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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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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렌

[한윤수의 '오랑캐꽃']<277>

1963년.
서울 남산의 적십자사에서 열린 '청소년적십자 회의'
각 도에서 중학생 하나, 고등학생 하나씩 뽑혀서 올라왔는데, 다행히 나는 충북의 중학생 대표가 되는 바람에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솔직히 회의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나의 정신은 노는 데만 팔려 있었다.

마침 적십자사 바로 옆의 극장에서는 안소니 퀸 주연의 '바렌'이라는 70미리 영화를 상영 중이었다.
당시 70미리 영화는 서울의 초대형 극장 아니면 구경도 못할 때라, 적십자사에서 선물로 우리 시골 학생들에게 영화 관람을 시켜주었다.

보니까 화면만 컸지, 잘된 영화가 아니다.
에스키모(안소니 퀸 扮가 조난 당한 백인을 구해주고 손님 대접한답시고 잠자리에다가 자기 마누라까지 빌려주는 그런 내용이다. 저는 밖에서 개 떨듯 떨고.
어린 마음에도 "저런 쓸개 빠진 놈이 있나?"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 큰 화면 속의 설경(雪景)이나 실컷 구경하고 나오는데,
인솔자인 서울의 모 대학생이 내 옆에 착 붙더니 잔잔한 미소를 띄며
"너 이 영화 한 마디로 뭐라고 생각하니?"
하고 물었다.
내가 머뭇거리며
"에스키모의 생태?"
하자,
"역시 어리구나!"
혀를 차더니,
더 이상 확고할 수 없는 태도로 말했다.
"야만과 문명의 대결 아녀, 인마!"

44년 후 발안에 처음 올 때 그 '바렌' 생각이 나서 웃었다.

그런데 와보니 진짜 바렌(Barren, 未開地, 버려진 땅) 같은 게 아닌가.
차 두 대가 겨우 비켜 가는 좁은 도로,
다닥다닥 붙은 낡은 건물,
오물이 흘러내린 뒷골목 야외 변소,
잡초 우거진 공터,
타임마신을 타고 60년대로 돌아왔나, 착각이 들 정도다.

여기가 만세운동으로 유명했던 그 발안인가?
한때 티켓 다방이 80개나 될 정도로 흥청거렸으며,
술 먹으러 수원으로 갈까, 발안으로 갈까, 망설이게 하던 그 발안이란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전혀 발전이 안 된데다가 오히려 퇴락한 발안,
하지만 이상하게도 외국인은 많았다.
퇴락한 곳에 외국인이 왜 꼬일까?
생각해보니 이해가 간다.

외국인, 특히 노동자들은 주눅이 들어서 그런지, 번듯하고 현대적이며 깔끔한 신시가지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거긴 한국인들이 노는 곳이니까.
예를 들어 보자.
발안 근처,
새로 건설한 향남지구에 휴일에도 송금할 수 있는 외환송금센터가 생겼다. 하지만 외국인들이 가지 않아 개점휴업 상태다.
반면에 그들은 발안 같은 퇴락한 구시가지에서는 안정감을 느낀다.
길이며 건물이며 가게며 공터가 저희 고국이나 별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으로
외국인이 몰려든다.
버려진 땅,
바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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