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뇨, 친구가 가자고 해서 따라 왔어요. 페스티벌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아는 가수가 별로 없긴 한데… 와서 보니까 좋네요. 사람들만 구경해도 그냥 신나고.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 공연 보고 놀랐어요. 환상적이더라고요."
이성진(32, 가명) 씨는 매일 같이 '갑'인 거래처를 상대로 술접대를 하고, 주말에는 상사와 친해지기 위해 골프를 연습하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소녀시대의 태연을 좋아하지만 2010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 첫째 날(7월 30일) 무대에 오른 다이앤 버치(Diane Birch)는 잘 모른다.
그러나 공연 이틀째 날인 7월 31일 만난 이 씨의 표정은 크게 상기돼 있었다. "공연장이 확실히 다르네요. 압도적인 게 있어요."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또 올 생각이 있나요?")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이번 페스티벌 참가한 가수들 노래도 한번 기회 되면 들어보려고요."
페스티벌, 온 몸으로 즐기는 음악 축제
어느새 한국 최대 음악 페스티벌로 자리 잡은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이 지난달 30일부터 1일까지 두 번째로 열렸다. 주최측인 엠넷미디어에 따르면 첫 날 방문객 2만3000명, 둘째 날이 2만6000명, 마지막날 3만 명으로 3일간 연인원이 7만9000여 명에 달했다. 작년(5만 명)에 비해 더 큰 흥행을 거둔 셈이다.
흥행의 요인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흘 간 헤드라이너(간판 출연자)가 어느 때보다 화려했다. 90년대 트립합(Trip-hop) 열풍을 일으킨 매시브 어택과 신스팝의 대명사 펫 숍 보이스(Pet Shop Boys), 그리고 최고 인기 록 밴드 뮤즈(Muse)가 사흘 간 마지막 공연을 책임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록 페스티벌이 점차 여름 휴가의 한 방식으로 자리잡아간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늘어난 인원은 광적인 음악팬이 아니라도 페스티벌을 즐기는데는 무리가 없다는 점이 점차 사람들에게 인식되어간다는 증거다. 실제 올해의 경우 헤드라이너에 비해 나머지 출연진의 무게감은 지난해에 비해 떨어진다는 우려가 일부 있었다. 서서히 '페스티벌 팬'이 두꺼워져감을 올해 페스티벌이 입증했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아직 페스티벌의 온전한 자립을 논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척박한 대중음악 풍토를 감안하면 이 정도의 성공이라도 확실히 보장되는 페스티벌이 생긴 것은 일견 놀라운 일이다.
변화하는 록 페스티벌
그간 한국은 공연 문화가 워낙 열악해, 이를 한탄하는 음악계 내외부의 목소리가 많았다. 80~90년대에 발행된 음악잡지들을 살펴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해외 뮤지션은 대부분 '한물 간' 이들이었다. 그나마 그들의 공연도 열악한 음향시설 때문에 "관객들의 반응은 좋았으나 음향시설이 나빴다"는 평가가 전가의 보도처럼 나왔다. 국내에서 제대로 된 록 페스티벌이 이뤄지지 못해 국내 음악잡지들은 해외에서 열리는 후지 록 페스티벌, 레딩 페스티벌 등을 취재했다.
변화의 계기는 1999년 마련됐다. 지난 1999년 인천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전신)을 계기로 한국의 음악 페스티벌이 새로운 계기를 열었다. 내부 문제로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이 펜타포트에서 떨어져 나와 양강 구도를 이루면서, 이제 한국에서도 록 페스티벌은 여름마다 음악팬들과 주요 언론이 일제히 주목하는 주요 행사가 됐다.
더욱 긍정적인 것은 점차 다양한 음악 장르가 페스티벌에 수혈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페스티벌에서 관객들은 미성의 싱어송라이터 코린 베일리 래(Corinne Bailey Rae)와 스래시 메틀밴드 크래쉬(Crash)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몽롱한 리프(반복 음절)의 매시브 어택이 주요 출연진으로 나서는 와중에도 뱀파이어 위켄드(Vampire Weekend)의 흥겨운 비트가 관객을 맞았다. 이제 장르를 불문하고 동시대 최고 인기 뮤지션들을 국내 음악 페스티벌에서 보는 게 현실이 됐다. 물론 일본 페스티벌 출연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게 사실이지만,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이런 행사가 가능하리라는 상상을 하기는 어려웠다.
