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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부활한 목소리 "아끼고 또 아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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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20년만에 부활한 목소리 "아끼고 또 아껴라"

'석유 제로 시대'를 그린다 <2> 에너지 정책의 전환

"유한한 세상에 살면서 평생 기하급수적인 성장이 지속되리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미친 사람이거나 경제학자 둘 중 하나다." (케네스 볼딩, 경제학자)

독일의 '환경 수도'로 불리는 프라이부르크 시내에서 3㎞ 떨어진 보봉(Vauban) 마을. 보봉 마을에 들어서면 지붕에 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된 건물들 사이로 허름한 건물이 하나 눈에 띈다. 이 건물은 1992년 프랑스 군이 철수할 때까지 숙소로 사용하던 것을 개·보수해 난방 에너지 소비량이 연간 100㎾h/㎡도 안 들게 만든 서민 공동주택이다.

1990년에 보봉 마을로 이주한 후, 이렇게 서민들이 살 수 있는 '생태 주거 단지'를 만드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안드레아스 델레스케 씨는 "풍력, 태양 에너지를 확충하는 것만큼이나 새로 집을 짓거나 개보수할 때 난방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처럼 에너지를 절약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델라스케 씨는 "독일에서 난방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 2002년부터 새로 집을 지을 때 연간 난방 에너지 소비량을 기존 주택(약 200㎾h/㎡)의 2분의 1 수준 이하로 맞추도록 정한 것도 이런 사정 탓"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지금보다 풍력, 태양 에너지 사용이 1000배 많아져도 석유 시대만큼 풍족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프랑스 군의 숙소를 에너지 효율이 높은 서민 주택으로 개·보수한 독일 프라이부르크 보봉 마을. 이 서민 주택은 집 앞에 멈추는 트램을 통해 프라이부르크 시내와 바로 연결된다. ⓒ프레시안

1970년대 양차 석유파동 이후 사라졌던 목소리가 20년 만에 전 세계에서 메아리가 돼 돌아오고 있다. "아껴라, 아끼는 것만이 살 길이다." 그간 에너지 '공급'에 초점을 맞췄던 세계 각국이 최근 에너지 '절약'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양대 '에너지 폭식 국가'인 미국, 중국을 주목해야 한다.

에너지 절약은 환경주의자의 것이라고 폄하하던 미국이…

2001년 5월,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수개월도 안 돼 딕 체니 부통령은 '국가 에너지 정책(NEP)' 보고서를 내놓으며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국가 에너지 안보는 미국 경제와 성장을 돕는 충분한 에너지 공급에 달려 있다"며 에너지 안보가 미국의 외교 정책 순위의 가장 앞줄에 있음을 선언했다.

2003년 3월, 결국 미국은 세계에서 석유 매장량이 세 번째로 많은 이라크를 석연치 않은 이유로 침공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진짜 이유가 석유 탓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바그다드로 진입한 미군은 다른 공공기관의 약탈을 방관하면서 이라크 석유부는 충실히 보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랬던 미국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 등 산유국에서의 영향력 확대 등 '공급'에만 초점을 맞춰 왔던 에너지 정책에 '절약'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이런 변화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부시 대통령이 2006년 1월 발표한 새로운 안(Advanced Energy Initiative)이다. 이 안은 석유 소비 억제를 새로운 에너지 정책의 목표로 정했다.

5년 전 체니 부통령이 "환경주의자들의 주장하는 에너지 절약이 개인적인 덕목인지는 몰라도 에너지 정책을 위한 기본 요건으로는 충분치 않다"며 "부시 행정부는 에너지 위기가 미국인 개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에너지 정책을 펼쳐 나갈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비교하면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알 수 있다.

에너지 폭식 국가, 중국의 변화

이런 변화는 미국뿐만이 아니다.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 자원을 블랙홀처럼 흡입해 오던 중국도 변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2001~2005년 국내총생산(GDP)이 9.5% 오르는 성장을 하는 동안 에너지 소비량이 무려 55%나 급증했다. 문제는 중국이 똑같은 GDP를 창출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 소비량이 미국과 비교해도 무려 3.3배나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 3월 최종 확정된 '제11차 5개년(2006~2010) 계획'에서 "2010년까지는 GDP 1000달러를 창출하는 데 드는 에너지가 2005년과 비교해 20% 감축되도록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김현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경제 정책에 에너지 효율 수치 목표를 넣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며 "에너지 공급에 치중해 왔던 중국도 에너지 정책의 변화를 꾀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유럽연합(EU)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EU는 2005년 에너지 효율 개선을 강조한 새로운 정책(Green Paper on Energy Efficiency : Doing More With Less)을 내놓았다. 이 안은 "고유가 사태와 같은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효율을 개선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지적했다.

EU 역시 2000년 내놓은 정책(Green Paper : Towards a European strategy for the security of energy supply)과 비교하면 변화가 두드러진다. 2000년에는 에너지 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에너지 공급의 안전성 확보"에 두며 "풍력, 태양 에너지와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의 개발·보급 확대"를 강조했었다.

