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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부탁건대, 수준 높은 토론을 해 보자"

이형기의 학이사(學而思) 의ㆍ과학 <11> '약가 통제' 이득이 없다

정부가 논란 속에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실시한 지 1년이 지났다. 지난 2006년 12월부터 시행한 약제비 적정화 방안은 보험 급여 대상 약품을 미리 결정하는 '선별 등재(포지티브리스트)' 방식을 도입해 큰 논란이 되었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제약기업이 적극 이 정책을 반대하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의료계도 양분돼 찬반 논란이 계속됐다. 한편에서는 약제비 적정화 방안이 미흡하다며 외국계 제약기업의 신약 약값을 더욱더 강력히 통제할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식의 약가 통제 정책으로는 정책의 목적인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아끼는 데 기여할 수 없다는 비판도 나왔다.

지난 6일 이형기 교수가 "정부의 1년이 지난 시점에서 평가해 보건대, 이런 식의 약가 통제 정책은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아끼는 데도, 환자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관료를 위한 정책일 뿐"이라고 주장했다(☞관련 기사 : "약가 '통제', 관료 기득권 지키려는 발버둥인가?"). 이 교수의 기고를 계기로 약가 적정화 방안을 둘러싼 논란이 보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이 교수의 주장을 보고 보건복지부 현수엽 보험약제팀장(☞관련 기사 : "다국적 제약업체와 싸워 얻은 성과, 폄훼 말라"), 이형기 교수(☞관련 기사 : "'싸구려 애국주의'에 호소 말고 '근거'를 대라"), '건강 사회를 위한 약사회' 신형근 정책기획국장(☞관련 기사 : "신약은 다 좋다?…그런 믿음 버려야")이 한 차례씩 반론, 재반론을 주고 받았다. 이 교수는 신 국장의 글을 염두에 두고 한 번 더 반론을 보내왔다.

이형기 교수는 "신형근 국장의 반론은 번지수도 잘못 짚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라며 "지금 환자를 위한 약가 정책이 무엇인지 수준 높은 토론을 해보자"고 지적했다. <프레시안>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런 토론이 더욱더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앞으로도 이해당사자, 전문가의 토론을 지상 중계할 예정이다. <프레시안>

토론의 상대 선수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건강 사회를 위한 약사회(건약)'의 신형근 정책기획국장. 그런데, 신 국장은 나도 잊고 있던 사실을 하나 일깨워 주었다. "2006년 12월부터 이형기 교수는 정부의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비판했다."

약제비 적정화 방안이 공식 발효된 것이 2006년 12월 29일이다. 따라서, 이 어름에 비판이 제기된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신 국장은 굳이 시기를 적시하는 것으로 반론을 시작했다. 새삼스럽게.

의아했던 나는 건약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이것저것 검색해 보았다. 그랬더니, 맙소사, 이분들께 나는 쭉 관심(?)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이형기가 돌아오는군요."
"지금까지 논리가 허술했던 보수 진영의 의료 부문에 대해 세련된 이론을 제공할 이데올로그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입니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에 그(이형기)의 논리를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이형기]의 행보에 더 관심을 가져야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있었다. 신형근 국장은 약제비 적정화 방안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내 글까지 소개하는 자상함을 보였다. '디워 논란' 중에 <프레시안>에 게재됐던 기고문이 그 예였다. "앞으로 이형기의 글에 집착하겠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다짐하였기에 이형기의 글도 소개합니다."(☞관련 기사 : "<디워> 논란, '황우석 사태'의 재발인가")

모든 게 확연해졌다. 신 국장이 '2006년 12월부터'를 자신의 반박문 모두에 삽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내가 언제부터 무슨 말을 했는지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셨다는 것.

어쨌든, 촌뜨기 책상물림에 불과한 내게 과분한 관심을 가져 주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능력 이상으로 평가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빼놓지 않아야 하는 것도 당연지사. 좋고 싫고를 떠나, 어느 누가 또 나를 이렇게 끔찍이 생각해 줄까?

하지만, 난감했다. 신형근 국장이 반박 기고문의 절반을 할애해 '신약이 비쌀 필요가 없다, 신약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기 때문. '아니, 누가 뭐랬나?' 도무지 내가 하지도 않은 주장을 들이대며 반론을 펴시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해답은 간단했다. 약제비 적정화 방안의 주 타깃이 신약이라고 지적하니까 내가 대부분의 신약을 개발하는 미국 또는 다국적제약업체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지레 짐작한 것. 하지만, 약제비 적정화 방안으로 신약이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된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객관적 '사실'일 뿐이다.