왜 록 페스티벌인가
음악 페스티벌의 꽃은 결국 록 페스티벌이다. 이는 영미권 대중음악이 주류를 이루는 나라 어디서나 공통적인 사항이다. 이제 장르 구분이 무의미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록 음악이 페스티벌의 중심에 오른 이유는 몇 가지 들 수 있다. 록 음악이 결국 대중음악(팝 음악)의 큰 뿌리 중 하나였다는 점, 특히 백인에게 사랑받으면서 주류문화로 빠르게 자리잡았다는 점 등을 꼽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페스티벌에 가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무대에서 나오는 엄청난 출력의 음압이 온 몸을 휘감는다. 드러머가 베이스 드럼을 찰 때마다 마치 충격파와 같은 압력이 몸을 때린다. 베이스음이 땅을 울리며 몸 위로 전달되는 와중에 날카로운 기타음이 귀를 파고든다. 보컬리스트의 행동 하나하나와 열정이 담긴 목소리가 이 위에 얹어지면, 듣는 이는 저절로 몸을 움직이게 된다.
더구나 바로 옆에는 개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이들이 남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음악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 흥분한 누군가는 강렬한 몸짓으로 옆 사람과 몸을 부딪치고, 누군가는 관객의 물결 위로 돌고래처럼 뛰어오른다. 아이는 부모의 무등을 타고 축제를 즐기고, 나이 든 부모는 옛 추억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공연이 끝나면 기타를 둘러매고 온 이들, 술에 취한 이들, 친구들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 여흥을 해소하려 춤출 곳을 찾는 이들이 밤을 환하게 불태운다.
팬들이 일사불란한 응원을 하는 아이돌 가수의 공연, 관객들이 점잖게 소리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클래식 공연장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풍경이다. '라이브'라는 단어의 어원에 가장 충실한 공연이 있다면 관객의 적극성이 두드러지는 록 페스티벌이 유일하다. 록 페스티벌은 출연자와 관객이 동시에 몸 안의 에너지를 불태워, '살아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축제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은 얼마 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 자녀와 다녀온 후 <한겨레>에 글을 기고했다. 록에 대한 그의 찬미는 다음과 같았다.
"둘(두 자녀)은 천천히 록음악에 빠져들고 있고 나는 그게 참 기쁘다. 10대 시절에 록음악에 빠져드는 일은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제때 하면 좋은 일' 가운데 하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열다섯 즈음 록음악에 빠져들었다. 그 전율의 순간, 그리고 이후 진행 과정에서 피어오른 에너지와 감성의 결들이 내 삶에 남긴 흔적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나' 안도하곤 한다."
여름은 젊음의 계절, 음악의 계절
물론 음악 페스티벌이 자장을 더욱 넓히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아직은 페스티벌을 즐기는 이들의 수가 부족하다. '해외 페스티벌은 수십만 명이 온다더라'는 수준으로 가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국내에서 음악을 즐기는 이들의 절대수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는 그만큼 출연진 확보에 어려움을 주고, 수익성 확보에도 문제를 일으킨다. 척박한 국내 음악시장 풍토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는 한, 이른 시일 내에 관객 수를 늘리기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성진 씨의 말은 한국에서 페스티벌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음악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이도 페스티벌에 오면 얼마든지 이를 즐길 수 있다. 비단 음악 공연 말고도 페스티벌에는 즐길 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홍보를 위해 참여한 각종 업체들이 다양한 행사를 벌이고, 주최 측은 관객들을 대상으로 즉석 콘테스트를 연다. 특히 이번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에서 가장 멋진 공연장소였던 오픈스테이지는 관객들의 에어기타 콘테스트, 유명 뮤지션의 커버공연, 실력있는 신인밴드들의 무대를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글래스톤베리와 함께 세계 최고의 록 페스티벌로 꼽히는 로스킬데 페스티벌이 규모 못지않게 관객들의 누드 달리기로 유명세를 타는 건 가장 극적인 사례다. 결국 페스티벌은 음악이 중심이 되는 '축제'다. 누구나 여름 휴가로 페스티벌을 찾을 수 있다는 인식은 천천히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한계 역시 자명하다. 일에 지쳐 살고, 크고 작은 생활문제에 유독 시달리는 한국인들이 사흘간 '사서 고생하는' 페스티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열악한 잠자리를 감수해야 하고, 더위와 싸워야 한다. 대부분의 도시인들, 직장인들은 페스티벌보다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방 안에서 여유를 찾으려하기 마련이다. 한국에서 음악 페스티벌은 젊은이들이 독점하는 행사가 아니라, 주로 젊은이들만 관심을 갖는 행사인 게 현실이다.
성공적으로 두 번째 행사를 마감한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은 가능성과 숙제를 동시에 남겼다. 가능성은 이 페스티벌이 스스로 자리를 잡아가는데서 발견한 즐거움이었고, 숙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으려면 한국 사회의 경직성에까지 관심을 넓혀야 할지도 모른다. 내년, 그리고 내후년 페스티벌이 어떤 모습을 갖출지를 지켜볼 이유다.
