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덜컹, 기계에 빨려들어간 손가락"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덜컹, 기계에 빨려들어간 손가락"

[몽골 이주노동자, 한국을 말하다·④] "사장만 쳐다보는 산재처리"

지난 6월 4일, 산업안전공단은 2007년부터 3년 동안 산업재해 피해를 입은 이주노동자가 2007년 3967명, 2008년 5221명, 2009년 5231명이라고 발표했다. 그 중 사망자는 2007년 87명, 2008년 117명, 2009년 101명이었다.

물론 이 숫자가 다는 아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데, 이주노동자들은 비자가 없거나 있더라도 모르거나 계속채용 혹은 재계약 약속 때문에 산재 피해를 입어도 산재로 처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한국 상황에 서툴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산업안전에 유독 취약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더욱이 이들은 '이 땅에서 떠나갈 사람들'이다. 떠나갈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쉽게 잊게 된다. 떠나간 사람들이기에 치료가 부족하거나 법적으로 보장된 여러 혜택을 받지 못해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치료해주고(!) 법적으로 규정된 모든 혜택을 받고 돌아가면 우리가 할 일은 다했다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여기고 말아도 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산재피해 후 귀환한 그들의 삶을 잠깐 살펴보고자 공익변호사그룹 공감과 외노협,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에서 작은 조사를 기획했다.

이렇게 해서 지난 6월, 노동인권회관 박석운 소장,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소장인 필자, 외노협의 이경숙 간사 이렇게 세 사람이 몽골로 갔다. 그곳에서 23명의 산재피해자들을 만났다. 모두 2000년 이후 한국에서 취업하다가 산재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다.

한국에서도 늘 하는 상담이었지만, 그들의 땅에서 그들을 만나보니, 그 감도가 달랐다. 그들은 거의 다 잔잔하게 자신의 사례를 설명해주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잔잔한 표정으로, 그 잔잔함이 듣는 한국인들에게 민망함과 미안함을 더해주었다.

그렇게 들었던 그들의 사연을 그들의 목소리로 공개한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들춰 괜히 미안함을 더하기 위함이 아니고,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비판하기 위함도 아니다. 다만, 지금도 또 앞으로도 생겨날 또 다른 그들이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게 뭔가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실관계에서는 그들이 이해했던 그대로 서술했다. 확인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 이해한 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그들이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전의 일이라거나 제도가 바뀌었다는 등의 이유로 애써 위안을 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고용허가제 노동자, 산업연수생, 미등록체류자, 10대 소년, 형제 산재피해자 등 고루고루 사례를 취합하였으니 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말이 있다. 어떤 피해자가 한 말이기도 하고, 한국으로 몽골인을 송출하는 업무를 맡은 몽골인이 한 말이기도 하다.

"한국에 갈 때, 몽골인들은 모두 건강검진을 받고 간다. 우리는 건강한 젊은이들을 보내준다. 그러니 돌려보낼 때도 건강하게 돌려보내줘야 하는 것 아니냐!"

다음은 산재로 장애인이 된 몽골 노동자가 자신의 사연을 구술한 것이다. <필자 주>

내가 아내와 아이들 2명을 몽골에 남겨두고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입국한 때는 2006년 8월이었고 사고가 난 때는 2008년 8월이었다. 한국에서는 냄비를 제작하는 철공장에서 일했는데, 몽골인 5명, 한국인 9명, 우즈베키스탄인 1명, 방글라데시인 2명이 일하는 공장이었다. 일하는 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고, 야간작업을 할 때에는 대체로 새벽 1시까지 했다. 연장근로는 매일 1시간씩 했는데, 새벽 1시까지 할 때는 일이 많을 때였다. 휴일은 한 달에 이틀 쉬었다.

