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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잃은 시대…그래도 울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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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잃은 시대…그래도 울지 않으리"

[화제의 책] 베트남 뒤흔든 <끝없는 벌판>

강수걸 대표한테 전화가 왔다. "베트남 작가 분들이 부산에 오셨는데, 어제는 온천장에서 주무셨고, 좀 있다 범어사로 갈 건데, 오실 수 있겠어요?" 그는 부산의 인문사회과학 출판사 산지니 대표이다. 오전 10시 경이었다. 잠이 덜 깬 채 어중간하게 답을 하니까 강 대표는 인터넷에 접속하여 검색을 해보라고 했다. 구미가 당길 것이라고.

그가 알려준 키워드는 '하재홍'. 베트남의 한 여성작가가 <끝없는 벌판>(응웬옥뜨 지음, 하재홍 옮김, 아시아 펴냄)이란 소설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이 있었고, 책의 한국어판 번역자가 하재홍 씨였다. 강 대표는 '응웬옥뜨'라는 낯선 이름을 잘 알려줄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범어사 대웅전 앞으로 가니 강 대표가 있었고, 그의 아내와 아이가 있고, 하재홍 씨가 있었고, 베트남 여인이 있었다. 응웬옥뜨 씨가 아니었다. 투응웻 시인이었다.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대웅전을 벗어나 매표소 입구로 갔다. 노년과 중년의 남성 둘이 있었다. 찜짱 시인과 쩐루언띤 씨라고 했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려고 절 입구로 미리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쩐루언띤 씨는 <끝없는 벌판>에 삽화를 그린 베트남의 중견 화가였다.

한국과 베트남 문인들이 상호방문 형식의 교류를 한다는 이야기를 오래 전에 들었지만, 이번 방문은, 쩐루언띤 씨가 일행에 포함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끝없는 벌판>의 출간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러니 이번 방문의 주인공은 단연 응웬옥뜨 씨다. 그녀가 뒤늦게 눈에 띄었다. 서른한 살이라고 들었지만, 대학 2학년생쯤의 귀여운 아가씨로 보였다. 우리는 절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호치민 인문과학대 박사과정에 있으며 <한겨레21> 베트남 전문위원이기도 한 하재홍 씨가 통역자가 되어주었다. 대화를 나누고, 반주도 나누었다. 1시간 정도가 지난 후, 우리는 일어났다. 숙소와 집으로 돌아가 각자 알아서 쉰 뒤,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베트남 작가들의 체류기간 동안 여러 모로 신경을 써주었다는 고영직 평론가가 저녁에 부산에 온다는 것이다. 약 2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내일이 출국일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밤을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범어사역 앞에서 강 대표 부부는 자동차를 타고 떠났고, 우리는 전철을 탔다. 하재홍 씨와 베트남 사람들은 숙소가 있는 온천장 역에서 내렸고, 나는 영광도서에 전화를 걸어 책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한 권 남아 있다고 한다. 서면 역에 내려 <끝없는 벌판>을 샀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 약속 시간까지 책을 읽었다.

폭탄 구덩이에 핀 수련꽃

왜 이 소설이 베트남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는 것일까. 어떤 민감한 내용을 다뤘기에 지역 정부의 사상교육위원회에서 '작가 덕목 교육'을 시키겠다고 응웬옥뜨를 소환하기까지 했을까. 당국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벌판>이 베트남에서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베트남작가협회가 '2006년 최고작품상'을 전격적으로 수여한 것을 '사상 투쟁'의 한 표출로 볼 수 있을까. 주인공 '나'가 있고, 남동생 디엔이 있고, 남매의 어머니는 갑자기 사라졌고, 거룻배를 타고 오리떼를 키우는 바람둥이 아버지가 있고, 어느 한 마을에서 남자들에게 쫓기던 창녀를 구출하여 배에 태우고, 여자는 아버지의 잠자리에 들어가고….

저녁 술자리는 온천장의 한 복국집에서 있었다. 술자리 내내 나는 이상한 감동에 빠졌다. 초반부를 읽고 갔을 뿐인 <끝없는 벌판>이 아니라, 찜짱 시인에게 나는 반해버렸다. 1938년생인 그는 일행 중 최고령자였다. 그는 1981년 베트남작가협회 최고작가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베트남시인협회 부주석이었다. 하재홍 씨의 말에 의하면, 한국으로 치면 신경림, 고은 격의 베트남 문단의 원로라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도 검색할 수 있는 찜짱 시인의 '수련꽃'은 2연짜리 단시였다.

