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 이름이 이렇게 길다.
너무 이름이 길어서 공장 사람들은 이 베트남 여자의 이름을 줄여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면, 그냥 앞머리를 따서 <레티>나 뒤꼬리를 잘라 <프엉>이라고 불렀을 테지만, 한국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그녀를 일제히 <유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왜 유리냐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누군가 맨 처음 유리라고 불렀다는 것 외에는.
한국에서는 먼저 부르는 게 임자다. 그냥 따라 부르니까.
하지만 유리가 깨지기 쉬운 성질을 가졌다는 데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 레 티 탄 프엉 |
유리와 통역을 데리고 그 회사를 방문했다. 다행히 얘기가 잘 되어서 사장님이 *퇴직금 지급을 약속했다.
발안으로 돌아오는 길, 부침성 좋은 유리가 배가 고프다며 저녁을 먹고 가자고 했으나
"바빠서 안 돼."
하며 거절했다. 그러자 길가의 과일장수를 보고 유리가 말했다.
"그럼 수박이라도 사드릴 게요."
나는 돈 받으면 그때 사달라고 하며 그것마저도 거절했는데, 지금은 후회가 된다. 유리를 본 건 그게 마지막이니까.
며칠이 지난 토요일 오후 5시 10분경.
잔업을 마친 유리는 습관적으로 통근버스에 올랐다.
기숙사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350미터밖에 안 된다. 5분이면 걸어갈 텐데 왜 버스를 탈까? 이유는 두 가지다.
1. 주말 잔업 끝이라 피곤하고
2. 시골길은 보차도의 구별이 없어 걷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동오 사거리까지는 왕복 1차선이지만, 교차로 근처 20미터부터는 *억지로 늘린 편도 3차선이 된다. 버스는 발안 쪽으로 좌회전하기 위해 1차선으로 들어섰다.
이때 신호등이 노란 깜박이에서 <좌회전, 직진> 동시신호로 바뀌었다. 하지만 유리가 내려야 하므로 버스가 일단 멈춰 섰고 문이 열렸다. 유리가 내려서 발 빠르게 타타타 뛰어 2차선을 지나 3차선을 통과하려는 순간, 오산 쪽으로 우회전하려고 급하게 달려오던 트럭에 치어 튕겨 나갔다.
끝이었다.
부침성 좋고, 되게 귀엽게 생긴 유리.
그렇게 26년의 짧은 생을 마쳤다.
퇴직금 받을 때 도와주었던 베트남 통역 요안은 그날 밤 나에게 전화하며 울었다.
"지금도 내 옆에 앉아 있는 것 같은데.... 한국에서 죽다니 너무 허무해요."
흐느끼는 통역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랴?
나는 할 말이 없을 때 늘 꺼내는 미안해요 소리만 공허하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에 있는 부모는 올 수 없다며 한국에 노동자로 와있는 조카에게 법적인 모든 사항을 위임한다는 통보를 해왔다.
한국에 있는 친지로는 앞서 말한 사촌동생(노동자로 와있는 조카)과 사실혼 관계에 있는 베트남 남자 친구가 있을 뿐이다. 보상관계는 그들이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보상 받아야 가족들이 받는 거지, 유리가 직접 받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세상을 다 얻은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나?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 : 심지어 철수나 영희 같은, 초등하교 교과서에 나오는 아이들 이름으로 불리우는 외국인도 많다.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바둑이로 안 불리는 것만도 다행이지.
*퇴직금 지급 : 사고가 나자마자 먼저 근무했던 전자부품 회사에서 퇴직금을 지급했다.
*억지로 늘린 3차선 : 시골 도로는 흔히 왕복 1차선이지만, 교차로 부근은 차선 폭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억지로) 왕복 2차선으로 만들어 놓은 데가 많다. 그러나 나가는 쪽은 좌회전 차량을 위해 3차선으로 만들고, 그 대신 들어오는 쪽을 1차선으로 줄이는 경우도 있다. 동오 사거리가 그랬다(그림 참조).
*알아서 잘 처리 : 베트남 사람들은 보상관계를 영리하게 잘 처리하는 편이다. 그들이 산재로 처리할지, 자동차 보험으로 처리할지 아직은 모른다. 두 보험을 다 받을 수는 없고 선택을 해야 하는데 보상금액이 많은 쪽으로 결정할 것이다. 자동차보험회사 관계자에 따르면 유리에게 40프로 과실 책임이 있다고 보는데 그럴 경우 보상금은 4천 5백 정도 나온다고 한다. 그러므로 최소한 4천 5백은 확보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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