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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문제 해법 없이 대통령 꿈꾸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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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문제 해법 없이 대통령 꿈꾸지 말라"

박명준의 '유럽에서의 사색'〈24> "비정규직 문제 해결 위한 사회협약 마련해야"

최근 노동자들이 장기간의 고용안정을 누리는 집단(정규직)과 그렇지 못한 집단(비정규직)으로 나뉘고, 후자에 속하는 인구가 점점 늘고 있다.

이미 후자에 속한 집단이 급속도로 대량화돼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한국에 비하면, 유럽은 그 증가 추세가 상대적으로 점진적이며, 아직은 심각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근래 많은 노사관계 전문가를 비롯한 언론, 정계는 노동시장의 비정규화가 초래할 '사회적 위험(social risk)'을 깊이 우려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같은 비정규직, 현실은 나라마다 천지 차이

비정규직 규제와 관련한 쟁점은 대체로 두 가지다. 첫째, 정규직과 비교했을 때 열등한 '사회적 시민권(social citizenship)'을 누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 있는 비정규직에게 '사회적 안전성(social security)'의 혜택을 어느 정도로 부여할 것인가? 둘째, 기존에 작동하는 노사관계 안에 비정규직의 고용 조건을 결정하는 원리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사실 노동시장의 비정규화가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라지만, 각국 노동시장 제도의 특성, 노사정 간의 상호 작용의 양상 등에 따라 비정규직 규제 수준은 아주 다양하다. 보통 비정규직을 '취약 고용(precarious employmen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비정규직이라도 그 취약성이 동일하지 않다.

독일에서는 2~3년의 계약 노동자도 일단 고용관계가 성립되면 실업, 연금 등의 공적 사회보험의 혜택을 정규직과 별 차이 없이 누린다. 실업자, 비정규직도 노동조합 가입이 가능하며 그들의 임금은 단체교섭 결과의 적용을 받는다. 파견 노동자도 독일노총(DGB)과 파견업체 대표 간에 단체협약을 체결해 임금 수준, 노동 조건을 함께 결정한다.

반면 한국에서의 비정규직은 곧바로 극히 취약한 고용 관계에 노출된다. 노동자는 고용 안정성의 상실에 더해 사회적 안정성까지 상실당한 상태에 처한다. 조직화를 통해 자신의 노동 기본권을 집단적으로 대변하고 방어할 수 있는 권리까지 박탈당한 상태다. 한마디로 21세기의 프롤레타리아, 문명 세계의 비참한 신인류다.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런 상태가 세계에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을 뿐이지, 만일 그 실상이 그대로 소개된다면, 아마도 모든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하나같이 한국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는 저렇게 되지는 말자"고 혀를 찰 것이다. 이번 이랜드 사태를 지켜보면서 국제 노동단체의 주요 관계자가 하나같이 "이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라.

이번 이랜드 사태는 단순히 악덕한 개별자본과 힘없는 개별노동 간의 대립이라는 협소한 시각으로 바라볼 문제는 아니다. 이 사태는 현 정부 내내 지난한 진통을 겪으며 겨우 입법화를 이룬 이른바 '노사관계 로드맵'의 내용이, 실상 '보호'를 명분으로 한 번지르르한 입법 취지와 달리 현실적으로 상당한 허점을 지니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이다.

비정규직도 2년 후에 반드시 정규직화해야 한다는 규정은 2년이 되기 전에 마음껏 해고의 자유를 누리는 사용자들의 해고 남용을 제어할 수단이 없고서는, 비정규직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고용 시작 단계에서 '시한부 선고'를 내리는 것에 불과하다. 입법 과정에서 이런 경고가 계속 나왔으나 모르쇠로 일관한 정부는 뒤늦게 허둥대는 꼴이다.

비정규직 해결할 대선 후보, 당신은 찾았나?

물론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체교섭과 사회보험의 시스템을 적절히 재구축한다면, 당장 비정규직을 철폐하지 않더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현격한 사회적 시민권의 격차를 최소화시켜 비정규직을 '21세기형 프롤레타리아', '절대 불안정'의 비참한 상태에서 구해내는 길은 존재할 것이다.

이른바 덴마크 노동시장의 모델로 잘 알려진 신조어 '유연안정성(flexicurity)' 개념은 바로 노동시장에서 안정성을 희생하지 않고도 유연성이 작동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현재 유럽의 여러 나라는 덴마크에 시선을 모으면서 앞 다퉈 자기 나라식의 유연안정성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 고민하고, 대체로 노동계도 이를 현실적 대안으로 수용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 '한국형 유연안정성' 모델의 창출은 절박한 과제다. 이미 사업장별로 비정규직에 안전성의 요소를 가미하는 창의적이고 건강한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일부에 불과하다. 문제의 해결에 제도상의 결함이 있다면, 결국 총자본과 총노동의 문제 틀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당장의 기업 단위 교섭을 통한 미봉책 마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후속 입법을 통한 제도적 보완책 마련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번 사태 앞에서 국가 수준의 노사관계, 즉 노사정 대화 채널이 전혀 힘을 지니고 있지 못한 모습이 특히 안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일 노사대표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서 공동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 사회적 대화를 재개한다면 매우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나아가 새로운 제도적 기제가 마련되기 전까지 사용자들이 해고를 자제토록 하고, 그런 사용자들을 정부가 후원하며, 정규직 노동자들이 기금을 마련하여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에 쓰이도록 하는 내용의 사회협약이 체결되어 지켜진다면, 이번 사태야말로 단순히 위기와 파국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노사관계의 체질 개선을 위한 획기적인 전기가 될 수도 있다.

대선정국을 맞이한 정치권에 역할이 있다면, 이런 비전을 갖고 여러 세력 간에 소통의 물꼬가 트이도록 견인차가 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국민이 원하는 미래형 지도자는 이번 사태를 맞이하여 단순히 액티비즘(activism, 행동주의)과 포퓰리즘(populism)의 상징정치에 머물거나, 사태를 강 건너 일처럼 대하며 어느 일방만을 비난하는 논평주의(criticism)를 즐기는 행태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는 제도적 상상력의 지혜와 더불어 융화력을 겸비하고, 사태해결의 중심에 나서는 용기와 함께 당사자들을 움직이도록 하는 감화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일 것이다. 당신은 그런 인물을 발견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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