십의 창출 과정이 정립되지 못한 과도기적 혼란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모두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제도와 시스템이 리더의 소양을 온전히 대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며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는 저우언라이 전 총리 시비에 적힌 글귀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민과 국가를 매개하는 지도자상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 인사청문회에서 우리는 국민들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의 모습을 또다시 보았습니다. 지도자가 지녀야 할 소통능력과 도덕성 같은 최소한의 덕목조차 사치처럼 여겨집니다. 지식인들은 리더와 리더십의 부재를 개탄하고, 일반 국민들은 지도자의 역할에 기대를 접은 현실에 희망의 싹은 없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6.2 지방선거를 계기로 부각된 여야의 40대의 젊은 기수들을 관심 있게 지켜봅니다. 이들이 40년 전의 원조 '40대 기수들'처럼 국민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불을 댕길 것인지, 세대교체라는 정치적 수사로 포장된 낡은 리더십을 답습할지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지만,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할 소중한 자산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또한 지난 몇 년 간 불통의 상징이 된 광장에서 촛불로 저항하고, 트위터로 선거 기적을 일궈낸 20대 젊은이의 상상력도 새로운 리더를 기다리는 마중물일 것입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개인적 리더십이 작동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습니다. 백마 탄 초인을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가치와 방향을 선두에서 이끌 리더의 존재 가치까지 사라진 건 아닙니다. 국민들은 리더에게서 '희망'을 보고 '비전'을 갖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이 창간 9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리더를 찾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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