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이번 연재에서는 한국 농업을 살리는 데 도시인의 역할을 강조한다. 대다수의 삶터가 도시로 이전된 현실에서 농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도시인이 현대 사회에서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더 나아가 도시 농업과 같은 대안 농업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령화 사회의 도래와 도시 농업의 부흥을 연결시키는 것처럼 농업 정책과 복지 정책의 연결을 강조한 부분도 눈에 띈다. <편집자>
혹시 11월 11일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대부분은 '빼빼로데이'라고 대답한다. 정작 11월 11일이 법정 기념일의 하나인 '농업인의 날'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11월 11일을 농업인의 날로 공식 제정한 것은 1996년이다.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에 따른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을 계기로 정부가 공식 농민을 달래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농업인의 날을 11월 11일로 택한 배경도 이채롭다. 흙 토(土)자를 풀어 쓰면 열 십(十) 자와 한 일(一) 자가 된다. 즉 토월토일(土月土日)인 11월 11일이 선택된 이유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날은 한 기업의 과자 제품 판촉용에 불과한 빼빼로데이로 대치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농업이 얼마나 우습게 취급받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경제 관료의 비뚤어진 시각
농업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데 앞장서 온 사람은 다름 아닌 경제 관료들이다. 그들 눈에 비친 농업은 부가가치 창출 능력이 낮은 사양 산업일 뿐이다. 그들이 보기에, 재벌의 연간 순이익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규모인 연 20조 원 정도의 부가가치를 내는 농업은 경쟁력이 없는 산업에 불과하다.
경제 관료에게 농업이 갖는 유일한 가치는 수출 시장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상대방 국가에게 던져주는 미끼 정도였다. 즉 공산품 시장 개척을 위해 우리 농업을 내주는 식이다. 경제 관료에게 농업이 갖는 가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과연 이러한 생각이 옳은 것인가. 여기서 잠시 경제 관료들이 교과서로 삼고 있는 선진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선진국은 농가소득을 국가 재정에서 직접 보상하는 직접 지불제를 서두르고 있다. 전체 농가소득에서 직접 지불이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 28%, 유럽연합 35%, 캐나다 38%에 이르고 있으며 그 비중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또 거의 모든 선진국은 통상 협상에서 자국의 농업이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협상 대상에서 예외로 삼는다.
심지어 우리와 유사한 농업 구조를 가진 일본은 자유무역 협상에서 농업 부문을 제외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아 왔다. 선진국일수록 농업을 중시하고 국가 차원에서의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나라들의 농업 비중이 우리와 비교했을 때 훨씬 큰 것도 아니다. 선진국의 농업 비중은 보통 전체 국민경제의 2% 수준으로 4% 수준인 우리보다 더 낮다.
선진국들이 농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농업의 보호와 육성을 위해 투입해야 할 자금보다 농업이 붕괴했을 때 지불해야 할 대가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문제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의 농업이 완전 해체되어 몰락되었다고 가정한 다음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상상해 보자.
만약 농업이 붕괴된다면…
농업이 완전 붕괴되었을 경우 떠올릴 수 있는 첫 번째 장면은 심각한 식량 안보 위기일 것이다. 세계 곡물시장은 갈수록 요동치고 있다. 기상 이변에 따라 곡물 생산은 감소되는 데 반해 중국, 인도 등의 식량 수요는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FAO(유엔식량농업기구)는 2006년 인류가 향후 30년간 식량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FAO의 보고서가 예측한 2006년 곡물 생산량은 20억t으로 2005년의 23억8000t에 비해 15.9%나 감소한 수치다. 이러한 예측은 결코 근거 없는 협박이 아니다. 이미 지난 7년 사이 무려 6년이나 공급 부족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식량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식량은 가장 강력한 무기로 돌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중국은 식량 증산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곡물최저수매가제 실시(2004년), 농업세 폐지(2006년) 등은 그 방안이다. 일본 역시 식량 안보를 중요한 문제로 여기고 40% 수준인 식량 자급률을 45%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유사시 휴경지 100만㏊를 경작하여 식량 위기를 극복한다는 복안도 갖고 있다.
한국의 사정은 어떠한가. 이 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25% 수준에 불과하다. 곡물을 연간 1500만t이나 수입한다. 이런 판국에도 농업의 마지막 명줄마저 끊어놓을지 모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어야 한다고 난리다.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위기 상황에 대해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농업 붕괴로 야기되는 두 번째 장면은 농업이 지닌 다원적 기능의 상실이다.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농업은 식량 생산 이외에도 홍수 조절, 대기 정화, 환경 보존, 공동체 유지, 문화 발전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FAO는 이것을 농업의 다원적 기능이라고 정의했다.
만약 농업이 붕괴돼 논밭이 황폐화된다면 홍수 조절 기능의 약화와 함께 용수난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그간 논밭에서 뿜어냈던 엄청난 규모의 산소량 역시 크게 줄어들 것이다. 논밭의 지하수 조절 기능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이런 기능이 모조리 사라지면 결국 무서운 환경 재앙이 닥칠 수밖에 없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천문학적 자금이 소요될 것이다.
농업 포기는 우둔함의 극치
농업 붕괴는 미래 산업에서 농업이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역할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예를 들어 보자. 오늘날 각광 받는 대표적 신기술로 흔히 생명공학(BT), 나노기술(NT)을 든다. 이런 신기술을 부작용 없이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생태계와 교감하면서 생명을 다루는 능력을 극대화할 수밖에 없다.
바로 농업은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이런 능력에 기반을 둔 산업이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생명을 기르는 산업으로서 농업은 다른 신기술과 융합해 가장 선도적인 산업이 될 것이다. 인류 문명사의 전환은 농업의 공업화가 아니라 공업의 농업화로 방향을 잡아갈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당연히 농업을 경시하는 나라는 21세기 경쟁 구도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손에 잡히는 것보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한 경우가 많다. 농업이 바로 그러하다. 선진국일수록 농업을 귀중하게 여기고 아낌없는 투자를 하는 것은 바로 그 증거다. 이런 점에서 농업을 경시하고 포기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우둔함의 극치라 아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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