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타결 후 발표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서 제약산업이 피해산업으로 지목되긴 했지만, 보건복지부는 4월 12일과 19일 국회 보고에서 제약산업에서 연평균 570억~1000억 원의 매출감소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이 큰 우려를 보여 왔던 건강보험 재정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도 반복됐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약제비 통제 시스템을 운영하는 호주마저도 미국과 FTA를 체결한 후 다국적 제약기업의 에버그리닝(Evergreening, 특허보호를 강화해 독점기간을 연장하는 전략)으로 인해 약제비가 증가될 것을 염려해 반(反)에버그리닝 법안을 마련한 바 있다.
이제 막 약제비 통제를 시작하는 한국이 미-호주 FTA보다 강력한 수준의 협정인 한미 FTA를 체결하고도, 그 협정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 온 것이다.
건강보험과 환자들의 추가부담만 연평균 127억~1364억 원
아니나 다를까, 4월 30일 발표된 국책연구기관들의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분석 보고서>는 그동안 정부가 주장해 왔던 것과는 매우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는 의약품 분야의 주요 영향 요인으로 '관세 철폐'와 '지적재산권 강화'를 가정한 후 그 파급효과를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기존의 정부 입장과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 번째는 기존 제도에 이미 포함된 것이라고 주장하던 '개량신약'의 피해를 추산한 것이고, 두 번째는 극구 부인해 왔던 건강보험과 환자의 추가부담을 추계에 반영한 것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미 FTA 협상의 영향으로 제약산업에서는 10년 간 연평균 904억~1688억 원의 생산이 감소하며, 이런 기대매출 손실에 따라 10년 간 연평균 369~689명의 고용이 줄어든다. 국내 제약업체의 연평균 매출액이 350억 원 수준임을 감안하면, 1년에 2개의 제약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전망인 셈이다.
이 보고서는 또한 연평균 372억~696억 원의 소득감소가 발생함과 동시에 국내 복제의약품(제네릭)의 출시가 지연됨에 따라 10년 간 연평균 127억~1364억 원의 추가적인 보험재정 및 환자 부담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단순하게 합산하자면, 향후 10년간의 피해만 계산하더라도 연평균 1403~3748억 원의 손실이 발생한다. 물론 미국과 다국적 제약기업에게는 그만큼 이익이 발생한다.
작년에 '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작 458억 원밖에 안 되는 '무상예방접종' 예산을 삭감한 정부, 10억 원이 될지 100억 원이 될지 모를 예산을 절감하겠다고 가난한 의료급여 환자들을 쥐어짜고 있는 '짠돌이' 정부가 한미 FTA 협상에서는 미국과 다국적 제약회사에 '큰 손'으로 변신한 것이다.
또 이 보고서는 관세폐지가 대미 의약품 수출입에 미치는 영향도 추계했다. 그 결과, 대미 의약품 무역적자가 연평균 1640만 달러(연평균 수입액 2218만 달러, 수출액 578만 달러 증가)에 이를 것으로 나타났다.
도대체 정부가 의약품·의료기기 협상의 가장 큰 그리고 유일한 성과로 내세우고 있는 GMP(우수의약품생산기준) 상호인증과 복제의약품 상호인증 협력의 영향은 어디로 갔을까? GMP 상호인증 등으로 대미 의약품 수출을 확대하겠다는 보건복지부의 야심찬 발표는 정부 연구기관에서조차 '남가일몽'으로 취급당하고 있을 뿐이다.
의약품 가격제도에 미치는 영향은 어디로?
앞서 밝혔다시피 국책연구기관들의 보고서는 관세철폐와 지적재산권 강화를 주요 영향요인으로 가정했을 뿐, 의약품 가격제도에 대한 영향과 그로 인한 건강보험 약제비 부담 증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한미 FTA의 실질적인 피해는 이 보고서가 내놓은 '연평균 1403억~3748억 원'이라는 이미 적지 않은 피해보다도 더 클 수밖에 없다.
정부가 공개한 바에 따르면, 한미 FTA 협정문에서 의약품·의료기기 가격 결정과 관련된 조항은 7개나 된다. 기존 제도와 관련된 7개의 변경사항이 새로 발생했는데, 정부는 약제비 적정화를 포함해 기존의 의약품 가격 결정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간단하게 몇 가지만 살펴보자.
