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전이지만, 벌써부터 이명박 당선인은 국정 청사진 작성에 여념이 없다. 어련히 잘 알아서들 해 주실까마는, 보건의료계의 불편한 진실 하나 짚고 가자. 오늘의 주제는 '임의 비급여'다.
임의 비급여, 이 단어가 처음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때는 2006년 12월이다. 당시, 백혈병 환자 단체는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이 부당하게 치료비를 청구했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성모병원은 식품의약품안전청이 허가한 범위를 벗어나 의약품을 사용했다. 치료 대상으로 허가된 질병군에 속하지 않은 환자에게 의약품을 사용했거나, 아니면 허가받은 용량을 초과해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비급여', 즉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로 규정한다. 관련 법령 등은 비급여 항목에 해당하는 의료비를 환자에게 청구하지 못하도록 못박고 있다(국민건강보험법 시행령 22조 2항).
하지만 병원도 무작정 손해를 볼 수만은 없는 터. 규정에서 벗어나더라도 일단 치료는 하고, 그 비용을 환자에게 청구하는 관행이 이렇게 생겨났다. '임의 비급여'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임의 비급여, 병원도 할 말은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성모병원의 행위는 불법이다. 하지만,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성모병원은 백혈병 등 혈액암 분야에서 국내 최고를 자랑하는 병원. 당연히 촌각을 다투는 위중한 환자들이 몰리며, 이들을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비급여 항목이라도 의약품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어 보자. 골수이식을 받고 회복 과정에서 갑자기 고열이 나는데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백혈병 환자가 있다. 일반 환자였다면 먼저 혈액 등에서 균 배양 검사를 실시한 뒤, 대개 강도가 낮은 항생제를 한두 가지 투여하면서 경과를 볼 것이다. 이 정도는 의학 교과서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대상은 골수이식의 거부 반응을 예방하기 위해 모든 면역 기능을 말 그대로 '죽여 놓은' 환자. 당연히 담당 의사의 입장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할 수밖에 없다. 배양 검사는 하지만 그 결과에 상관없이 일단 처음부터 고단위 항생제를 여러 개, 그것도 허가 용량을 초과해 사용하는 게 그 이유다.
의사들은 이런 경우를 '때려 넣는다'고 말한다. 절박하고 시급한 의료 현장이 그대로 배어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글의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런 경우는 대개 의약품의 허가 사항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담당 의사가 '나는 법을 어겨 가며 규정 이상으로 항생제를 쓸 수 없다'며 버텼다고 해 보자. 환자의 생사에 관계 없이, 이런 의사는 먼저 선배 의사로부터 귀싸대기를 올려 맞기 십상이다. 의료는 본질적으로 '환자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전 연재에서 지적한 대로, 어떤 경우에도 환자가 의료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환자 개개인에 대한 충실함(fidelity)이지 결코 한정된 의료자원의 배분을 염려하는 충직함(stewardship)이 아니다(Ellis SJ, BMJ, 1999)."
물론 환자도 할 말이 있다. 담당 의사가 타당한 자료를 갖추어 심평원에 이의를 제기하면 비록 비급여 항목이라고 해도 급여를 인정해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 그러나, 이것 역시 의료계는 현실을 모르는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우선 자료를 챙기는 것 자체가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의료인에게 지나치게 과중한 행정 부담이다. 더욱이, 설령 자료를 제출한다고 해도 평균적으로 80% 경우는 기각되고 만다.
병원, 환자 모두 불합리한 제도의 희생자
병원(의료계)과 환자의 입장 중에서 어느 하나를 특별히 더 옹호할 필요는 없다. 왜냐 하면, 모두가 불합리한 제도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비급여 항목을 규정한 현 제도의 근간이 된, '허가된 용법 또는 용량을 벗어나 의약품(치료법)을 사용하는 경우(오프레이블 사용ㆍOff-Label Use)'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교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의약품의 오프레이블 사용을 비급여로 규정한 것은, 본질상 전문인의 판단 영역에 맡겨야 할 진료를 법이라는 제한된 틀로 가두려는 정부의 과욕에서 비롯됐다. 다시 말해, '식약청이 허가를 해 준 내용대로만 진료를 해야 하고, 여기에서 벗어나면 당연히 급여 대상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관련 국내법이나 규정은 다 이처럼, '오프레이블 사용은 곧 불법'이라는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류다. "법은 의사가 허가받은 약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제한을 두지 못합니다. (…) 일단 약이 허가를 받으면, 의사는 허가 사항(레이블)에 포함돼 있지 않는 사용법, 해당 약이 포함된 (새로운) 치료법, 그리고 (레이블에 명시되지 않은) 환자군에게 얼마든지 처방을 할 수 있습니다." (미 하원 통상위원회 감독 및 조사소위 위원장에게 보낸 미 식품의약품안전청의 공식 서한, 1995년 4월)
미국 예를 든다고 벌써부터 혈압이 오를 분이 계실 줄 안다. 하지만 내가 FDA를 거론한 이유는, 오프레이블 사용에 대한 이들의 인식이 의약품이 개발돼 허가에 이르는 과정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FDA나 식약청 같은 규제기관은 의약품의 개발자가 자료를 갖추어 제출한 허가 요청 사항에 대해서만 '예, 아니오'를 결정할 뿐이다.