자원 전쟁 해봤더니…
▲ 전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는 미국은 전 세계 석유의 25%를 사용하고 있다. 2030년 미국의 석유 수요는 하루 기준으로 2004년보다 700만 배럴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프레시안

그렇다면 이렇게 에너지 절약 정책이 새삼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2000년대에 전개된 이른바 '자원 전쟁'이 큰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정된 자원을 둘러싸고 다수의 에너지 소비국이 과열 경쟁을 하면서 오히려 모두의 이익을 해치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이 그 단적인 예다. 미국이 이라크 점령을 선언한 뒤에도 사실상 내전 상태가 계속되면서 이라크의 석유 생산은 오히려 줄고 있다. 더구나 미국이 유발하는 서남아시아 갈등은 이곳의 위험을 증폭시키며 도리어 고유가 사태를 지속시키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 러시아(석유 수출량 : 2위), 베네수엘라(5위) 등 산유국의 자원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추세도 자원 전쟁이 큰 효과를 보지 못하게 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6년 4월을 기점으로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가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선언한 것이나, 12월 사할린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를 개발하던 로열더치셸 등이 러시아 공기업 가즈프롬에 지분의 절반을 넘긴 것도 그 한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에너지 절약 정책이 주목받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바로 2005년 2월 발효된 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다. EU, 일본 등은 당장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이산화탄소(CO₂)와 같은 온실가스의 배출을 1990년과 비교해 평균 5.2% 감축해야 한다.

이같은 고유가 사태, 온실가스 배출 등의 문제를 가장 확실하게 줄이는 길은 현단계에서는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법이다.

사다리 걷어차기?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것이 EU, 일본 등에 의해 '사다리 걷어차기' 전략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는 것도 미국, 중국 등을 다급하게 하고 있다. EU는 2005년 8월 11일, 에너지 효율이 높고 환경을 고려한 제품 설계를 의무화한 'EuP(Energy using Products)' 지침을 2008년부터 적용할 것을 발표했다.

미국, 중국 등이 자국 제품의 에너지 효율을 제고하지 않을 경우 이런 지침은 새로운 '무역 장벽'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인텔, 제네럴일렉트릭(GE) 등이 최근 들어 부쩍 다음 세대 제품의 경쟁력은 성능보다는 에너지 효율을 얼마나 높이는지에 달려 있다고 강조해온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2004년부터 '탈석유 전쟁에서 승리하기(Winning the Oil Endgame)'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로키마운틴 연구소의 에머리 로빈스 소장은 20년 만에 부는 에너지 절약 정책으로의 방향 선회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우리가 '아껴 쓴 에너지'야말로 '가장 싸고 깨끗한 에너지'라는 사실을 이제야 세계가 인식하기 시작했다."
참 한가하다, 한국!

석유 한 방을 나지 않는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한국의 에너지 소비는 지난 30여 년간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 경제 성장에 비례해서 에너지 소비가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1990년대 들어 과거와 같은 높은 경제 성장이 지체되는 상황에서도 에너지 소비는 계속 1970~80년대처럼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 한국의 에너지 소비는 GDP 수준이 2배 가까이 되는 유럽의 국가와 비교했을 때도 높은 수준이다. ⓒ프레시안

이것은 한국과 경제 규모가 비슷한 나라와 비교하면 상황의 심각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2005년 한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를 석유로 환산하면 약 4.43t 정도다. 이 양은 1인당 국민소득(GNP)이 3만 달러에 달하는 일본(4.18t), 독일(4.22t), 영국(3.91t) 등을 앞지르는 수준이다. 물론 미국(7.84t)과 비교하면 훨씬 낮다.

이렇게 경제 규모에 비해 에너지 소비가 훨씬 큰 데는 '공급'에만 초점을 맞춰 온 에너지 정책의 탓이 있다. 한 번 더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자. 한국은 경제 성장이 어느 정도 완만하게 된 1995~2005년 10년 동안 에너지 소비가 약 50% 이상 증가했다. 반면 네덜란드, 영국의 에너지 소비는 1980~2000년의 기간에 약 20% 증가했고, 덴마크에서는 같은 기간 에너지 소비의 변동이 없었다.

뒤늦게 한국 정부도 에너지 절약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11월 28일 국가에너지위원회 출범에 맞춰 발표된 '2030 에너지 비전'에서 GDP 1000달러를 생산하는 데 사용하는 에너지를 2030년까지 석유 0.2t 수준(2005년 : 0.358t)으로 낮출 것을 공언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참으로 낯뜨거운 내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정부는 2004년 12월 제10차 국가에너지절약추진위원회에서 GDP 1000달러를 생산하는 데 사용하는 에너지를 2012년까지 0.294t 수준으로 떨어뜨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그렇다면 2012년 이후 20년간 고작 0.094t 수준을 떨어뜨리는 데 만족하겠다는 것인가?

지금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 수준(0.201t)을 염두에 두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2030년 한국이 OECD 평균 수준에 맞출 경우 EU, 일본 등은 이미 훨씬 더 앞서 나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정부의 에너지 공급 정책을 계속 비판해 온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최근 열린 한 토론회에서 이렇게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석유 생산 정점 사태가 온다면 한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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