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논란 속에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실시한 지 1년이 지났다. 지난 2006년 12월부터 시행한 약제비 적정화 방안은 보험 급여 대상 약품을 미리 결정하는 '선별 등재(포지티브리스트)' 방식을 도입해 큰 논란이 되었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제약기업이 적극 이 정책을 반대하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의료계도 양분돼 찬반 논란이 계속됐다. 한편에서는 약제비 적정화 방안이 미흡하다며 외국계 제약기업의 신약의 약값을 더욱더 강력히 통제할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식의 약가 통제 정책으로는 정책의 목적인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아끼는 데 기여할 수 없다는 비판도 나왔다. 약제비 적정화 방안이 도입될 당시 후자 입자에서 강하게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반대해온 이형기 교수가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정책을 평가하는 글을 보내왔다. 이 교수는 기존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환기하면서 "이런 식의 약가 통제 정책은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아끼는 데도, 환자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관료를 위한 정책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이형기 교수의 문제제기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한국이 앞으로 채택해야 할 보건의료 정책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토론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프레시안>은 정부, 의료계에서 반론이 나올 경우 토론을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적극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 |
흔히 사람들은 약가(藥價) 정책이 기업과 정부 사이만의 쟁점인 것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힐난할지도 모르겠다. "의사면 환자나 신경 쓸 일이지, 오지랖 넓게 무슨 약가 정책까지?"
사실 정부가 제대로 기능하고, 의료의 전문성이 존중되는 사회라면, 굳이 의사까지 나서서 약가 정책을 비판할 이유는 많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전제 조건이 거의 충족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지난 10여 년 동안 두 번의 정부를 거치면서 '진보'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차근차근 진행해 온 정부 주도의 의료 체제 구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동안 간헐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비전문가들이 통제를 무기로 우리나라의 보건의료계를 결딴내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성 싶다. 의료계도 의료계지만, 환자들이 고스란히 그 피해를 뒤집어쓰게 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부실한 국민건강보험 재정, 누가 책임질 일인가?
올 해 말이면 정부가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강행한 지 꼭 1년이 된다. 말이 '적정화'지, 사실 이 제도의 골자는 가격 '통제'. 그러나 좋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꼭 필요한 신약을 쓰려고 해도 보험 적용이 거부돼, 주머닛돈을 꺼내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약제비 지출을 줄였지만, 환자가 대신 그 몫을 떠안은 셈이다.
의료계도 마찬가지. 정부가 골라 놓은 약만을 쓰라는 것은 진료권과 전문성에 대한 큰 위협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피해자인 환자와 의료계는 잠잠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문제가 정부와 제약업계만의 쟁점인 것처럼 인식됐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정부는 보험 적용을 해 오던 약까지 손을 댈 심사다. 향후 5년간에 걸쳐 의약품 목록을 정비한다며, 고지혈증치료제와 편두통치료제를 첫 대상으로 선정했다.
부실한 국민건강보험 재정은 약제비 적정화 방안 추진의 근본 이유다. 그러나 정작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은 정부였다. 보험료는 빤한데, '섣달 그믐날 개밥 퍼주듯' 급여를 확대해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 순수하지 못한 정치적 동기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또 있다. 정부는 의약분업 이후, 조제료라는 명목으로 단순 약 전달 행위에 매년 2조 원을 퍼주었다. 제네릭(복제) 의약품이 비싸야 할 이유가 없는데, 어설프게 시장에 개입해 돈을 갖다 내 버린 것도 정부다. 남의 개인 정보나 들추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을 방만하게 운영하느라 혈세를 낭비한 것도 역시 정부였다.
그러더니 이제와 자기가 골라 주는 약만 사용하란다. 환자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곳간 열쇠를 맡겼더니, 어느새 안방을 차지하고, 아예 주인마저 쫓아 낼 형국이 아닌가?
약가 통제 1년…'약값'은 줄었는가
약제비 지출을 줄이겠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약가 통제로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 약가 외에도 여러 요소가 어울려 총 약제비 지출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약가를 통제하면 전체 약제비 지출은 오히려 증가한다는 경험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약가를 스웨덴의 4분의 1로 통제했지만, 1인당 약제비 지출은 3배가 넘었다. 낮은 약가가 약 소비를 부추긴 것이다.
보험 적용 유무를 결정하는 정부의 잣대는 '비용-효과성'이다. 대단하게 들리지만, 실은 일관된 방법론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영국 요크대학 보건경제학센터 드러몬드의 지적이다. "비용-효과 분석을 어떻게 실시하며, 무엇을 넣고 뺄 것인지 합의된 바 없다."
원래 남의 죽을 병보다 내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픈 법이다. 남에게 비용-효과적인 약이 내게도 반드시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 그래서 비용-효과성을 약 선택의 보편타당한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도 약 허가의 최고 기준인 안전성과 유효성을 '상당한 증거'라고 칭한 데 반해, 비용-효과성은 '적당히 신빙성이 있는 증거'라고 했을까?
근원적인 문제가 또 있다. 비용-효과 분석이 과연 우리나라에서 비용-효과적일까? 자료 수집은 물론, 결과를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확보하는 데 큰돈이 든다. 그러나 투자를 정당화할 만큼 비용-효과 분석의 비용-효과성이 입증됐다는 증거를 정부는 한 번도 제시한 적이 없다.
정말 큰 문제는 환자의 건강이 위협을 받게 됐다는 사실. 정부는 "필수약과 대체약이 있기 때문에 진료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정부 주장과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약이 많을수록 환자의 건강이 증대된다는 증거들이 적지 않다(릭텐버그, 2003).
관료 영향력 유지가 진짜 이유 아닌가?
효과가 입증된 바 없고, 방법이 허술하며, 환자의 건강 증진에도 도움이 안 되는 제도를 정부는 왜 굳이 고집하는 것일까? '정부 주도의 보건의료에 목을 맨 정부가 관변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관료적 재량권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비판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한 마디로, 정부가 통제만능주의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조선일보>에 실린 기고문을 읽고 의견을 보내 온 한 독자에 따르면, 실제 상황은 더 심각해 보인다. 즉, "조만간 연금공단으로 통합될 위험이 있는 건강보험공단이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한 필사적 노력으로 약가 결정 기능을 심사평가원에서 가져와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환자의 건강은 어떻게 되든 말든, 선명성 경쟁을 통해 공단이 존폐의 위기를 타개하려고 발버둥 친다는 지적.
망치를 들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 권력이 있으니 통제라는 망치를 휘둘러보고 싶은 속내까지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근거가 부실한 약가 통제 정책을 실험하듯 집행해 국민을 골병들게 만드는 것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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