이른 아침 뜰에 나가 수련꽃을 땄네
폭탄 구덩이 아래 어머니가 심은 수련
아아, 어디가 아프길래 물밑 바닥부터
잔물결 끝도 없이 일렁이는가

몇 해 지나 폭탄 구덩이 여전히 거기에 있어
야자수 이파리 푸른 물결을 덮고
아아, 우리 누이 살점이던가
수련꽃 오늘 더욱 붉네 ('수련꽃' 전문)


후배의 외유 위해 단식 투쟁 불사한 원로 시인
▲ <끝없는 벌판>(응웬옥뜨 지음, 하재홍 옮김, 아시아 펴냄, 2007). ⓒ프레시안

응웬옥뜨 씨의 <끝없는 벌판>이 베트남 정부의 눈 밖에 난 이유는, 농촌의 궁핍과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낸 때문이었다. 당국은 응웬옥뜨 씨의 한국 방문도 불허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흔 살의 원로 시인은 젊은 작가의 출국을 성사시키기 위해 몇 시간 버스를 타고 가서 4일 동안 단식 투쟁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찜짱 시인의 중요한 한 이력은 또 이렇다. 베트남 해방 전쟁 어느 때, 찜짱 시인이 속한 부대는 미군에 의해 궤멸될 위기에 처했고, 부대장은 전투원 중 셋을 뽑아 '당신들은 우리가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마지막에 이르렀는지를 기록해 달라'고 했다. 선택된 그 3명 중 한 사람이 젊은 찜짱 시인이었다는 것이다. 남은 부대원들은 전황의 어느 국면에서 모조리 전사했다는 이야기….

지금은 한국의 대도시 한 복집에 앉아 멋스럽게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찜짱 시인이지만, 베트남 근·현대사의 산 증인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연로한 시인은 38년 연하의 젊은 여성작가가 쓴 <끝없는 벌판>을 어떻게 옹호하고 있는가. 책의 날개에 몇 말씀이 적혀 있다. "베트남 사회는 응웬옥뜨와 같은 '용감한' 작가를 기다려왔다. 전쟁 때는 전장으로 달려가는 작가가 용감한 작가였지만, 오늘날엔 사회의 그늘진 구석으로 달려가는 작가가 용감한 작가다. 희망에 대한 기약이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는 것이라면, 그것은 위선이다.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 것, 그것이 오히려 <끝없는 벌판>의 큰 미덕이다."

우리는 복국집의 긴 탁자에 섞여 앉아 있었다. 하재홍 씨를 통해 전달되는 말들은 단순할수록 좋았다. "베트남 말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쉬운데, 우리말을 베트남 말로 옮기는 것이 어렵다"라고 하재홍 씨는 말하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함께 꽃피는 이 시공간을 일러 고영직 평론가는 "다른 공기의 희열"이라고 했다. 떨어져 앉은 나는 그의 말을 '다른 공기의 히어링(Hearing)'으로 들었다. 또 누구는 '힐링(Healing)'으로 들었다. 모두 그럴싸했다. 서로를 배려하는 우리의 말들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했다. 하재홍 씨를 통하기 전 그들의 원음이 복집의 공기를 떨게 하며 귀에 들려올 때, 내 마음은 벌써 신비로웠다. 술잔이 계속 오가고, 내 옆에 앉은 찜짱 시인이 나는 다시 믿기지 않았다. 역사의 세월이 언제 이렇게 흘러가버렸는가. 베트남과 한국, 한때 서로 총을 쏘고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하였던 참으로 끔찍한 인연이 아니었던가. 이런 온화한 시간에 함께 있게 될 줄을 그때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한국 문단과 달라도 너무 다른 베트남 문단
▲ <끝없는 벌판>으로 베트남을 발칵 뒤집은 응웬옥뜨(31). ⓒ연합뉴스

질문은 어쨌든 응웬옥뜨 씨의 <끝없는 벌판>을 향해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새 내가 술에 꽤 취했기 때문이다.

