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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불타는 인내'의 시간은 과연 끝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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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불타는 인내'의 시간은 과연 끝났는가?"

[화제의 책] <혁명을 꿈꾼 시대>

최근 나온 <혁명을 꿈꾼 시대>(장석준 지음, 살림 펴냄)는 절대로 지하철에서 읽어서는 안 될 책이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져 주변 사람 보기에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기 십상이다. 헬렌 켈러, 레온 트로츠키, 모한다스 간디, 파블로 네루다, 로자 룩셈부르크 등 이름만 열거해도 '하품'이 나오는 이들의 연설을 모은 책인데도 그렇다.

이 책은 20세기에 한 획을 그은 스물세 사람의 연설을 모았다. 이들은 전쟁, 자본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남성 중심 사회, 자본의 세계화를 극복하기 위해 말 그대로 '온몸'으로 20세기를 살았던 이들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흘리는 눈물은 이들의 삶 또는 연설의 내용 탓이 아니다. 바로 그 연설을 듣고 있었을 그 때 그 사람들 때문이다.

"연설의 문구들 사이에 연설자보다 더 강렬한 잔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사실 그 현장에서 함께 가쁜 숨을 내쉬며 타오르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대중이다. 연설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그들의 박수소리(또는 야유)가 숨어 있다. 그리고 연설이 끝난 뒤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의례적인 기념사처럼, 지루한 낭독이 끝나면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전 모습 그대로 굴러갔을까? 아니다. 거기에는 말로는 온전히 옮기기 힘든 어떤 결단이, 행위가,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다. 누가? 그 대중들, 바로 우리와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순간들을 탄생시켰다. 그 순간들이 20세기를 그마나 조금이라도 낫게, 사람이 살 만한 세월로 만들었다."


20세기 벽두부터 울린 반전의 목소리

▲ <혁명을 꿈꾼 시대>(장석준 지음, 살림 펴냄) ⓒ프레시안
그렇다. 1915년 12월 19일 뉴욕 워싱턴어빙 고등학교 강당에서는 반전 강연회가 열렸다. 연사는 당대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자라고? 그렇다. 그는 1909년부터 미국 사회당 당원이었고, 당 안에서도 혁명적 좌파에 속했다. 강당을 가득 메운 이들을 향해 반전을 촉구하는 그의 연설에서도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노동자가 전쟁에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노동자들이 전쟁을 통해 온갖 비극과 참상을 겪을 때, 지배자들은 그 보상을 가로챕니다. 전쟁을 핑계로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은 억제되거나 줄기 십상이고, 노동 강도 역시 더 세지기 마련입니다. 그에 따라 가정생활도 그 평안함을 위협받게 될 것입니다.

(…) 만약에 민주 국가들이 전쟁 대비에 실패해서 '세계 제국'이 등장하게 된다 할지라도 노동자들은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보다 더 잔악하게 임금을 삭감하고 억압할 수 있는 정복자는 없습니다. 노동자는 사슬 밖에는 잃을 게 없으며, 얻을 것은 세상입니다."


이런 헬렌 켈러의 외침에도 전쟁을 멈출 수 없었다. 20세기 전반기의 양차 세계대전은 결국 인류 전체를 절멸할 수 있는 원자폭탄, 수소폭탄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공포의 시기에도 헬렌 켈러의 목소리를 잇는 행동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비록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2003년 전 세계에 울려 퍼진 이라크 전쟁 반대의 목소리도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아옌데에서 차베스로 이어지는 사회주의를 향한 꿈

이 책에서 가장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부분은 1973년 9월 11일 오전 9시 10분, 당시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국민을 상대로 라디오를 통해 한 연설이다. 탱크가 대통령궁을 에워싸고 폭격기가 폭탄을 퍼붓는 가운데 아옌데는 "결코 사임하지 않겠다"며 쿠데타를 일으킨 군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을 약속했다.

"지금이 분명 여러분께 연설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입니다. (…) 이 역사적 갈림길에서 저는 민중의 충성에 제 생명으로 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께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수천, 수만 칠레인들의 소중한 양심에 심어 놓은 씨앗들은 일격에 베어 쓰러뜨릴 수 있는 게 아님을 확신하다고.

(…) 이 나라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그 운명을 믿습니다. 반역자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이 암울하고 가혹한 순간을 딛고 일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전진할 겁니다. 이걸 잊지 마십시오. 자유로운 인간이 활보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크나큰 길을 열어젖힐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게 저의 마지막 말입니다. 저는 제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합니다. 결국에는 제가 대역죄인과 비겁자 그리고 반역자를 심판할 도덕적 교훈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카스트로가 선물한 기관총을 들고 경호원과 함께 쿠데타군에 맞서 싸우다 숨졌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쓰고 사회주의 칠레를 지키고자 했던 아옌데와 그의 동지는 남아메리카의 변화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 21세기에 사회주의 베네수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우고 차베스는 그 좋은 예다.

다시 '불타는 인내'의 시간을 감내하자

아옌데가 숨진 지 며칠 뒤인 9월 27일 파블로 네루다도 병석에서 숨을 거뒀다. 아옌데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한 지 3년, "버림받고" "억눌려 온" 세계의 언어를 대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지 2년 만이었다. 쿠데타 군의 감시 속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 행렬에서 쿠데타 이후 칠레에서는 처음으로 '인터내셔널'이 합창됐다.

네루다는 1971년 12월 13일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랭보의 시구("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찬란한 도시로 입성하리라")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칠레의 미래를, 사회주의의 미래를, 인간해방의 미래를 예고했다. 6월 항쟁 20년을 맞는 지금 우리의 '불타는 인내'의 시간은 지났을까? 이 책은 "아니다"고 외치며 다시 꿈꾸기를 촉구한다.

"저는 우리 모두의 미래가 랭보의 방금 시구에 표현된 대로라는 것을 선의의 사람들, 노동자들, 시인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오직 불타는 인내를 통해서만 우리는 온 인류에게 빛과 정의, 존엄성을 부여할 찬란한 도시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노래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의 20세기 현대사에서 '운동권'은 항상 훌륭한 저술가를 잉태하는 공간이었다. 신영복, 김지하, 황석영, 황광우, 이진경 등, 이름을 대려면 끝이 없다. 스물 세 사람의 연설을 통해 20세기 역사를 복원한 <혁명을 꿈꾼 시대>를 다 읽고 난 독자라면 누구나 새로운 '스타' 필자의 탄생을 예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국장 장석준은 이미 민주노동당의 이론가로 널리 알려진 이다. 그의 필명은 꽤 오래된 것이어서 이미 사회학을 공부하던 학생 시절부터 날카로운 분석과 정확한 문장의 글을 써 큰 주목을 받았다. 장석준이 1997년 동료와 함께 쓴 '대학사회의 위기와 학생운동의 진로'(<경제와사회>, 제33권)는 격렬한 논쟁을 부르기도 했다.

그는 이미 <세계를 바꾸는 파업>(공저, 이후 펴냄, 2001), <레즈를 위하여>(공저, 실천문학사, 2003)와 같은 관점이 확실한 책을 펴내왔다. 그는 첫 단독 저서인 <혁명을 꿈꾼 시대>로 본격적으로 '운동권' 저술가 대열에 이름을 끼게 됐다. <레즈를 위하여>는 그가 시대를 풍미했던 선배 '운동권' 저술가 황광우와 같이 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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