"특허 의약품의 적절한 가치 인정"이라는 간단한 문구는 마치 '잭의 콩나무'와 같다. 아마도 1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끝 간 데 없이 치솟아 버린 약값을 넋 놓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신약은 "신물질 의약품 또는 신물질을 유효성분으로 함유한 복합제제 의약품"이며, 특허는 "신물질인 경우는 물론이고, 신물질이 아니어도 주사를 알약으로 바꾼다거나, 복용량을 바꾸거나, 새로운 효능을 추가하는 경우 등"에도 부여받을 수 있다. 따라서 '특허'를 중심으로 하면, '적절한' 가치 인정의 대상이 되는 품목의 수가 크게 증가한다.
부지런하지 못한 탓일지 모르나, 아직까지 미국이 다른 나라와 체결한 FTA에서 가치 인정의 대상을 "혁신적 의약품(즉, 신약)"이 아닌 "특허 의약품"으로 한 사례를 찾지 못했다.
'적절한 가치'의 기준도 의약품 가격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적절한 가치의 기준이 A7(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스위스, 일본) 평균가격이라면, '특허'를 가진 의약품의 가격은 현재보다 20%포인트 인상되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고, 미국 기준이라면 그보다 많이 올라갈 것이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6년간 건강보험에 등재된 신약의 가격은, 혁신적 신약의 경우 A7 가격의 76%, 일반 신약은 A7 가격의 56% 수준에서 결정됐다(심사평가원, 2006. 03). 미국은 그 동안 다른 나라, 특히 한국을 포함한 OECD 국가의 의약품 가격이 미국 수준에서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비교대상 의약품보다 높은 가격을 신청할 수 있게 허용한 것'과 '추가적인 안전성·유효성 자료를 바탕으로 가격조정 신청을 할 수 있게 허용한 것'도 가격인상을 초래할 요인이다.
'비차별적 제도 운영'은 '신약에 대해서는 가격 협상을 하고, 제네릭은 일정 비율을 반영한다'는 정부의 약제비 적정화 방안과 충돌한다. '의사들의 처방을 변화시키기 위한 인센티브 제공', '신약에 대한 경제성 평가' 등도 차별적 행위로 규정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한미 FTA 협상 결과 새로 만들어지는 '의약품·의료기기 위원회'는 약제비 통제를 관장하는 건강보험공단과 심사평가원 관계자들이 직접적인 통상압력에 노출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위원회가 없는 상태에서도, 미국은 1999년 A7 가격제도의 도입을 강요해 약값을 올렸다. 또, 2002년에는 약값 인하 방안이었던 참조가격제(Reference pricing) 도입을 막은 전력이 있다.
이 위원회에서 다뤄질 이슈의 범위가 불명확한 것도 문제다. 정부가 공개한 협정문 문구상으로 보건대, 이 위원회에서는 보건의료 정책 전반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꿔다 놓은 보리자루, 의료기기
약가결정 제도에 별 영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은 의료기기 분야에 대한 영향평가다. 한미 FTA 협상은 분명 '의약품·의료기기 작업반'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했고, 각 조항도 의약품과 의료기기 모두에 해당하는 것임에도 분이 보고서에는 '의료기기'가 통째로 빠져 있다. 하긴 지난 1년 동안 정부는 의료기기 문제를 거의 거론한 적이 없다.
거론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사소한 것이면 다행이겠지만, 의료기기도 의약품과 마찬가지로 건강보험 '급여 결정'과 '가격 결정' 등의 영향을 받는다. 2004년 기준 생산액이 2조2961억 원(세계시장의 0.8%)이고 종업원 수가 2만1766명인, 비중이 적기는 하지만 성장단계에 있는 '미래산업'이기도 하다.
의료기기에 대한 보험수가는 그 동안 비교적 낮은 수준에서 단일기준으로, 장비의 첨단성에 대한 고려 없이, 적용돼 왔다. 그러나 한미 FTA에 들어간 '특허의료기기의 적절한 가격 인정', '비교대상보다 높은 가격신청 인정' 등은 미국에서 수입되는 첨단의료기기의 보험수가 상승을 초래할 것이다. 이는 곧 건강보험 재정과 국민들의 부담으로 이어질 것이다.
