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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악마를 욕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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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악마를 욕망하는가?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I. 근대의 사회적 욕망

근대문학비평이론이 정의하는 것과는 달리 문학과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어느 한 구석에 살고 있는 작가들의 상상적 창조물이 영화이고 문학이다. 그래서 영화감독이나 시인 혹은 소설가가 어떤 시간과 공간의 현실에 살고 있는가는 영화를 보는 수많은 재미들 중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과거의 문학 독자들이 수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영화관객들은 영화감독의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화의 스크린 이미지들과 더불어 상상하며 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영화관객들이 그들의 두뇌 속에 남아있는 영화 스크린 이미지의 인물들을 상상하기 시작하면서 영화 속의 창조적 인물들은 영화관객들의 현실적 삶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에 등장하는 장경철(최민식 분)과 김수현(이병헌 분)도 마찬가지이다. 장경철과 김수현은 영화관객들의 삶과 현실에서 어떤 상상적 창조물로 변형될까? 그래서 영화감독과 시인과 소설가들이 어떠한 현실에 기대어 소설과 시와 영화텍스트들을 상상하고 있는가는 영화관객들과 작가들을 소통시키는 주요한 통로이다.

<조용한 가족>(1998)으로 데뷔한 김지운 감독은 <반칙왕>(2000), <장화, 홍련>(2003), <달콤한 인생>(2005),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서 상상적 영화 이미지의 극한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근대적 스릴러, 갱스터, 웨스턴 등등의 장르 영화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근대적 장르 영화들의 한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근대적 장르영화들의 한계는 장르의 바깥에 있는 이미지들을 모두 지운다는 것이다. 이번에 개봉되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악마를 보았다>(2010)도 마찬가지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경철과 김수현의 삶 이외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삶은 소외되고 제거되었다. 필자가 영화를 보는 사이 두 명의 여성 관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영화관을 나갔다. 그들은 여성들의 삶이 소외되고 제거된 영화 이미지를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 박수와 갈채를 보낸다. 장경철과 김수현과 같은 폭력의 능력이 없는 필자도 수없이 여러 번 자리를 박차고 영화관을 나오고 싶었지만 영화를 보기 위하여 지불한 돈(함께 술을 마셨던 동료 교수들의 영화비도 지불했다)이 아깝기도 하고 아직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근대의 남성적 세계의 두려움과 공포에 매료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영화 속의 폭력은 관객들에게 마치 새로운 세계와 이질적인 존재를 만나는 것과 같은 두려움과 공포의 감각을 생산한다. 공포와 두려움의 느낌은 현실 속에서 항상 존재한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 혹은 나와 다른 존재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낄 때, 내 이전의 세계가 깨어지는 공포와 두려움은 나의 온 몸을 엄습한다. 그러나 그 공포와 두려움은 이후에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즐거움을 생산한다. <악마를 보았다>에 등장하는 김수현이 장경철에게 가하는 폭력의 행사도 마찬가지이다. 연인에게 전화로 하는 사랑의 표현마저도 동료에게 들킬까봐 수줍어하는 김수현이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은 공포와 두려움이 폭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즐거움의 세계로 나아가, 마침내 현실과 완전히 단절되는 오직 그만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 장경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렸을 적의 그가 처음으로 폭력을 행사했을 때, 그는 아마도 영화 속의 김수현이나 혹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공포와 두려움의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그 처음의 두려움과 공포가 자신에 대한 사회적 환기나 새로운 즐거움의 세계로 진입했을 때, 그는 현재의 김수현처럼 과거와 현재의 악마가 된 것이다.

II. 근대적 선과 악의 이분법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즐거움을 생산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욕망은 선과 악의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은 선과 악의 이분법도 없고 색깔도 없다. 욕망은 프로이드가 정의하는 오이디푸스도 아니고 그의 제자 라캉이 정의하는 결여도 아니다. 욕망은 오직 즐거움을 생산하고자 모든 관계 속에서 흐르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욕망은 그 욕망이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자본주의에서 욕망은 자본을 욕망하고, 전제군주 사회에서 욕망은 권력을 욕망한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장경철의 폭력에 대한 욕망은 근대적 대한민국의 교육제도에서 1등은 선이고 2등 이하는 모두 악이라는 서열주의, 배운 자는 선이고 배우지 못한 자는 모두 악이라는 선과 악의 이분법, 경제관계에서 돈을 가진 기업재벌들은 선이고 돈이 없는 중소기업이나 영세업자들은 모두 악이라는 경제적 선과 악의 이분법, 정치적으로 국가권력을 가진 자들은 선이고 국가권력이 없는 자들은 모두 악이라는 국가보안법의 빨갱이 논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화적으로 미국이나 서구적인 것은 모두 선이고 전통적이거나 아시아적인 것은 모두 열등한 것이라는 식민주의적 이분법이 만든 사회적 욕망이다.