요컨대, 미국과 표면적으로 유사한 주장을 펼친다는 이유로 내 국적을 의심했던 현수엽 보건복지부 보험약제팀장이나,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비판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쓴 신형근 국장이나 오십보백보다. 재미있는 것은, 두 분 모두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비판하며 내가 근거로 제시했던 자료에는 단 한 말씀도 없었다는 사실.

더군다나 이 분들의 어설픈 예단과는 달리, 외려 내 도움을 받은 것은 국내 제약기업들이었다. 그것도 아주 실제적인 도움을. 예를 들어, 현 팀장의 반론에 대한 재반박 기고문을 보고 내게 연락을 취해 온 것은 국내 제약기업들의 연합 단체였다. 기고문에 인용된 논문의 사본을 보내 줄 수 없겠느냐는 간절한 요청과 함께.

논문은 이미 공공의 영역에 공개된 정보이므로 그렇게 못 할 이유가 없었다. 또, 이들이 직접 논문을 찾기가 수월치 않으리라는 짐작도 했다. 우선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난감할 것이다. 설령 논문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전문을 보기 위해서는 대략 편당 4만 원 내외의 금액을 지불해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알기 쉽게끔 일일이 논문 제목, 저자명, 연도 등을 파일 이름으로 만들어 요청한 분께 보내 드렸다.

분명히 말하지만, 특정 국가나 기업을 대변하려고 이 논쟁을 시작한 게 아니다. 다만, 실증적 자료와 엄밀한 근거에 따라 도출되는 결론을 주장할 뿐. 따라서, 내 주장이 맘에 안 들면 타당한 논거에 따라 믿을 만한 증거를 들어 반박하면 된다. 그러나, 상대를 상투적인 유형(stereotype)으로 묶어 주장을 함께 내치려는 것은 아마추어들이나 쓰는 하수다.

어쨌든, 이렇게 계속 핀트가 어긋난 반론을 상대해 논쟁을 이어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솔직히 시간도 아깝다. 하지만, 이 논의를 지켜보는 많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핵심 쟁점을 명확히 짚는 것은 중요하다. 더군다나, 신 국장이 인용한 통계 수치나 주장 중에는 정정돼야 할 부분도 있었다. 이것이 내가 다시 펜을 든 이유다.

'사실'에 근거한 반론 보고 싶어

신형근 국장은 항암제인 글리벡을 예로 들어 국내 약가가 미국보다 "어처구니없이" 비싸다는 논의를 폈다. 이 때, 비교 기준으로 삼은 것이 소위 'BIG 4'. 신 국장의 주장이다. "글리벡은 2006년 기준 국내 가격이 2만3045원인 반면 BIG 4 가격은 1만2490원으로 2 배 가량 차이가 난다."

이 부분에서 나는 크게 웃었다. 한 학교는 평균 성적을, 그리고 다른 학교는 거의 꼴찌에 가까운 학생의 성적을 갖고 두 학교의 성적을 비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물론, 어떤 의도가 있거나 내용을 전혀 모르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에서 '한 학교가 다른 학교보다 두 배 성적이 높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무슨 뜻인가?

BIG 4 가격은 미국 연방기관 중에서도 특별히 재향군인국, 국방부, 보건공중국, 국경수비대 등 4개의 기관에만 적용되는 '특별' 인하 약가다. 이런 특혜를 주는 이유는 이들이 연방정부 내에서 가장 덩치가 큰 의약품 구매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재향군인국처럼 상시 질병을 앓는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보건공중국처럼 특정 계층(인디언)의 건강 문제를 공중보건 차원에서 다룬다는 것도 이들에게 낮은 가격을 적용하는 이유다.

하지만, BIG 4를 제외한 대부분의 연방기관들은 '연방공급명세가(Federal Supply Schedule price, FSS)'에 준해 약가를 지불한다. 더욱이, 정작 민간 부문에서 소매 약가에 가장 가깝고, 주 정부가 메디케이드 급여율을 결정할 때 사용하는 것은 '평균도매가(Average Wholesale Price, AWP)'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모두 공개된 정보라는 사실.

