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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의 '콜라캔 손잡이'가 보기싫을 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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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의 '콜라캔 손잡이'가 보기싫을 땐?

[화제의 책] 홍기빈의 <소유는 춤춘다>

서울시 지하철 2호선 손잡이에 모 음료회사의 콜라 캔이 달렸다. "언젠가는 이 손잡이마저도 광고 공간으로 활용되는 날이 오겠지"라고 늘 상상해 왔지만, 막상 두 눈으로 보니까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손잡이에 콜라 캔을 단 지하철의 수가 무려 30대라고 한다.

그런데 궁금하다.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1000원(900원에서 반올림)의 이용료를 지불한다. 그러면 '한시적으로 지하철 서비스를 구매한 소유자'로서 나는 어떤 권리를 얼마만큼 행사할 수 있는 걸까? 역사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다시 역사를 나올 때까지 안전하게 공간을 이동할 권리?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취객을 지하철 직원에게 처리해 달라고 요청할 권리? 심지어는, 보기 싫은 콜라 캔 광고를 내 눈 앞에서만큼은 치워달라고 요구할 권리?

고작 1000원을 내놓고서 '지하철 서비스에 대한 소유권'을 운운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같은 1000원으로 콩나물을 사면, 그 콩나물로 나물을 무치든, 꽃꽂이를 하든, 그냥 내다 버리든 내 맘대로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다. 간단하다. 또 PC방에서 같은 1000원을 지불하면 적어도 1시간은 내 맘대로 컴퓨터 한 대와 그 컴퓨터가 놓인 공간과 그 컴퓨터가 연결된 인터넷을 '배타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지하철보다는 간단하지만 콩나물보다는 복잡하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내 소유인가?

이번에는, 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특별시 메트로(이하 지하철공사)'로 눈을 돌려보자. 지하철공사는 누구의 소유인가? 물론 지하철공사는 법적으로 서울시의 것이므로 '공공의 소유'다. 그런데 공공의 소유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꼬박꼬박 지방세를 내는 서울시민인 나 자신이 바로 그 공공을 구성하는 일부분이 아닌가?
▲ <소유는 춤춘다>(홍기빈 지음, 김인하 그림, 책세상 펴냄, 2007). ⓒ프레시안

<프레시안>의 경제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는 홍기빈 씨가 최근 발간한 책 <소유는 춤춘다>(책세상 펴냄, 2007)는 바로 이런 우문 같은 질문들을 본격적으로 파고든다.

우리는 '(공공이나 국가의) 공적 소유'와 '(민간이나 개인의) 사적 소유'와 같은 이분법적 논리로 세상의 소유 제도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렇게 현실에서는 소유의 개념이 불분명한 상황이 빈번히 발생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소유라는 개념이 △소유하는 주체 △소유하는 대상 △소유 대상을 둘러싼 타인들의 접근 △소유자, 소유 대상, 타인들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 등 4가지의 요소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실상 소유의 개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무한 개의 조합으로 달라질 수 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저자는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해, 17세기 영국과 18세기 프랑스를 지나, 20세기 미국까지 시공을 오간다. 이 와중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로크, 루소 등 고대와 근대의 명망 있는 철학자들은 물론이고, 마르크스와 베블런과 레너와 같은 '좌편향'된 사상가들도 불쑥불쑥 등장한다.

결론은, 이 책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소유의 개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춤을 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21세기 대한민국은 '사적 소유'만이 '참된 소유'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움직여 간다. 가령, 지적재산권(IPR)의 강화나 투자자-국가 소송제(ISD)의 도입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는 이들이 그렇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미 지난 세기 동구권의 공산혁명을 통해 이런 이분법의 폐해를 경험한 바 있다.

"지적 재산, 기업 경영, 국가의 법적 행정 정치 등의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복합적이기 짝이 없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와 측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경우 모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소유 제도의 네 가지 상이한 구성 요소들을 하나하나 고려하는 대신 '배타적 사적 소유의 신성함'이라는 하나의 원칙만으로 상황을 풀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한 복잡한 전후 사정을 살피지 않고 절대적 국가 소유의 원칙 하나로 덤벼들었다가 무수한 비효율과 정치적 불평등, 심지어 계급적 착취라는 모순까지 나타난 것이 20세기 공산주의 혁명의 실험이라 하겠다. 역사의 여신은 정말로 얄궂다. 이제 그 정반대의 방향으로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듯 보이니 말이다."

이 책을 쓴 홍기빈 씨의 목적의식은 분명해 보인다. "21세기의 지구적 변화라는 도전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소유 제도에 대한 논의와 사고의 지평을 '사적 소유냐 공적 소유냐'라는 협소한 이분법에 갇히지 않도록"하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은 인간 문명의 기술적 조건이 또 한 번 크게 변하고 있어, 많은 이들이 '3차 산업혁명'과 같은 말을 입에 올리고 있다. 이는 어쩌면 19세기 초와 20세기 중반 같은 거대한 규모의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 임박했음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듯 거대한 도전 앞에서 준비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여러 사회적 제도의형식이 최대한 탄력적으로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게 사회 체제와 사회사상을 열어놓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은 '청소년 권장도서'로 나왔지만, 그 내용이 묵직하고도 깊이가 있어 성인이면 누구나 읽어봄직하다. 사실, 요새는 성인용 도서보다는 입시를 위한 청소년용 도서의 수준이 '훨씬' 높은 것 같다. 게다가 청소년용인만큼 적절한 삽화와 예시가 들어가 읽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는 지갑 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 땅의 부모들을 의식해선지 가격(1만1000원)이 만만치 않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이 책의 '사적 소유'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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