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건설의 유령회사 남전디앤씨가 농성 중인 두리반의 전기를 끊었다는 소식을 어젯밤에 급히 들었다. 거기에 한국전력이 부화뇌동했다는데, 참으로 우습고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각 현재 두리반은 200일이 넘게 GS건설의 반인간적인 재개발에 맞서고 있음은 모두가 아는 바 그대로다. 두리반이 지금 요구하는 것은 최소한의 삶에 대한 권리이다. 구차하게 두리반을 시작하면서 들어간 비용을 두드려보자는 게 아니다. 두리반을 마련하기까지 애면글면한 시간을 어떻게 수치로만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GS건설은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셈법으로 동교동 167번지 일대를 재개발하겠다고 달려든 것이다. 그들의 셈법은 분식회계 장부나 만들 때 써먹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200일 두리반에서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두리반뿐이겠는가.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고 당연히 지금도 그렇다. 한심한 정권을 탓할 기운도 없다. 아시다시피 두리반의 농성장에 가장 먼저 달려온 이들은 뮤지션들이었다. 혹 그들이 시시껄렁한 연예프로그램에 안 보이는 사람들이라고 무시하다가는 어떻게든 혼쭐이 한번 날 것이다. 그들은 체제의 내장을 꿰뚫어 보는 이들이다. 소수자라는 게 그렇다. 특히 자본에 야합하지 않거나 자본의 폐해에 영혼 전체가 파르르 떨려 본 경험이 있는 뮤지션들은 곧 다이너마이트에 다름 아니다. 이제 그들의 음악을 꺼버리겠다고 전기를 끊었는가? 아니면 두리반을 어둠에 가둬놓고 언제 유린할까 잔머리를 쓰려고 끊었는가? 어둠을 두리반의 심장에 가득 불어 넣고 제 발로 걸어 나오길 바랐는가? 그것도 아님 요 며칠 폭염에 짜증이 나서 화풀이 하신건가?
재개발이라는 것이 기실은 강탈 혹은 배제의 위장술인 것은 이미 역사에서 드러났다. 멀리는 근대 초기의 인클로저(enclosure)에서부터 아주 가깝게는 용산까지 그것은 강탈자의 사악한 미소에 지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내몰고 추방하고 급기야는 근대 문명의 노예로 재편입시켜 왔다. 『영국민중사』(소나무 刊)의 저자 해리슨은 그 당시 인클로저를 이렇게 설명했다.
"통과된 인클로저 법에 따라 토지를 배분할 책임을 맡은 인클로저 위원들은 토지에 대한 법적 권리를 가진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했으나, 관습이나 임차지에 근거한 권리는 대체로 무시하였다. 이것은, 소를 먹이거나 연료 채취를 위해 공동지를 관습적으로 사용해 온 소농과 오막살이농에게는 공동지를 배분할 때 토지 지분을 주지 않았으며 그들의 종래의 권리를 박탈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종래의 권리"가 지금 두리반이 요구하는 삶에 대한 권리이다. 물론 부패한 정치인들 또는 사법 관료와 특정 재벌이 이해관계 상 뭔가를 주고받는 관습과 관행만 용인되고 가난한 서민들의 삶의 관행은 엄벌에 처해지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긴 하지만, 어떻게 한 가정의 생을 이주비 삼백만 원으로 땡처리 할 수 있는지 그 셈법에 기가 찰뿐이다. 항간에는 건물 소유주는 열배의 이익을 얻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그럼 GS건설의 개발 이익은 도대체 얼마란 말인가. 그것은 단지 자신들의 능력급인가? 타인의 삶을 짓밟고 얻은 이득이 남의 집 담 넘어가 목에 칼을 들이밀고 금품을 강탈한 짓과 뭐가 다른지 묻고 싶을 뿐이다. 법? 좋아하시네! GS건설의 야만적인 행위는 바로 헌법에 위배된다. 일단 전문부터 똑바로 읽어보기 바란다.
남전디앤씨가 곧 GS건설이라고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번 단전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분명 두리반에 계속 모여들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무례한 도발이며 곧 두리반을 유린하겠다는 선전포고라고 말이다. 지난 7월 7일부터 한국작가회의는 두리반에서 연속 문학포럼을 시작했다. 이러한 한국작가회의의 행보는 분명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단지 두리반의 유채림 씨가 한국작가회의 인천지회장이며 그 또한 소설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지난 용산 참극의 트라우마가 우리 사회를 깊이 지배하고 있음을 문학적 감수성으로 감지하고 있다는 뜻이며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짓밟히는 모든 생명의 아우성을 문학이 도외시하지 않겠다는 내면의 다짐이다. 그러나 일단 GS건설은 두리반의 슬픔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게 GS건설을 위해서도 백번 좋다. 전기를 끊는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저급한 짓이 싸움에 대한 예의를 망각하는 일이다.
전기를 끊는다고 두리반의 희망이 꺼지는 것도 아니고 뮤지션들의 음악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시인들의 시낭송이 그럼 좌절되는 걸까? 단언하건대 우리는 어둠 속에서 더 밝은 얼굴로 노래를 하고 시를 읊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원래 그런 족속이니까. 그러면서 우리 사회에 가득 찬 어둠과 절망에 동참할 것이다. 이건 의지가 아니다. 시와 노래에 내재된 보편적인 유전자다. 여기까지 말하면 고작 전기를 끊어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 물마저 끊어보실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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