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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시대'가 갔다고? 천만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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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시대'가 갔다고? 천만의 말씀!"

['이명박 시대'를 맞으며] 5년 후를 준비하자

결과는 확정되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특검이 남아 있긴 하지만, 대선 결과를 뒤집어 놓을 것이라 보이진 않는다.
  
  종교적인 기적을 바라지 않았다면, 대부분 예상했던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이명박 후보가 거의 과반수에 가까운 득표율로 당선되었다는 현실이 눈앞에 벌어지자 충격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명박 후보를 반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허탈과 좌절, 분노, 슬픔, 냉소와 같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있는 것 같다.
  
  사실 그럴 만하다. 'BBK 주가 조작 사건'부터 자녀 위장 취업, 위장 전입 같은 온갖 의혹의 주인공이자 '특검의 피의자'인 후보가 우리의 주권을 위임받을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은 당혹스럽고 황당하기까지 한 일이다. 게다가 거의 과반수에 가까운 투표자가 그를 선택했다니! 다른 나라가 관심 가질까봐 두렵고, 도덕 교사는 학생에게 어떤 도덕을 가르쳐야 할지 막막할 것만 같다.
  
  그러나 좌절과 냉소로는 이명박 대통령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 이제 차분히 다음 5년을 대비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 시대에 대한민국이 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통령은커녕 인간의 윤리조차 갖추지 못했던 전두환 씨가 대통령을 할 때에도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았다. 물론 대통령의 능력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다. 대한민국을 운영하는 시스템이 대통령 한 명 때문에 엉망이 될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명박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한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여성과 장애인의 기본권이 모조리 박탈되거나, 모든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시스템의 운영 방식이나 체질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 시대가 이전과는 달라질 것은 분명하다.
  
  차별은 조금씩 은근슬쩍 공고해질 것이고, 양극화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변명으로 슬그머니 정당화될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시나브로 늘어날 것이고, '88만 원 세대'는 삼십대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일시적인 경기 부양 정책의 마술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대국민 약속이 현실화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의 일은 결코 낙관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우울한, 하지만 엄중한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 할 일은 많다. 그 중에서 다음 대선을 제대로 치르기 위한 준비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대선 끝나자마자 무슨 차기 대선을 준비하느냐고? 걱정 말라. 선거운동하자는 말은 아니다.
  
  최소한 정당 체제의 토양이라도 마련하자는 거다. 각자의 정치적, 계급적 입장에 따라서 정당에 관심을 갖고 의지가 있다면 참여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문국현 씨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대선 끝났다고 흩어질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힘을 모으고 정책 정당의 체계를 갖춰서 나타나야 한다. 이회창 측도 마찬가지다. 진정 정통 보수를 대변하겠다면 정당 하나 제대로 만들기 바란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일단 자기 정체성부터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어울리지 않게 진보연(然)하는 모습은 가당치 않다. 자유주의적 개혁 세력을 대변하는 정당이 그나마 나아 보인다. 대신에 더 이상 '대국민 사기극'은 절대 금지다.
  
  집권에 성공한 한나라당이 보수 정당인 것은 나쁜 게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부패나 범죄와는 확실하게 결별해야 한다. 그리고 진보나 좌파를 무슨 정신병이나 죄악으로 여기고 '적출수술' 운운하는 태도부터 고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발 '한반도 대운하'는 포기해 달라. 공약 안 지킨다고 뭐라 하진 않겠다. 오매불망하던 청와대를 '탈환'했으니 국민을 위해 그 정도 선물은 줘야 하지 않을까.
  
  민주노동당은 창당 이후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대선 결과는 참담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공식적인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폭풍전야의 고요일까? 재창당 수준의 쇄신부터 분당까지 격렬한 논쟁점들이 머지않아 수면 위로 올라올 것 같은 분위기다. 선거 운동 기간 중에 노회찬 의원은 한 인터넷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 되면 우리는 구두를 운동화로 바꿔 신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의 민주노동당은 신발을 고르기 전에 발부터 먼저 씻어야 한다. 진성 당원을 자랑하지만, 파괴적인 정파 논리에 평당원이 설 자리는 없다. 변화와 쇄신을 입에 달고 살지만, 책임지는 지도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 정당이라고 자부하지만, 국민들은 몇년 째 똑같은 소리만 한다고 질타한다.
  
  세상에 이런 진보정당은 없다. 민주노동당은 당장 내년 총선 준비보다는 2004년 원내 진출 이후 지난 4년간을 철저하게 되돌아보고 대국민 반성문부터 제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창당의 심정으로 다시 시작하라.
  
  정당 체제의 토양을 만드는 첫걸음은 철저하게 계급으로, 부자와 서민으로, 강자와 약자로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결과대로 지지 정당을 선택해야 한다. 단순히 말하면, 부자들은 부자의 정당을, 노동자는 노동자의 정당을 지지할 수 있는 기초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부자의 정당에 몰표를 갖다 주는 비극을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서울 강남의 부자들은 외제차를 몰고 와서 투표하는 풍경을 빚었다고 한다. 부자들이 3~40분이나 줄을 서서 투표를 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계급적 투표를 위해 단결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어떤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선거 날에도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기조차 힘들다. 한국 노동계의 양대 산맥 중 하나가 부자 정당의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스스로 산불을 내버린 것은 참으로 살풍경이었다.
  
  모 후보는 방송토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에게 '이념의 시대는 갔다'고 충고(?)했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오히려 갈수록 이념은 사회적 현실을 첨예하게 드러내준다.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이념과 계급의 존재를 외면하고 은폐하려는 참을 수 없는 세치 혀의 가벼움이다.
  
  세상에는 부자가 있고, 가난한 이가 있다. 또 자본가('사용자'라고 해도 좋다. 이름이 바뀐다고 사회적 존재가 달라지진 않으니까!)가 있고, 노동자가 있다. 여기에는 당연히 갈등이 있다. 이것은 이념이 아니라 사회적 사실이다. 갈등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갈등을 외면한 통합 운운이야말로 나쁜 짓이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어야 하듯이, 갈등 있는 곳에 정당이 있어야 한다. 정당은 갈등을 은폐하거나 봉합하는 게 아니라, 갈등 자체를 대변해야 한다. 지금까지 민주노동당이 유일하게 이 일을 시도해왔다. 이런 정당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가버린 이념의 시대'를 다시 불러와서 정당들을 각자의 이념대로 줄 세워야 한다.
  
  앞으로 5년간 이런 정당체제의 기초를 마련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 수준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저질 대선을 5년 후 또 치를 것인가.
  
  덧붙이자면, 앞으로 5년 동안 사표논리의 악령을 영원히 쫓아내야 한다. 비록 낙선할 것이지만, 지지하는 후보에게 주는 표는 사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다. 가난한 이들이 부자 후보에게 주는 표야 말로 진짜 죽은 표다.
  
  5년 후, 자신의 사회적 존재에 따라 자유롭게 대통령을 선택할 수 있는 '그 날'을 만들자. 당장 내년 총선이 첫 실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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