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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재'부터 뿌려놓고 보자는 심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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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무조건 '재'부터 뿌려놓고 보자는 심사인가?"

[반론] 이재영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서평에 부쳐

정성진 경상대학교 교수가 펴낸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도서출판 한울 펴냄)는 근래 보기 드물게 마르크스주의를 정면으로 다루는 책이다. 정 교수는 그간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오면서 특히 트로츠키를 매개로 마르크스주의의 재구성을 꾀하고, 21세기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이 책은 이런 정 교수의 최근 고민이 집대성된 것이다.
  
  지난 29일 이재영 전 민주노동당 정책실장은 이 책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트로츠키주의를 지렛대로 새로운 진보 이론을 구축하려는 그의 노력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정 교수도 트로츠키주의를 '만능'으로 보는 오류를 보이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는 새로운 진보 이론을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 전 실장의 서평에 대해 민주노동당 당원 이정구 씨가 반론을 보내왔다. 이 씨는 국내의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모임인 다함께의 회원이기도 하다. 이 씨는 "이 서평이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며 조목조목 이 전 실장을 반박한다.

  
  <프레시안>은 정 교수의 새로운 책에서 촉발된 이번 논쟁이 한국의 새로운 진보 담론과 한국 사회의 대안을 모색하는 유의미한 토론으로 전개되길 바라며 이 씨의 반론을 소개한다. 앞으로도 생산적인 논쟁이 이어질 경우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
  
  정성진의 책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쓴 이재영의 글은 매우 유감스럽게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 편파적이고 부당한 깎아내리기, '아니면 말고'식의 억측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부터 살펴보자.
  
  이재영은 "'아래로부터'를 더 많이 강조한 트로츠키는 1921년 크론시타트 수병의 반란을 진압한 당사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 당시 트로츠키는 우랄산맥 지방에 출타 중이었고, 그곳에서 곧바로 모스크바로 가서 제10차 당대회에 참가했다.
  
  진압 책임자는 서부전선 담당 적군 사령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였다. 심지어 그 당시 트로츠키의 직책은 군사 분야의 지도력을 갖고 있는 적군 사령관이 아니라 당의 전쟁문제 정치위원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 당시 혁명의 최정예 부대였던 크론시타트 수병과 1921년의 수병은 계급 구성이 달랐다. 1917년의 수병은 농민의 가장 선진적인 부분과 페트로그라드의 공업 노동자로 구성돼 있었고 내전 동안 혁명을 방어하며 전투를 이끌었기 때문에 대부분 죽거나 부상당했다. 반면 1921년의 수병은 새로 징집된 농민 신병이었다.
  
  1921년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은 반혁명 위협이 사라진 뒤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를 제거하자고 주장하는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요구는 반혁명 세력의 복귀를 부르는 신호나 다름없었기에, 볼셰비키가 이를 들어줄 수는 없었다. 더욱이 백군과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계급들은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을 반혁명의 발판으로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을 진압한 것은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비극적 결정이었고 불가피한 폭력이었다.
  
  사회주의는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
  
  그러나 이재영의 억측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시장사회주의 역시 트로츠키주의와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하지만 그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주의"라고 낙인을 찍는다고 힐난하지만 오히려 그런 식의 근거 없는 비난과 낙인 찍기는 그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듯하다.
  
  이재영의 서평은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포착하지 못했다. 그 동안 스탈린주의(NL과 PD)와 각종 포스트스탈린주의(포스트모더니즘, 자율주의, 케인스주의 등)에 맞서 트로츠키를 지렛대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새로운 대안으로 구체화하려는 그의 노력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성진의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논의 과정, 그리고 잠정적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성진의 노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이재영이 찾아낸 이 책의 장점이라곤 "한국 사람이 쓴 트로츠키에 대한 책"이라는 점이다. 그의 글을 따라가며 반박해보자.
  
  이재영은 "세계 진보진영의 화두가 (…) 사회주의"라는 '상황 판단'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 긴밀한 연관을 맺은 국제사회주의자(IS) 경향 안에서나 그렇다고 치부한다. 그렇다면 그도 언급했듯이,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창한 차베스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또 세계사회포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대안 사회를 논의하는 주제라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재영은 정성진이 참여계획경제에 대한 논의를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에서 가져왔다고 폄하하고 싶겠지만, 앨버트 또한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논객 중의 한 사람이다. 1999년 시애틀 시위 이래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던 반자본주의 운동과 남미의 반란에 고무된 사람들은 오직 IS만이 아니었다.
  
  다양성이 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생태주의자들, 노조원들, 자율주의자들 등이 반자본주의 운동에 동참했고, 또 남미의 격변에서 영감과 용기를 얻었다. 이런 운동의 성과 덕분에 세계 진보진영은 자본주의 체제와 시장경제가 아닌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른 것이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옛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민주노동당이 등장했다. 물론 '민주적 사회주의'의 내용에 대한 이해는 저마다 다르지만, 한국 사회의 대안 사회 모델 중의 하나로 사회주의가 거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계획경제의 가능성 모색해야
  
  이재영이 계획경제의 불가능성을 반박하는 정성진의 주장을 1930년대의 사회주의 계산 논쟁과 비교하고 더 나아가 이와는 무관한 1921년의 신경제정책과 연결시키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을 뿐이다.
  