- 응웬옥뜨 씨, 쩐 루언 띤 선생님이 당신의 책에 삽화를 그려주셨는데, 그림들은 어땠나요?

"저는 쩐 루언 띤 선생님이 그림을 그려주셔서 감사했고, 그림은 볼 만했습니다."

볼 만했다, 당돌한 말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 쩐루언 띤 선생님, 그림을 그리시며 중점을 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응웬옥뜨 씨의 작품을 흥미롭게 읽었고, 평소에도 그녀의 글을 좋아했지만, 그림은 응웬옥뜨 씨를 위해 그린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을 읽을 한국 독자들을 위해 그린 것입니다."

- 찜짱 선생님, 응웬옥뜨 씨는 아직 너무 젊습니다. 인생은 깁니다. 이 젊은 작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으로 어떻게 해라, 이런저런 문제를 다뤄달라, 나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응웬옥뜨 씨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응웬옥뜨 씨의 길이고, 그녀가 선택할 것입니다."

원로 문인이 젊은 작가의 미래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할 때, 나는 놀랐다.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될 때, 누구든 그 대상을 두고 찜짱 시인과 같이 말하리라. 베트남 문단에서 선시풍의 서정시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투응웻 시인은 술자리 내내 조용했다. 술잔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그녀의 단아한 표정과 조용한 몸가짐은 내 마음을 그윽하게 했다.

-응웬옥뜨 씨, 투응웻 시인과는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입니까. 투응웻 시인의 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언니와는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고, 언니의 시를 좋아하고 즐겨 읽습니다. 저는 언니 시의 약점마저도 사랑합니다."

'약점마저 사랑한다'는 말에 나는 놀랐다. 응웬옥뜨 씨의 한국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원로 시인이 단식 투쟁까지 했다는 것에서도 짐작했지만, 그날 내내 내가 감동한 것은, 베트남 작가들이 서로 얼마나 의지하고 신뢰하고 아끼고 있는가였다. 비록 네 명의 시인, 화가, 작가들이었지만, 나는 '문단'이 과연 어때야 하는지, 그 원형을 본 것 같았다.

다시 말하지만, '응웬옥뜨 씨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히 말할 수 없다'와 '시의 약점마저 사랑한다'는 말이 압권이다. 작가들 사이에 판매 경쟁, 인정 투쟁이 앞서는 한국 문단의 상업적이고 살벌한 분위기는 문단의 타락이다. 자정이 넘어 술자리를 마치고 헤어질 때, 찜짱 시인은 '우리가 제 흥에 겨워 말을 함부로 하였든지 행동에 실수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달라'고 말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해야 할 말이었다.

베트남 민중의 자기 치유

이튿날 그들은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그들과 잠시 어울렸던 것이 꿈만 같다. 응웬옥뜨는 술자리에서 내가 내민 <끝없는 벌판>의 속지에 서명과 함께 베트남 말로 몇 자를 적었다. '모나미153' 볼펜으로 쓴 그녀의 글씨를 다시 보고, <끝없는 벌판>을 마저 읽는다. 하재홍 씨는 탄식했었다. "왜 같은 사회주의 국가면서 북한에서는 <끝없는 벌판>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론을 전혀 괘념치 않는 것", "소설가이면서도 시적인 감성으로 소설을 쓰는 것", "1인칭 서술이면서도 전지적 시점을" 쓰는 식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 "문학이론이 어떻든 남들이 뭐라 하든 응웬옥뜨는 그저 자신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을 뿐" 등등 '역자 후기'에 적은 하재홍 씨의 평에 나도 동의한다. 엄마 잃은 남매는 오리떼마저 하루 아침에 잃는다. 바람결에 실려 온 조류독감이 강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다. 처참한 삶이 끝없다. 그렇지만 참 신기한 일이다. 응웬옥뜨 씨의 문장은 위트를 잃지 않았다. 정말 위트인가. 유머인가. 해학인가. 뭐라 불러야 하나. 말할 수 없는 비장함 속에서도 문장 곳곳에서 응웬옥뜨는 미소를 짓고 있다.