당연히, 환자 수가 적어 의약품을 개발해야 할 상업적 유인이 별로 없는 질병, 앞에서 예로 든 백혈병 환자의 예처럼 일반적인 용법이나 용량으로 묶기 힘든 특수한 경우 등에 대해서는 아예 자료가 제출되지 않는다. 따라서, 오프레이블 사용은 '레이블되지 않은 (unlabeled)' 또는 기재되지 않은 (silent)' 사용일 뿐, 결코 국내 규정이 예단한 것처럼 '불법적 사용'이 아니라는 말이다(Woodcock, 1997).
이것만이 아니다. 오프레이블로 의약품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는 임상적으로 흔하고, 무엇보다 꼭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항암제는 오프레이블 사용이 빈번한 대표적 분야인데, 오히려 허가 사항을 따르는 경우보다 오프레이블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최신(state-of-the-art)'의 사용법이다. 또, 여전히 의약품의 임상 개발에 피험자로 참여하는 경우가 제한된 소아나 임산부에서 오프레이블 사용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사용법이 허가 사항에 규정돼 있지 않기 때문에 치료 못한다고 말하는 얼빠진 의사가 과연 있을까?
환자단체의 주장은 튼실한가?
또 다른 오류는, 오프레이블로 의약품을 사용하는 것이 '입증되지 않은' 또는 '실험적' 치료라고 보는 견해다. 이러한 오류는 환자 단체, 선정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일부 진보 언론의 주장에서 흔하게 관찰된다. "의학적인 근거에 따라 정한 사용량이나 범위를 넘는 임의 진료는 임상시험이나 마찬가지다." (정부의 '임의 비급여 개선안'에 대한 환우회연합모임, 건강세상네트워크 등의 반박 기자 회견, 2007년 12월 14일)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진료'와 '연구(실험)'의 기본적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발생한 오류일 따름이다. 의료 윤리의 시금석으로 간주되는 벨몬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그 차이를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진료는 성공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고 간주한 상태에서 '개개' 환자의 건강을 증진할 목적으로 실시되는 제반 중재적 조치를 가리킨다. (…) 이와는 달리 연구는 가설을 세우고 결론을 도출함으로써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한 지식을 생산해 내려는 행위다."
따라서 임상 현장에서 의사의 전문적 판단과 책임에 따라 오프레이블로 의약품을 사용하는 것이 절대로 실험이나 연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오프레이블로 사용한 예에서 관찰된 일화(anecdote)적 효과들이 나중에 본격적인 연구(임상시험)로 이어져 새로운 치료법의 하나로 정착된다. 요컨대, 오프레이블 사용은 정상적인 진료의 하나라는 것.
따라서 성모병원의 예처럼 임의 비급여를 둘러싸고 의료계와 환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도록 방치한 1차적인 책임은 문제 많은 제도를 운영해 온 정부에게 있다. 정부도 이를 모르지는 않는 것 같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해 12월 보건복지부는 타당한 근거가 있으면 임의 비급여를 더 이상 불법으로 간주하지 않고, 의료기관이 환자에게 치료비를 청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임의 비급여 개선안'을 발표했다. 물론, 환자 단체는 '임상시험이나 마찬가지인 임의 비급여 항목에 환자가 치료비를 낸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환자 단체의 주장은 그 근거가 별로 튼실해 보이지 않는다.
두 갈래 길, 어디로 갈 것인가?
임의 비급여 개선안은 확실히 진일보한 제도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근원적 해결보다는 땜질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왜냐 하면, '오프레이블 사용이 곧 불법'이라고 규정해 온 각종 법과 규정의 원래 의도는 의료보험 재정의 건실화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처음부터 정부는 임의 비급여 항목에 대한 급여를 허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환자들이 스스로 주머니를 털어야 한다는 상황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셈이다.
나는 이전 연재를 통해 지속적으로 의료보험 재정 부실화를 초래해 온 가장 큰 책임이 결코 환자나 의료계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조악한 의약분업으로 막대한 재원을 낭비한 것, 어설픈 약가 통제로 전체 의약품 판매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제네릭에 필요 이상의 의료보험 재정을 지불한 것, 방만한 건강보험공단 경영으로 혈세를 내다 버린 것 등등, 정부가 이것만 제대로 해결했어도 임의 비급여 항목의 일부를 급여로 전환할 재원이 마련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점증하는 환자들의 의료 수요를 충당하기는 어렵다. 현재와 같이 '저비용 고급여', 즉 보험료는 적게 내고 급여 혜택은 많이 받는 제도는 필연적으로 일부 이해당사자의 일방적 희생이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 정부들에서 이 역할은 의료계에 강요됐다.
따라서 임의 비급여에 대한 불편한 진실은 이것이다. 우리 사회가 저비용을 유지하기 위해 저급여를 감내할 것인지, 아니면 고급여를 유지하기 위해 고비용을 받아들일 것인지 결정할 시기가 이미 지났다는 사실. 만일 전자를 택할 경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보다 더 확장될 임의 비급여 항목에 해당하는 질병에 걸리지 않기만을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불편한 진실의 또 다른 한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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