2006년의 경우, 글리벡의 FSS는 2만1000원(☞관련 링크 : FSS 약가 보기), AWP는 2만6000원 정도였다(☞관련 링크 : AWP 약가 보기). 따라서 미국의 약가 결정 시스템이 다양하고, 각각의 약가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대로 이해했다면, 신 국장이 주장했던 것처럼 대표성을 갖지 못하는 약가 스펙트럼의 낮은 쪽 극단값을 비교치로 삼아 '2배' 운운할 수는 없다. 요컨대, 엉뚱한 통계를 부정확하게 사용해 선정적 주장의 근거로 삼는 것은 타당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물론, 전문적이지 못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나는 건약과 같은 시민단체가 단지 정치적 지향점에서만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 국장의 통계 수치 인용 방식을 보니 내 생각이 틀렸다. 의제를 쟁점화하기 위해 선전에만 집착하면 리얼리티가 사라진다. 텍스트(자료)를 수집하는 '열심'도 중요하지만, 어떤 콘텍스트(맥락)에서 얻어진 텍스트인지 판단하지 못하면 통전적 이해는 불가능하다. 물론 건약의 목표가 전위 예술이 아닌 이상, 필터를 사용해 피사체의 특정 부분이 왜곡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주 활동 과제는 아닐 터.

정부 약가 통제…제약 산업 고사의 지름길

신형근 국장은 또 이렇게도 말했다. "약가 정책이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국내 제약산업이 몰락할 것이라는 판단은 과도한 해석이다." 죄송하지만, 이것은 결코 과도한 해석이 아니다.

제약기업이 혁신적 의약품 후보 물질을 발견하고 이를 개발하는 능력은 한 국가 내부의 제약 환경이 어느 정도로 경쟁을 진작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부가 약가 통제나 각종 규제를 통해 기업간의 경쟁을 억제하고, 일방적으로 기업 환경의 테두리를 정해 놓으면, 이들은 경쟁 회피적으로 체질을 바꾼다. 그래서 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세계 시장에 나가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다. "한 국가 내부의 약가 통제 구조가 자국 내 경쟁 환경은 물론, 나아가 세계 시장에서 국내 제약산업의 경쟁력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Thomas LG 3rd, 1992)."

지난 연재에서도 소개했지만 프랑스는 정부의 일방적 약가 통제 때문에 저약가를 유지해 온 대표적 국가다. 일본 역시 정부 주도의 강한 약가 통제 정책을 펴 왔다. 그 결과, 프랑스나 일본의 제약기업들이 1963년부터 1991년 사이에 개발한 의약품 중 각각 39%와 23%만이 혁신적이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장 기능을 우선하고 혁신에 대한 전국가적 지원을 펼쳤던 미국의 제약기업이 같은 기간에 개발한 의약품 중 이 기준을 만족하는 것은 72%나 됐다(Thomas LG 3rd, 위의 문헌).

상대적으로 제네릭(복제약)에 유리하게 돼 있는 약가 구조도 혁신을 방해해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왜냐 하면, 연구 개발을 통해 진정한 가치 창출에 애쓰지 않더라도 고가의 제네릭 약가에 의존해 기업 활동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낮은 약가로 제네릭이 팔릴 수밖에 없도록 자국 내 시장이 경쟁 친화적으로 변모하면 제약기업들은 점점 더 고수익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혁신적 신약 개발로 방향을 바꾼다. 영국이 대표적인데, 세계 제약계의 수위를 다투는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이 영국에서 태동한 회사라든가 오늘날 영국이 가장 선호되는 의약품 개발 국가라는 사실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정부의 어쭙잖은 통제 이제 그만!

거듭 강조하지만, 약제비 적정화 방안처럼 일방적으로 약가를 인하하려는 것이나 제네릭이 필요 이상의 비싼 값에 팔리도록 하는 것이나 모두 정부가 어쭙잖은 통제로 자유로운 경쟁을 방해하는 하책들이다. 실증적 증거들은 국내 약가 정책이 결국 자국내 제약 산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소임을 일관되게 보여 준다. 따라서 "신약을 개발하여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것은 우리나라 약가 제도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라는 신형근 국장의 주장은 사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이념 지향적 언명일 뿐이다.

결론을 맺자. 반론은 누구라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의 법칙은 최소한 준수돼야 한다. 초점에서 벗어나지 않는 주장을 펼치되, 엄밀한 근거와 타당한 논거를 대야 한다는 것. 토론 선수는 얼마든지 바뀌어도 좋지만, 제발 이 원칙만은 지켜 주었으면 좋겠다.

다음 연재에서는 약제비 적정화 방안의 최종 결론을 다루겠다. 왜 의약품이 아니라 '환자'가 모든 의약품 정책의 중심이 돼야 하는지. 사실 이것이 내가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괜히 이상한 데 시간만 썼다. 줄 못 잡는 반론들 상대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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