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10분 정도 머물렀다. 컴퓨터 화면으로 글을 읽기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종이 신문보다 상세한 느낌은 있는데, 내가 구독하는 <한겨레>의 완성도에 비해 퇴고가 덜 돼 있는 느낌이었다. 인터넷 신문 기자들이 글이나 제대로 쓰겠어, 정체불명의 선입견이 컸다.
그해 11월 어느 날이다. 살다 보니 속에 열불이 나서 70매가 넘는 글을 쓰게 되었다. <한겨레>의 '왜냐면'에 투고했다. 실어줄 리 없었다. 내가 목도한 세상 한 구석의 진실에 나는 미쳐 있었으므로 분재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선생님, 우리 신문이 그러는 것 봤습니까?" 하는 답장이 왔다.
<오마이뉴스>의 어느 기자에게 보냈다. "20매로 줄여주세요." 나는 도무지 줄일 수 없었고, 또 줄이고 싶지 않았다. 그 글은 70매짜리 글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고 급한 소망을 담은 글이라 책으로 낼 수도 없었다. 한 지인이 강양구 기자를 연결시켜주었다. <프레시안>은 글의 전문을 실었다.
'글을 실어줘, 고맙다!' 하고 그 후엔 <프레시안>을 열심히 찾게 되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분량 제한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인터넷에 기반을 둔 신문이고, 외부에서 자발적으로 기고한 탓에 고료를 안 줘도 되니, 받아 실은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했다.
기고와 게재로 인연을 맺은 후, 딴에는 애정을 가져보겠다고 <프레시안>을 곧잘 펼쳤는데, 정치 관련 기사가 쓸데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불만을 일방적으로 가졌다. 왜 이런 이야기를 소상히 아는 데 시간을 써야 하나. <프레시안>과 나의 관심 사안은 30% 정도의 교집합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말과 글이 추구하는 진실
이른바 '황우석 사태'가 발생했다. '사태' 초반에 <프레시안>을 열고 들어가, 기사 두세 편을 읽었다. 바로 나는 '황우석'이란 키워드를 넣어 <프레시안> 기사를 모조리 검색해 새벽 2시까지 읽었다. 준비는 끝났다. 한 달 두 달인지 모르지만, 황우석 사태가 정리되는 즈음까지 <프레시안>의 보도를 열심히 따라갔다.
말과 글이 추구하는 진실, 내 인생에서 그러한 진실이 사회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 진실을 둘러싼 팽팽한 공방의 결정적 판가름은 <피디수첩>과 김선종 연구원이 나눈 대화의 녹취록 공개에서 이뤄졌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조용한 토요일 오후였다. <프레시안>에 녹취록이 올랐고, 읽었고, '아, 이제 됐다, 끝났다…' 하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녹취록을 읽고 있을 <프레시안> 독자의 존재감을 나는 느꼈다. '수고했다'고 말하며 악수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들과 함께 큰 사건의 고비를 잘 통과했다는 희열감이 참 좋았다.
비교하는 것이 좀 그렇지만, <오마이뉴스>는 사태 초기에 황우석 박사를 찾아간 여인네들이 서울대 교정에 꽃을 깔고 어쩌고 하는 것을 중계하는 것으로 톱기사 자리를 메울 때, 나의 신뢰는 금이 갔다. <한겨레>는 황우석 박사를 신문사 이미지 광고에 출연시켜 생명공학 분야에 대한 '개념 부족'을 일찌감치 드러냈다.
YTN에 대한 실망은 정말 컸다. 미국까지 날아가 진실을 흐리는 김선종 인터뷰를 진행했던 기자를 기억하는데, 지금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가 들려오면 채널을 돌린다. <프레시안>의 기자 한 명과 탁월한 외부의 조력자들, 그리고 그들의 문제의식을 신뢰한 <프레시안> 편집국이 너무 멋졌다.
<프레시안>의 '관점'과 '근성'
황우석 사태를 우직하고도 날카롭게 다루어내는 것을 보며 내가 결정적으로 얻게 된 것은 프레시안 편집국의 '관점'과 '근성'에 대한 신뢰였다. 신뢰, 밍밍한 말이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희소하고 소중한 가치인가. 이 때부터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 후 <프레시안> 읽기가 변했다. 나는 이 작은 언론에게 '배우겠다!' 하고 결심했다. 즉, <프레시안> 편집국이 취재하고 게재한 기사라면, 당장 나에게 소용이 없을 것 같더라도, 적어도 <프레시안>이 선택한 기사이기에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이상한 믿음이 생긴 것이다.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프레시안>의 모든 기사를 읽는 독자가 되어버렸다. 그 새 <프레시안> 기자와 인연도 생겼다. 딱 한 번 <프레시안> 기자 몇 명과 점심을 한 적 있는데, 그들에게서 풍겨오는 총명함과 진실한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최근 박인규 대표가 독자들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나는 오랜만에 장편소설 쓰기에 돌입한 상태였고, 내년에 책이 출간되고 인세가 들어오면 일시불로 화끈하게 후원해야지, 생각했다.
그날 밤, 다시 생각했다. 화끈하게 후원할 정도로 인세가 안 들어올 확률도 상당히 높고, 또 인세가 묵직하게 들어와 후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 살림 한쪽을 떼어내 후원하는 것이 값지다, 이런 너무나도 옳은 소리가 자꾸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실물경제에서 미끄러진 돈이 문제지 실물을 똑바로 표현하는 돈은 얼마나 뜨거운 존재인가. 군 입대를 하려고 기차를 기다리는데, 과수원 농사를 하며 살던 작은어머니가 고개 몇 개를 넘고 출발 10분 전에 헉헉거리며 달려와 '군대 간다메? 몸 성히 잘 다녀오너라.' 하고 쥐어주던 때 묻은 1만 원짜리 지폐 석 장을 잊지 못한다.
나는 '월 5천 원'을 선택해 클릭했다. 액수가 적어 부끄럽다는 생각은 없다. 작은어머니의 돈과 같은 돈이다. 내년에 책의 운명이 잘 되어서 살림이 실속 있게 개선된다면, 액수를 올릴 생각이다. <프레시안>이 잘 되길, 진심으로 빈다.
☞ '프레시앙'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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