고전적인 근대의 장르영화에서 장경철과 같은 폭력의 악마는 국가의 경찰이나 검찰 혹은 의로운 영웅에 의해서 처단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영화관객들은 이미 상투적이 되어버린 그러한 고전적 영웅의 이야기에 식상해 하고 있다. 경찰과 검찰로 대변되는 국가권력의 폭력이 장경철과 같은 악마의 폭력처럼 너무도 흔한 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미 드러났듯이 종교적 선과 악의 이분법은 종교적 사제들이 신도들을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이고, 정치적 선과 악의 이분법은 정치 권력자들이 국민들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고, 경제적 선과 악의 이분법은 돈 있는 자들이 자기 배만 불리기 위한 기만이며, 교육적 선과 악의 이분법은 교사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정신적으로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지배하기 위한 지배장치이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애인을 잃고 사적 응징의 복수에 나서는 김수현은 근대적 이분법의 세계에서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가는" 근대인의 한계를 아주 잘 보여준다.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선도 없고 악도 없다거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악이라는 신자유주의나 미국 할리우드의 포스트모던(후기 근대) 영화문법이 등장한 것이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거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악이라는 사유방식은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이분법을 변형된 방식으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가 생산하는 폭력의 미학을 통하여 선과 악의 이분법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것은 마치 우리 한반도를 지배하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남북관계나 진보와 보수의 대립관계처럼 폭력이 공포를 낳고, 공포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이 또 다른 폭력을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즐거움을 향유하는 길은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는 <악마를 보았다>에 등장하지만 소외되거나 제거된 주연(오산하 분), 세연(김윤서 분), 세정(김인서 분), 간호사 한송이(윤채영 분)의 삶을 상상하고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이나 <올드 보이>(2003),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2005)는 동일한 폭력이 등장하더라도 단일한 폭력의 장르영화에서 벗어나 있다. 오늘날은 근대적 영화들이 소외시키거나 제거시킨 주연이나 세연이의 삶을 상상하거나 장경철이나 김수현처럼 뛰어난 폭력의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인들의 삶을 상상하기 위하여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이 대다수이다.

김지운 감독의 모든 영화가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반칙왕>에서 그는 소외된 셀러리맨의 삶을 상상하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그는 미국 할리우드의 웨스턴 장르영화가 보여주었던 선(좋은 놈)과 악(나쁜 놈)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일제시대 만주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놈"이 만드는 탈근대적 역사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마치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가 깡패들만의 세계가 아닌 청소년기의 "친구들"과 깡패들의 세계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영화감독 상택(서태화 분)이의 시선을 보여주면서 미국 할리우드의 갱스터 영화를 넘어서고 있듯이 근대의 고전적인 장르영화에서 벗어나 갱스터와 멜로드라마, 스릴러와 홈 코미디, 그리고 웨스턴과 역사 드라마 등등이 혼합되었을 때, 영화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새로운 삶을 상상하고 현실과 다른 새로운 세계를 생성시킨다. 그것은 순전히 오늘날의 영화관객들의 삶이 근대의 고전적 장르영화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단일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교육적인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탈근대적인 남녀노소가 함께 새로운 욕망을 생성시키며 즐거워하는 영화가 오늘날의 훌륭한 영화가 아닐까?

III. 탈근대적 욕망

일반인들의 삶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교육적으로 우리는 근대적 제도들에 얽매어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들은 그것들에 저항하기도 하고, 또 그것들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술한 바와 같이 영화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영화는 상상적 창조물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힘을 지니고 있는, 즉 이미지들을 생성하고 생산하려는 욕망의 힘을 보여준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욕망처럼 욕망은 자신이 생성시키고 생산한 이미지들의 노예가 되고 하인이 되고자 하는 힘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이 만드는 폭력의 욕망도 욕망이다. 그래서 폭력의 이미지는 폭력의 노예가 되고 하인이 되는 힘이다. 나는 <악마를 보았다>를 보다가 영화관을 뛰쳐나간 수없이 많은 영화관객들처럼 더 이상 폭력의 노예가 되고 하인이 되는 영화 이미지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 이미지들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생성적이고 생산적인 이미지들을 생산하고 즐기는 것이다. 근대적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지배와 피지배, 남과 북의 고정된 이분법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그것과 다른 그 무엇, 동물이 되고, 여성이 되고, 어린이가 되고, 소수자가 되는 이미지들을 상상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의 영화들 속에서 탈근대적 욕망을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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