특허보호에 대한 '내 멋대로' 해석
보고서가 채택한 피해액 추계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과소추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전제를 도입한 것이다. 보고서는 '허가-특허 연계'에 따른 제네릭 의약품 진입 지연을 9개월로만 고정하고 있는데, 정부스스로 밝혔다시피 이 9개월이란 기간은 한미 양국 간 합의된 것이 아니다.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미국의 진입 지연 기간이 30개월, 미국과 FTA를 체결한 캐나다와 호주의 진입 지연 기간이 24개월인 점을 고려할 때, 정부가 주장하는 9개월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수치다. 따라서 진입 지연 기간을 9개월만이 아니라, 24개월, 30개월로 구분해 추계를 했어야 보다 정확한 피해규모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우리 측 희망사항일 뿐인 9개월만을 추계에 반영했다.
'특허 분쟁율 40%'라는 전제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외국인 특허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과 향후 5~10년 사이에 상당수의 블록버스터 의약품의 특허가 만료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내 기업의 특허 담당자에 대한 설문조사의 결과만 반영해 특허 분쟁율을 40%로 고정한 것은 제대로 된 전제로 보기 어렵다.
최소한 같은 제도를 이미 운영하고 있는 미국의 특허분쟁 발생율을 감안했어야 한다. 미국의 경우, '특허-허가 연계(FDA 기준 Category 4)'에 해당하는 제네릭 신청의 72%에 대해 오리지널 제약사가 이의 신청을 하고 있다.
이제 막 성장단계에 있는 개량 신약의 개발율을 12%로 고정한 것과 특허-허가 연계제도를 도입한 이후에 변화할 상황에 대한 고려가 빠진 것도 피해액의 과소추계로 이어졌다.
분쟁발생과 이에 따른 위험부담(소송비용 추가부담, 연구개발 투자손실 등)이 커지기 때문에 국내 제약회사가 지금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개량신약 개발에 나서기 보다는 모든 특허가 완전히 끝난 안전한 제네릭 생산에만 집중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았다.
대가는 지불했는데, 꿈은 이루어질까?
한미 FTA가 비준된다면, 우리는 정부의 '낙관적' 계산결과를 보더라도, 향후 10년간 연평균 1403억~3748억 원을 지불해야 한다. 정부가 고려하지 않은 변수를 반영한다면, 피해액이 그 2배를 넘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피해기간 역시 10년을 훌쩍 넘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국내 제약기업의 미국 의약품 시장 장악'? '세계적 제약기업을 보유한 신약개발 강국'? 아마도 이 두 가지가 가능하다면, 아니 둘 중 하나라도 가능하다면, 1년에 1000억~2000억 원 정도 부담은 '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GMP 상호인증이 안 돼서 미국 수출을 못한 줄 아느냐'는 제약업계의 항의와 국책연구기관들의 보고서에서 GMP 상호인증이 분석 대상에조차 오르지 못한 것은 국내 제약기업의 미국시장 진출이 앞으로도 만만치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오히려 미국의 대형 제네릭 업체들이 한국 시장에 진출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참고로, 이미 국내에 진출해 있는 미국 제네릭 업체인 산도스의 세계시장 매출액은 2004년 25억 달러로, 이는 국내 최대의 제약회사인 동아제약의 5배 수준이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업체의 육성은 가능할까? 국내 제약기업 중 연구개발(R&D)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기업의 R&D 지출비용은 미국 업체 화이자의 1%도 되지 않는다.
그간 개발된 국산 신약의 실적도 신통치 않다. 심평원이 밝힌 2005년 국산 신약의 건강보험 EDI 청구현황에 따르면, 2005년 말 기준 국산 신약은 총 10품목에 대해 385억 원이 청구됐다. 이 중 동아제약 스티렌이 207억, SK 인스정이 105억으로 청구액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국산 신약 1호인 선플라는 1억4000만 원, 미국에까지 진출한 신약인 팩티브는 15억 원에 불과하다.
개량신약을 통해 몇 년간 규모를 키운다고 해도 어려운 일인데, 이제 막 투자와 성장 단계에 들어간 개량신약 개발은 한미 FTA협정으로 5년간이나 지연되었다. 5년 후에도 허가-특허 연계에 따른 위험부담은 국내 제약회사들의 개량신약 개발을 크게 위축시킬 것이다.
아무래도 참여정부의 대박 꿈은 엉성한 시나리오로 끝날 것 같다. 다시 질문 하나를 던져본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얻자고 국민들의 건강을 위협할 위험을 무릅쓰고 연간 1000억 원 아니면 1조 원을 퍼줘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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