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쁜 피를 가졌던 나. 수시로 많은 사람들의 피가 필요해서 수혈도 받지만 정작 자신은 헌혈로 피를 함께 나눌 수도 없는 나. 피를 나눌 수 없다면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그는 휴먼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대신, 자신의 피를 나누지 못하는 대신, 건강과 생명의 소중함,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투쟁과 연대의 소중함을 나누는 '활동가'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병원 드나드는 사람은 꼭 읽어야 할 책
<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프레시안북 펴냄)는 그가 골수 이식으로 새 생명을 얻고 난 뒤 2001년부터 계속해온 건강권 운동의 직·간접적 경험을 정리한 '보고서'이자, 제목 그대로 의료 이용자를 위한 일종의 '설명서'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부 '건강에도 형평이 있다'에서는 건강을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이 책의 전제가 되고 있는 건강권의 개념을 소개했다.
제 2부 '병원이 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그동안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보건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사례 중심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어려움을 먼저 겪은 선배 환자의 입장에서 차근차근 설명했다. 제 3부 '우리들이 만드는 희망 의료'에서는 현재 한국 보건의료 체계가 처한 위기와 나아갈 방향들을 모색하고 있으며, 제 4부 '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에서는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똑똑하고 알뜰하게 의료이용을 할 수 있는지 요령들을 알려주고 있다.
이 책은 독자들에 따라 그 의미와 쓰임새가 다를 것이다. 우선, 환자와 그 가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책은 일단 굉장히 쓸모 있는 실용 서적이다. 그 자신이 생사를 넘나들며 누구보다도 잦은 병원 출입을 했고, 또 '백혈병 환우회'와 '건강세상네트워크' 활동을 통해 환자와 가족들의 어려움을 가장 가까이서 같이 했던 베테랑(?) 선배 환자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처방전은 왜 두 장을 받아야 하고, 불법 청구된 진료비는 어떻게 찾아야 하며, 좋은 동네 약국을 찾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동안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생활의 지혜를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리고 이 책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저자는 환자와 그 가족들이 어떻게 이 복잡한 의료체계를 헤쳐 나가야 할지 가르쳐줄 뿐 아니라, 각 개인들이 경험하는 문제들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운명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상황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또 그것이 일부 악덕 의료기관이나 의료인의 일탈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제도와 체계의 문제임을 이야기한다. 즉, 나 홀로 똑똑한 '소비자'가 되는 방법을 넘어서, 건강권을 가진 '시민'으로서 문제의 근원을 이해하고 작은 실천부터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혜택도 별로 없는 건강보험료 내기 싫으니 차라리 원하는 사람만 민간 보험 들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주변의 흔한 푸념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무책임한 것인지, 우리는 그의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다.
불편한 '진실' 담은 교과서
하지만 보건의료인, 특히 병원 관리자나 의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책은 상당히 불쾌할 수 있다. 그렇다. 이 책은 편향되어 있다. 하지만 거대 자본이나 정부에 편향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보건의료 체계 내에서 약자였던 환자의 입장으로 편향되어 있다. 그렇기에 보건의료계는 저자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의사들은 이 책이 불합리한 보험 수가 체계와 규제 위주의 정부 정책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을 의료계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고 억울해 할 것이다.
혹은 전문적인 판단에 근거한 진료 행위를 비전문가인 저자가 함부로 속단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듯, 의사나 병원의 불법 청구가 불합리한 수가 체계 때문이라면 의료계는 국민들과 함께 그걸 고치려고 노력해야 할 일이지, 그 손실을 (심지어 환자 모르게) 환자와 가족들의 주머니로부터 보전해서는 안 될 일이다. 또 1만 원짜리 슈퍼마켓 영수증에도 품목과 가격이 상세히 기록되는 마당에, 수백만 원, 수천만 원짜리 진료비 영수증에 상세한 내역이 기록되지 않는 것은 분명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다.
저자가 의사들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과 달리, 그는 보건의료인 '개개인'과 공통의 이해를 갖는 '집단'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의료계에 대한 자신의 비판이, 그동안 자신의 주변에서 그 누구보다 환자 진료에 열심이었던 훌륭한 의사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양약은 입에 쓰다 했다. 의사와 의대생이 부디 이 책을 읽고, 부당한 체계의 소모품이나 낡은 체계를 수호하는 용병이 아니라 진정한 전문가로서, 환자들의 권리와 보건의료인의 전문성, 자긍심을 동시에 지켜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길 바란다.
백혈병 환자의 세상 구하기
마지막으로, 보건학 연구자로서 나는 이 책이 고맙고도 부럽다. 만일 내가 썼다면, 이 책은 복잡한 도표와 어지러운 숫자들, 혹은 영어 논문 인용 표시가 가득한, 난해하고도 딱딱한 보고서가 되었을 것이다. 예상컨대, 아주 인내심 있는 독자 아니라면 대부분 중간에 읽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쉽지 않은 내용을 이토록 쉽고 생생하게 설명하는 그의 능력이 부럽고, 또 연구자들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있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물론 이른바 업계 '전문가'로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예방 접종의 효용에 대한 문제제기는 저자가 밝혔듯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또 '민영보험'보다는 '사보험'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 비추어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작은 부분이며, 그동안 당연시되던 것, 전문가의 영역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고 토론을 촉발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 책의 미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이 책이 환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장차 환자가 될 수 있는 누구나가 읽어보아야 할 생활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또한 진료 현장에서 일하는 보건의료인들이 보건의료체계의 문제점과 환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읽어보아야 할 마음 불편한 교과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건강권이 온전히 실현되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읽어보아야 할, 진정한 풀뿌리 투쟁의 역사 기록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슬퍼도, 아무리 아파도 눈물이 흐르지 않는 눈을 갖게 된 한 백혈병 환자가 그토록 나누고 싶어 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이 책에 녹아 있다. 자, 당신은 그 사랑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