250매 내외 중편소설 분량인데, 장편소설을 읽은 기분이다. 얇은 책이지만, 묵직하다. 소설은 '나'가 집단 강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강간 후, 1인칭 '나'는 '녀석'으로, '딸'로 제3자화되어 불린다. 녀석은 말한다. "제가 아이를 밴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버지." 아이를 뱄다는 몸속의 '작지만 분명한 느낌'을 알고 그녀는 다짐한다.

"그래, 아이 이름은 반드시 뜨엉이나 녀, 또는 지우, 혹은 쑤엔, 흐엉…, 으로 지어야지. 아빠 없는 아이지만 반드시 학교를 다니게 할 거야. 아이가 한평생 즐겁고 생기발랄하게 살 수 있도록 보살펴줘야지. 엄마의 가르침으로, 때때로 어른들의 잘못도 용서할 줄 아는, 속 깊은 아이로 키워볼 거야."

소설의 맨 마지막 단락에서 나는 입이 벌어졌다. 그만 몸을 망쳐버렸다는 식의 감정은 한 꼬투리도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의 기적은, 이 마지막 다짐이 혁명적 낭만주의라거나 자포자기식의 패배주의나 종교적이고 일방적인 포용 혹은 깨달음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미소의 말들이었다. 나는 이 마지막 말들의 설득력을 작가 응웬옥뜨 씨의 천재적인 생명력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참혹한 삶의 최악, 최하의 자리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은 전쟁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사회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베트남 민중이 서럽고도 뜨거운 자기 치유를 해내고 있다는 확신으로 다가왔다.

베트남에서도 특히 가난과 결핍이 지심한 메콩강 일대가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라고 한다. 하재홍 씨에 의하면, 지금도 하루 50여 명의 메콩 강 여성들이 한국인 신랑을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이 베트남 농촌과 신부들을 이해하는 밑거름으로, 그들에게 행복을 다짐하는 신랑님들의 새끼손가락"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역자 후기'에서 말했다.

"약이 환자를 찾아가듯, 응웬옥뜨의 소설이 꼭 읽어야 할 사람에게 펼쳐졌으면 한다. 응웬옥뜨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소에 반하게 될 것이다."
이 서평을 본 하재홍 씨가 김곰치 씨를 통해 "서평에 잘 못 전달된 내용이 있다"며 두 가지 지적을 해왔다. 김곰치 씨와 상의한 끝에 글을 수정하기보다는 뒤에 덧붙여 하재홍 씨의 지적을 독자에게 전한다. <편집자>

"첫째, 찜 짱 시인이 베트남 해방전쟁 중 '북부'에 불려가는 과정은 한 단위부대 정도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베트남 공산당 중앙당의 선전교육위원회 위원장 또후(To Huu) 시인이 국가적 차원에서 남베트남 지역 전체를 통틀어 세 명의 작가를 불러올린 것입니다. 찜짱(Chim Trang), 지앙남(Giang Nam), 비엔프엉(Vien Phuong)이었습니다. 이유는 '호치민 작전(1975년 3월 4일부터 4월 30일까지 치러진 마지막 작전)' 와중에 뛰어난 예술가들의 희생이 너무 많았기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살아남아 전쟁을 증언해야 할 작가 3명을 선별한 것입니다. 찜짱 시인은 전쟁이 완전히 끝난 후 8일 뒤에야 사이공에 돌아오실 수 있었습니다.

둘째, 찜 짱 시인이 단식 투쟁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일흔 연세에 단식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지요. 세 차례 걸쳐 까마우에 가셨는데(버스로 9시간 거리), 그 중 한번은 저와 함께 갔었고, 두번째는 혼자 가셨었고, 마지막 세 번째는 여권이 나오는 주에 젊은 작가(Nguyen Trong Tin) 한명을 '술상무' 격으로 대동해서 갔었습니다. 물론 세번째 가셨을 때가 가장 압권이었지요. '농성하듯' 나흘간 머무르면서 지역 관료들과 술자리를 함께 했는데, 찜짱 시인은 해저물녘에 자리에서 빠지셨고 나머지 시간을 젊은 작가에게 맡겼지요. 나흘째 밤이 되던 날 그 작가가 응급실에 실려가는 사태가 벌어졌지요. 술 때문에 쓰러진 것이기에 다음날 회복이 되었구요. 이런 노고 덕분에 출국 일주일을 앞두고 응웬옥뜨의 여권이 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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