  이재영은 규모가 크고 복잡한 경제에서는 계획이 불가능하다는 장상환의 지적을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사실 정성진은 바로 이런 입장을 비판하기 위해 최근 세계 진보진영에서 논의되는 앨버트나 팻 데바인 등의 참여계획경제를 원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이루지 못하는 이른바 '시장의 실패'는 진보진영에 속하는 많은 사람에게 분명한 사실이다. 그 때문에 생산과 투자를 전국적으로 또 전 세계적으로 계획하는 일이 가능한지 아닌지, 또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그 조정 메커니즘은 어떨지를 논의하는 것은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이고 연구 대상이다. 또 참여계획경제 논의는 적어도 시장과 계획의 결합이나 시장의 활용을 담고 있는 시장사회주의와는 그 지향점이 다르다.
  
  이재영은 시장이냐 계획이냐 하는 논의에서 불쑥 사회 변화의 주체 문제를 끄집어내고는 정성진을 스탈린주의자와 다를 바 없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정성진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어느 곳에서도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투쟁이 없는 계획경제의 청사진만으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 않다.
  
  더욱이 이재영은 스탈린식 "계획경제의 실현"을 레닌과 트로츠키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신경제정책을 들고 있다. 즉 레닌과 트로츠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신경제정책을 정성진이 경제주의라고 비판했으니, 트로츠키 자신과 정성진이 말하는 트로츠키주의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재영의 논법은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 맥락에서 떼어내 그 자체로만 파악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역사적 추상주의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사람이 죽은 뒤 앙상한 뼈만 남은 것을 두고 '같은 뼈조각이니 사람과 원숭이가 같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노동자 국가가 안팎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한 신경제정책을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권력을 장악한 채 위로부터 내리는 일방적 지시에 따른 '계획' 경제(사실 계획경제라기보다는 지령경제라는 말이 더 맞다)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트로츠키에게도 약점과 실수가 있었고 또 1956년 헝가리혁명에 대한 소련의 진압을 옹호하거나 1989년 톈안먼 항쟁을 진압한 중국 지배자들을 옹호한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국제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 자기해방이라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정수를 보존하고 후대 사회변혁 운동가들에게 전수하려 한다는 점에서 트로츠키와 정성진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함께 한미 FTA 반대하는 게 뭐가 문제인가?
  
  한편, 이재영은 "한국을 대표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단체인 '다함께'가 "북한의 현실 사회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이들과 어울린다(연대?)는 추문이 계속 들"린다며 다함께가 "트로츠키의 주장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고 주장했다. 이재영은 진지하지 못하게 "추문" 운운함으로써 마치 다함께가 범자민통 동지들과 야합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면서도 이를 간접화법으로 표현해 '아니면 말고'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함께가 북한을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는 사실과 북한 지배자들의 억압에 반대하고 탈북자들을 환영한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남한의 범자민통 동지들은 대체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고 피착취·피억압 대중의 민주적 권리를 옹호하며 사회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우리 운동의 일부다. 다함께가 이들의 전략과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이들과 함께 연대해서 투쟁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다함께는, 이재영의 주장과 달리, 트로츠키가 말한 공동전선 정신에 부합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정치 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쑥덕공론을 펼치거나 지지하고 연대해야 할 운동을 그 지도 세력의 정치사상을 핑계되며 지지하지 않는 종파주의가 진정한 문제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대한 이재영의 서평은 비판이 아니라 근거 없는 중상과 비방일 뿐이다. 물론 진보진영 내부에도 다양한 차이들, 상충되는 정치적 노선들이 존재하며, 이들 간의 비판과 토론은 역사의 진보를 앞당기는 것으로 존중되고 고무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재영 씨의 서평은 이와 같은 진보진영 내부의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 기초한 비판이 아니라, 다른 입장에 대해서는 무조건 재부터 뿌려놓고 보자는 식의 비방으로 일관되어 있는데, 이는 진보진영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도를 저버린 것이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가 입장이야 어떻든 우리나라 진보 학계에서 정말 오랜 만에 나온, 또 오랜 기간 숙성된 역작임은 이재영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재영은 이 노작을 비판하려면 우선 시간을 갖고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 비판을 할지라도, 지금 이 서평처럼 자신이 지지하지도 않는 트로츠키의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척하며 너스레를 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민주주의 혹은 케인스주의의 입장에서 '다함께'에 대해서든 정성진에 대해서든 인식과 대안에서의 차이와 논리적 비판을 분명하게 제기했더라면, 21세기 우리나라 진보의 대안 모색을 위한 토론의 발전에 약간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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