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이들을 외면하는 데는 정규직 노동조합 역시 예외가 아니다.
20일 울산 현대차비정규직 지회에 따르면 현대차 울산2공장은 스포츠유틸리티차량인 '투싼'의 단종에 따라 인력 감축에 들어갔다. 생산관리부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16명과 의장부 비정규직 50명이 대상이다. 공장 측은 해고예고 통보에 앞서 이들에게 50일간 휴업에 들어간다며 출근하지 말라고 알려왔다. 정리해고의 시작이다.
자동차 회사의 신차 출현과 기존 차량의 단종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금속노조에 따르면 아반떼의 후속모델이 생산될 3공장에서도 516명을 감축하는 계획을 세웠다가 반발에 부딪혀 159명으로 줄어든 상태다. 해고 대상은 모두 비정규직이다. 현대차 아산공장 역시 그랜저의 후속 모델 투입을 앞두고 62명의 비정규직을 감축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해고가 자유로운 이들이 떠난 자리는 정규직의 전환배치로 대신한다.
정규직 지부는 협상 합의…비정규직은 외면
비정규직 지회에 따르면 16일 투싼 단종에 따른 여유 인력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정규직 지부 대의원회의에서 소요처나 전환배치 등에 관한 내용을 뺀 채 구두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규직 지부는 이후 잔업 거부 등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해고에 항의하겠다고 밝혔지만 고용 보장에 관한 논의는 사실상 외면한 셈이다. 현재 해고 대상자 중 8명이 출근을 강행해 사측에 대항하고 있지만 노조 차원의 대응은 거의 없다.
공장 측은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현대차 울산공장 관계자는 "(투싼 단종에 따라) 사내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한 것"이라며 "하청 업체 직원들을 해고하는 것은 그 업체의 사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공장과 노조의 태도는 지난해와 사뭇 다르다. 현대차 울산 2공장은 지난해 4월에도 아반떼HD와 스포츠유틸리티차량의 혼류 생산을 시작하면서 일감이 줄어든 비정규직 68명을 정리해고하려 했다. 하지만 경제위기 속에서 사회적 약자를 볼모로 삼는다는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노사는 여유 인원의 해소 방안을 찾을 때까지 이들의 고용과 임금을 유지한다고 합의해 '모범 사례'로 평가받았다. 지난 3월 현대차 전주공장에서도 고속버스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18명을 해고하려는 데 맞서 정규직 노조가 잔업 거부에 들어간 바 있다.
사측은 "지난해에는 고용을 보장해줬지만 경영상황에 따라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해명하지만, 지난해 맺었던 합의는 결국 원청업체가 비정규직의 실질적인 사용자임을 인정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데 대한 거부감이 든 것으로 해석된다. 현대차와 정규직 노조는 23일 1인당 1600만 원에 이르는 성과급을 지급하는 협상안에 잠정 합의했지만 비정규직 지회 3곳은 협상 요구에 응답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경영 상황'에 따른 판단이라는 해명 역시 궁색하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인력을 감축한 현대차는 2009년 2조9615억 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당기순이익을 올렸고 올해는 그 이상이 될 전망이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현대차 공장 내부의 노동 강도를 고려할 때 여유 인력을 흡수할 수 있도록 공정을 조정하는 등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며 "최소한 지난해 수준의 고용 보장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노조 규약 개정, 비정규직 처지 고려 안 해"
23일로 창립 50주년을 맞은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은 지난해 1월 노조규약을 개정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제7조에 규정된 조합원 자격이다. '금융업·금융관련 서비스업 및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변화가 없지만 세부 항목을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와 금융업 관련 경험이 있지만 현재 종사자가 아닌 이들은 이번 개정에서 삭제됐다.
금융노조 김길영 정책홍보 본부장은 "금융업 종사자라는 말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 일종의 차별적인 용어인 비정규직을 따로 넣을 필요가 없었다"며 "현재 금융업 종사자가 아닌 이가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조합원 자격을 유지하는 경우도 거의 없어 실효성이 없는 조항이라고 판단했다"고 개정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금융노조 산하 비정규직 지부는 이번 개정이 비정규직을 금융노조에서 분리하려는 의도가 의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차윤석 비정규직 지부장은 "이번 개정은 조합원 자격을 현재 종사하고 있는 자로 못 박음으로써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며 "고용과 실직을 반복하는 비정규직 조합원을 고려하지 않는 처사"라고 말했다.
지난해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으로 비정규직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노동자 1만5000명이 금융노조 산하 각 은행지부 조합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4만 명에 이르는 금융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고, 이들을 조합원으로 받을 수 있는 조직은 산별노조의 비정규직 지회뿐이라는 것이 차 위원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노조 가입 사실이 알려지면 해고의 위협에 노출되기 쉬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입을 꺼려 현재 비정규지부의 조합원은 130명에 그치고 조합비를 납부하는 이들은 30여 명에 불과하다.
현재 노조활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20명 정도인데, 이번 개정 규약이 적용되면 이 중 절반 이상이 조합원 자격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고 차 위원장은 주장했다. 그는 "비정규직은 계약이 만료되면 다시 재취직 될 때까지 실직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규약에 따르면 이런 이들은 조합원이 아니다"라며 "잠재적인 금융권 종사자의 단결권까지 보장하는 취지로 만들어진 산별노조가 이런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2006년 비정규직으로 은행에 입사했다가 8개월 전 퇴사해 전업주부가 된 김 모 씨(여, 31세)는 이후에도 시급제 비정규직의 유급휴일 수당을 지급하라는 소송에 참여하는 등 조합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이를 많이 느꼈고 그런 점에 대해 항의하다 유무형의 강압을 느껴 퇴사했다"며 "내가 퇴사하니 남아 있는 비정규직 동료들도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걸 알지만 퇴사 이후에도 이전 동료를 위해 열심히 활동해 왔는데 이번 규약을 보면 이마저도 못할 가능성이 있다"며 "우리들의 활동이 아무것도 아닌 거 같지만 정규직 노조가 약자에게 너무 무관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2월에 해고돼 무효소송을 진행 중인 조합원 김 모 씨(남, 30살) 역시 "이번 개정은 우리 같은 노동자가 아니라 노조 측을 위한 개정"이라며 "해고당한 이후에도 다른 동료는 이런 일을 안 겪었으면 하는 마음에 활동해오고 있었는데 노조는 채용 계약과 해지를 반복하는 노동자들을 안고 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금융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은행 측 몰래 조합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한 조합원은 "비정규직법 때문에 2년마다 잘리는 이들은 노조활동을 하면 그에 따른 인사상 불이익이 따라 재취업도 힘들게 된다"며 "이번 개정은 비정규직을 위한 고민의 흔적도 없을뿐더러 현재 비정규직 지부의 상태마저도 축소하려는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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