한국에 입국할 때 나는 내가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의 성격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한국에 입국하기 전(몽골에서는 한국으로 인력을 송출하기 전에 출국전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대한 교육을 시킨다. 그 비용은 본인 부담이며, 교육시간은 처음에는 150시간이었는데 점차 줄어들어 지금은 45시간이다. 내용은 한국어가 중심이고 한국생활정보, 노동법, 고용허가제 등이다:필자)과 한국에 입국한 직후에 있었던 교육(고용허가제로 입국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입국후 교육기관에서 3박4일 동안 한국적응교육을 받는다:필자)에서 산업안전, 산재에 대해서는 대체로 들어보았다. 교육의 효과는 어느 정도 있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몰랐다.

작업공정을 설명하면, 냄비를 찍어내기 위해 기계 하나는 좌우로 이동하고, 또 하나의 기계는 제품을 압착하는데, 기계들은 자동으로 움직인다. 기계가 좌우로 이동하면서 냄비를 찍어내면 제품은 아래로 떨어진다. 기계가 제품을 압착할 때 고열이 발생한다. 그런데 제품에는 모래가 묻게 되는데 내가 하는 일은 제품에 묻은 모래를 쓸어내는 일이었다. 평소에 팔꿈치 조금 위까지 오는 토시를 끼고 일을 하는데, 사고가 난 날, 새 토시를 끼었다. 토시가 새 것이다 보니 고무줄이 팔에 너무 꽉 끼었다. 그래서 팔 윗부분을 접은 상태에서 일을 했는데 기계에 토시가 끼이면서 손까지 빨려들어갔다.

▲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이주노동자들. 그들은 '코리안 드림'을 이루고 행복해졌을까? (사진은 본문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참세상방송국

병원에는 사장님이 데려가주었다. 처음에는 손가락이 있기는 있었다. 그런데 사고를 당하는 과정에 고열에 손가락이 닿았는데 그 때문에 살이 손상되었었다가 치료하는 과정에서 다 없어져버렸다. 뼈도 이미 죽은 상태였다. 오른쪽 허벅지살을 떼어서 손에 이식했다. 병원에 3개월간 입원했고, 물리치료 겸 통원치료를 2개월 간 했다. 통원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회사 기숙사에서 지냈다. 처음부터 산재보험이 적용되어 모든 보상을 다 받았고 그 절차는 사장님이 모두 진행해주었다. 나는 치료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이런 경우에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도 몰랐다.

사실은 산재보험이 있는지도 몰랐다. 몽골어로 설명받은 적이 없다. 그냥 사장님이 다 알아서 해주었다. 그리고 변호사(이 사람도 공인노무사일 것이다:필자)라는 사람이 산재처리를 도와주었다. 통원치료를 마치고 보상금으로 1800만 원을 받았다. 그 이후 더 일도 할 수 없고 해서 몽골로 귀국했다.

몽골로 돌아와서 장애인으로 등록했고, 지원금은 월 10만 투그릭 정도를 받는다. 산재로 인정받아서 그렇다. 내가 귀국할 당시 사장님이 서류 일체를 챙겨주어서 산재증명이 쉬웠다. 혹시 지금이라도 사장님과 연락이 된다면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다. 몽골로 돌아오니 취업하기 힘들었다. 내가 취업하기 어려워 아내가 직장에 다녔는데, 돈이 부족해서 보상금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보상금은 오래가지 못했다. 보상금을 아이들 학비, 생활비로 썼고 지금은 조금밖에 없다.

* 몽골에서는 산재나 일반사고로 장애를 입을 경우 장애인으로 등록하면 일정액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만약 출국 전에 사회보험을 가입하였는데, 사고가 산재로 인한 것이라면 지원금을 좀더 많이 받는다. 장애인으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산재임을 증명해야 한다. 투그릭은 몽골의 화폐단위인데, 원화와 거의 1:1정도의 환율이다. 그런데 몽골의 물가가 워낙 높아서 월 10만 투그릭으로는 한 달 살기에 어림없다 : 필자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