주목받아 마땅한 이들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에서 일부 관심있는 출연진에만 관심을 뒀다면, 페스티벌 묘미의 절반인 '새 얼굴 찾기'에 실패한 것이다. 주목받아 마땅한 이들은 많았다. 오픈스테이지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이번 페스티벌의 꽃이었다. 올해 미니앨범을 내 가장 주목받는 신인으로 떠오른 칵스(The Koxx)와 드라마 <파스타>에 동명곡을 실어 이름을 알린 t신인듀오 옥상달빛 등 실력있는 젊은 뮤지션들이 대중을 상대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다. 보석 같은 옛 뮤지션을 커버하는 밴드들의 무대는 흥겨움의 절정이었다. 와이낫의 전상규, 장기하와 얼굴들의 정중엽, 하찌와TJ의 TJ, 무중력소년의 김영수는 '터틀스(The Tatles)'라는 이름으로 비틀스(The Beatles)를 커버했다. 70년대 신중현 사단의 최전선에서 한국 대중음악을 이끌었던 김추자를 트리뷰트한 '춤추자', 펑크의 화신 라몬스(Ramones)를 커버한 '카몬스(Comeons)', 레게의 대부 밥 말리(Bob Marley)를 추모한 '반말한거 왜일렀어' 등이 환상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역시 주요출연자를 빼놓을 순 없다. 일본의 포스트 록 밴드 토(Toe)는 앨범을 뛰어넘는 폭발적인 연주를 펼쳐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오랜만에 라이브 무대를 가진 장기하와 얼굴들은 훌쩍 성장한 무대매너를 선보이며 관객들을 노련하게 휘어잡았다. 오랜만에 새 앨범을 낸 크래쉬는 아직 한국 헤비메틀의 힘이 사그라들지 않았음을 과시했고, 아폴로18은 선배의 열정에 화답했다. '가장 알려지지 않은 가장 유명한 밴드' 벨 앤 세바스천(Belle And Sebastian)'은 관객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함께 춤추며 페스티벌에서 가장 보기 좋은 장면을 만들었다. 특별히 비중이 한 곳으로 쏠리지 않은 헤드라이너 셋은 감탄사를 연발케 하기 충분했다. 매시브 어택은 데뷔앨범부터 함께한 객원보컬 호레이스 앤디(Horace Andy)까지 대동해 압도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Yes] 앨범 투어로 한국을 찾은 펫 숍 보이스는 보는 이의 넋을 빼놓을 화려한 무대장치와 나이를 잊은 듯한 열정적인 무대매너로 관객의 찬사를 자아냈다. 특히 젊은 록팬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뮤즈의 공연은 열정적인 관객의 합창과 멤버들의 연주가 한데 어우러져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를 만들어냈다. |
▲매시브 어택은 20세기말을 수놓은 트립합의 진수를 보여줬다. ⓒ엠넷미디어 제공 |
▲펫 숍 보이스는 [Yes] 앨범 투어 장치를 그대로 가져왔다. 닐 테넌트(Neil Tennant)는 나이들지 않은 미성으로 찬사를 받았다. ⓒ엠넷미디어 제공 |
▲뮤즈의 매튜 벨라미(Matthew Bellamy)는 이제 한국팬들에게도 친숙한 인물이다. 뮤즈는 올해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를 책임졌다. 이번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 세 팀은 모두 영국 출신이다. ⓒ엠넷미디어 제공 |
▲영국의 젊은 싱어송라이터 코린 베일리 래는 한국팬들의 환호에 크게 놀란 모습이었다. 공연 내내 그는 연신 '감사합니다'라고 고개숙여 인사했다. ⓒ엠넷미디어 제공 |
▲크래쉬는 신보를 내고 다시 관객들의 관심권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척박한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헤비메틀로 20년 가까이 버텨온 그들의 역사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엠넷미디어 제공 |
▲뱀파이어 위켄드는 최근 가장 주목받는 뉴욕 출신 밴드다. 멤버 전원이 아직 학자금 대출을 고민하는 대학생인 이들은 아프리카 리듬을 펑크에 담은 독특한 음악으로 평단과 팬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엠넷미디어 제공 |
▲스코틀랜드 출신 음악인은 풍부한 감수성을 자랑한다. 벨 앤 세바스천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의 무대는 아름다웠다. ⓒ엠넷미디어 제공 |
▲록 페스티벌은 가장 뜨거운 계절에, 가장 뜨거운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엠넷미디어 제공 |
▲일렉트릭 스테이지에서 한데 어울리는 관객들. 인종과 국적의 벽이 가장 쉽게 허물어지는 순간. ⓒ엠넷미디어 제공 |
▲대규모 캠프촌은 록 페스티벌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고생을 사서하는 이들은 이곳에 넘쳐난다. ⓒ엠넷미디어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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