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 판매되는 컵라면…환경호르몬 안전지대 아니다
15일 <프레시안>이 시중에 널리 유통되는 컵라면 12종의 용기를 확인한 결과, 모두 국내에서 공신력을 인정받는 친환경 인증인 환경마크를 받지 못했다. 이번에 확인한 컵라면은 농심(6종), 삼양식품(4종), 오뚜기(1종), 한국야쿠르트(1종) 등 시중에서 판매되는 컵라면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환경마크를 받으려면 용기가 자연 상태에서 180일 안에 90% 이상이 미생물에 의해 분해돼야 한다. 현재 50곳 업체에서 생산한 134개 용기가 이런 기준을 만족해 환경마크 인증을 받았다. 그러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연간 약 10억 개를 소비하는 컵라면 용기는 단 하나도 환경마크 인증을 받지 못했다.
더구나 이런 컵라면 용기는 대개 환경호르몬 논란을 피해갈 수 없는 폴리스티렌, 폴리에틸렌과 같은 플라스틱 용기이다. 실제로 2003년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컵라면 10종의 내용물에 끊는 물을 붓고 5~30분간 방치했더니, 20분 후부터 용기에서 스티렌다이머와 같은 환경호르몬 의심 물질이 나왔었다.
이런 일을 겪고도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컵라면 용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 확인한 12종을 직접 끓는 물이 닿는 내면 기준으로 살펴본 결과, 폴리스티렌 4종, 폴리에틸렌 8종이었다. 업체별로 살펴보면 농심은 폴리스티렌 3종·폴리에틸렌 3종, 삼양식품은 폴리에틸렌 4종, 오뚜기는 폴리에틸렌 1종, 한국야쿠르트는 폴리스티렌 1종이었다.
물 닿는 부분엔 플라스틱 써놓고 친환경?
그러나 이런 상황인데도 일부 업체의 컵라면 용기 상단 포장지에는 버젓이 '친환경 전분 용기 사용'이라고 인쇄돼 있다. 환경마크와 같은 친환경 인증도 없는 데다 끓는 물이 닿지 않는 겉 부분만 전분용기로 사용해 놓고서 마치 용기 전체가 전분용기인 것처럼 홍보를 한 것이다. 12종 중 1종(농심)이 바로 이렇게 소비자의 착각을 유도하도록 홍보하고 있었다.
다른 3종(농심 2종, 오뚜기 1종)은 라면 용기를 종이로 만들었다고 써 놓았으나 실제로 끓는 물이 닿는 부분은 폴리에틸렌으로 다른 용기와 큰 차이가 없었다. 시중에 종이, 전분 등으로 용기를 만들었다고 홍보하는 컵라면도 실제로 끓는 물이 닿는 내면이 플라스틱 재질인 것은 다른 컵라면과 다르지 않다.
물론 내·외면 모두 폴리스티렌(스티로폼)으로 용기를 만들었던 상황에서 바깥 부분이라도 종이, 전분처럼 쉽게 분해되는 재질로 바꾸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식약청 관계자는 "환경마크 인증도 받지 못한 용기를 놓고 '친환경 전분 용기 사용'이라고 홍보해 소비자의 착각을 유도했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더구나 상당수 소비자가 전자레인지에 컵라면을 조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런 홍보는 더욱더 위험하다. 식약청 관계자는 "컵라면의 폴리스티렌, 폴리에틸렌 용기에서 환경호르몬이 용출돼 인체에 영향을 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단, 끓는 물을 붓고 3~4분 기다린 다음 10분 안에 섭취할 때의 얘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별 생각 없이 전자레인지에서 컵라면을 조리할 경우, 2003년 식약청의 실험처럼 환경호르몬 의심 물질이 용출될 수도 있다. 라면업계가 '전자레인지 조리 불구'라는 문구를 용기에 인쇄해둔 것도 이런 만약의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식품안전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전자레인지에서 컵라면을 조리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친환경 라면 용기, 손 놓은 라면업계
이렇게 컵라면에서 환경호르몬이 용출될지 모르는 플라스틱 재질을 제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종이, 전분이 물에 약한 탓이다. 실제로 시중에 유통되는 종이 용기, 전분 용기 내면에 코팅한 폴리에틸렌을 제거하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용기는 금방 녹아내린다. 환경호르몬 논란이 높아지는 데도 라면업계가 폴리에틸렌 코팅을 없애지 못하는 사정이 짐작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컵라면 용기는 내수성, 내구성, 내열성이 있어야 한다"며 "종이 용기는 내수성, 내구성, 내열성 면에서 모두 미흡한 반면에 전분 용기는 내구성, 내열성을 갖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분 용기도 내수성이 없어서 안쪽에 폴리에틸렌을 코팅하지 않고서 그 자체로 컵라면 용기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또 있다. 폴리스티렌 용기는 개당 40~50원에 불과하지만 전분 용기는 개당 130~150원이다. 컵라면에서 용기 단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40~50원에서 130~150원으로 3~4배 가까이 뛰는 것이다. 국내 라면업계가 전분 용기를 개발해 놓고도 내면에 폴리에틸렌을 코팅한 전분 용기를 대량 생산하지 못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라면업계 매출이 가장 많은 농심이 의욕적으로 전분 용기 확대·보급 계획을 세웠으나 수년째 제자리걸음 상태다. 전분 용기가 농심의 컵라면 용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 미만이다. 농심이 이런 상황이니 다른 라면업체의 사정은 뻔하다. 이번에 확인한 12종 중 전분 용기가 단 1종뿐인 것은 단적인 예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라면업계가 지불하는 환경 부담금도 계속 늘고 있다. 현재 라면업체는 폴리스티렌, 폴리에틸렌 용기 1킬로그램(㎏)당 327원의 환경 부담금을 낸다. 소비자가 내는 컵라면 가격에 이 환경 부담금도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환경호르몬 의심 물질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큰 컵라면을 환경 부담금까지 지불하고 사먹는 셈이다.
연간 100억 개 컵라면 용기 시장, 그냥 내버려 두려나?
만약 국내 라면업체가 환경에 부담을 덜 주면서 인체에 무해한 컵라면 용기를 개발한다면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나다. 개별 기업 입장에서는 환경 부담금이 크게 줄어서 직접적 이득이 된다. 당장 환경,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소비자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으니 중·장기적인 기업 가치도 제고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환경호르몬 의심 물질 걱정할 필요 없이 라면을 먹을 수 있으니 좋다. 기업이 환경 부담금 비용이 줄면서 컵라면 가격 인상 요인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도 소비자에게는 이득이다. 중·장기적으로는 매년 약 10억 개나 되는 환경에 부담을 주는 용기 쓰레기가 줄어들면서 미래 세대에게도 이득이 된다.
더 나아가 이렇게 개발한 컵라면 용기가 갈수록 환경, 건강 기준이 높아지는 전 세계 시장에서 연간 약 100억 개가 생산되는 컵라면의 용기를 대체하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중국에서 컵라면 소비가 갈수록 늘어나고 국내에서 라면 소비가 다소 줄어드는 시장 상황을 염두에 두면 라면업계의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컵라면 용기 개발은 시급한 일이다.
그러나 정작 라면업계는 라면 파는 데만 여전히 관심을 두는 듯하다. 컵라면 안심하고 먹는 날은 언제쯤 올까? 과연 불안한 라면, 소비자가 계속 찾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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