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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는 진정한 증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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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는 진정한 증인이 아니다"

[화제의 책]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내가 이렇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에 관심을 두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것, 단지 살아남는 것만이 아니라 체험하고 인내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지녔던 것이 나를 도와준 것이다. 가장 괴롭고 힘든 나날에도 친구와 나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을 집요하게 계속 품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살아남은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는 1976년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를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아우슈비츠 이후' 40여 년이 지난 후 이탈리아 토리노의 아파트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왜 자살했을까?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박광현 옮김, 창비 펴냄)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
▲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창비, 2006). ⓒ프레시안

프리모 레비는 독일에서 나치가 결성된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백 년에 걸쳐 이탈리아에 완전히 동화한 유대인 집안의 후손이었다. 그에게 여느 이탈리아인과 유대인의 차이는 얼굴의 '주근깨'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시즘의 광기'는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토리노대학 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1943년 빨치산 조직 '정의와 자유'에 참가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역사에 맞선다.

'정의와 자유'의 일원으로 파시스트 군에 대항하던 레비는 불과 수개월 만에 파시스트 군에 체포된다. 그때 다른 빨치산처럼 총살을 당했더라면 그는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투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8000여 명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이 됐을 것이다. 파시스트의 감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레비는 이런 희망을 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체험을 하고 싶다."

이런 '희망'은 '그가 몽상한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이뤄졌다. 그는 1944년 2월 이탈리아의 중계수용소를 거쳐 폴란드 남서부의 고도(古都) 크라쿠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마을 아우슈비츠로 이송됐다. 그리고 말 그대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극한의 체험'을 아우슈비츠에서 겪었다.



아우슈비츠에는 1940년 4월 옛 오스트리아 병영을 개축한 첫 수용소가 들어선 후 수 년에 걸쳐 45곳의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이들 수용소 중에는 가스실 4곳과 시체 소각로를 완비한 '절멸' 수용소, 거대 화학공단을 짓는 데 수용된 이들이 동원되는 '노역' 수용소 등이 포함돼 있었다. 아우슈비츠야말로 수용, 노역, 절멸의 세 단계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야만의 상징'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희생자 수는 110만 내지 150만 명에 이른다.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 100만 벌 이상의 의복, 7t의 모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구두와 안경이 발견되었다. 이런 흔적을 남긴 이들의 대다수는 바로 유대인이었다. 소련군에 의해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수인은 약 7000명. 프리모 레비는 바로 이 행운의 7000명 중 한 사람이었다.

'이름' 대신 '번호'를 부여받은 자
▲ 프리모 레비. ⓒ프레시안

레비는 아우슈비츠에 도착했을 때 '노동 가능'한 20대 중반의 남성이었기 때문에 '즉시' 살해되지 않을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30명 정도의 사람들과 함께 트럭을 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남아 있던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때도 그 뒤에도 확인할 수 없었다. 밤이 그들을 무정하고도 깨끗하게 삼켜버린 것이다." 레비와 함께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사람 중에서 단 100여 명을 뺀 나머지 500여 명에 대한 기록은 바로 말살되었다.

죽을 때까지 '강제노동'을 해야 할 운명에 처한 레비의 팔에 그의 묘비까지 따라갈 번호가 새겨진다. 174517. 그 때부터 레비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것은 바로 오늘날 바스프(BASF), 아그파(AGFA), 바이에르(Bayer)와 같은 기업들이 속해 있었던 'I. G. 파르벤'이었다. 강제노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 수인에게는 굶주림, 채찍질, 교수형 등의 처벌이 따랐다. 이런 처벌은 흔히 I. G. 파르벤의 직원이 나치에게 직접 서류로 신청했다.

당시 나치에 협력해 강제노동의 덕을 톡톡히 봤던 기업은 I. G. 파르벤뿐만이 아니다. 베엠베(BMW), 지멘스(Siemens), 다임러 벤츠(Daimler-Benz) 등 독일의 유명 대기업들이 앞장서 수인의 노동력뿐 아니라 그 생명까지도 착취했다. I. G. 파르벤를 비롯한 이들 기업 대부분은 종전 후 본격적인 동서냉전이 시작되자 서독의 경제부흥을 위해 면죄부를 받았다.

서경식은 이런 경험을 보면서 한반도의 과거를 떠올린다. 전시(戰時)에 한반도에서도 수십만 명의 청년들이 강제로 징집돼 광산이나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몇몇 일본 기업이 큰 혜택을 입었다. 그러나 독일 기업들이 소송 움직임이 확산되는 게 두려워 소극적이나마 보상하는 시늉이라도 내는 것과 달리, 일본 기업은 피해자에 대한 보상에 전혀 응하지 않은 것이 다른 점이라고나 할까.

"인간인 것에 죄가 있다"

이 모든 '야만' 속에서 레비는 살아남았다. 1945년 10월 토리노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간 그는 1947년 아우슈비츠의 생생한 경험을 담은 <이것이 인간인가>를 펴냈다. 출간 당시에 주목받지 못했던 이 책은 1958년 재출간된 후 크게 주목받았다. 그 후 레비는 <휴전>(1963), <주기율>(1975), <성형(星型)의 스파나>(1978), <지금이 아니면 언제>(1982), <익사한 자와 구제된 자>(1986)를 출간하며 이탈리아의 대표적 작가로 부상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난 후 40년 간 그를 붙잡은 화두는 바로 '인간'이었다. 그는 평생 '인간인 것에 죄가 있다'고 느꼈다. 결국 인간의 일원이었었던 그는 자신이 증인으로서 자격이 있는지도 회의했다. "우리 생존자들은 진정한 증인이 아니다. 우리는 눈속임이나 요령 혹은 행운에 의해서 심연의 바닥까지 가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다. (진정한 증인은) 증언하기 위해서 돌아올 수 없다."

이런 고민 때문이었을까? 1987년 4월 11일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보낸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보낸 토리노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한다. 아우슈비츠에서도 단테의 <신곡>을 암송하며 삶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던 그가 토리노로 돌아온 지 42년 만에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그는 인간이 좀 더 인간다워지기를 바랐지만 세상은 그의 바람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1년 전에 낸 <익사한 자와 구제된 자>에서 "하나의 민족과 문명을 파괴하는 것이 가능함은 증명되었다"며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 내전, 포클랜드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내전 등을 열거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인류는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그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마지막까지 멈추지 않은 이런 '불안'과 '초조'가 한몫 했으리라.

1982년 이스라엘이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군사거점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레바논을 침공한 것은 이런 그의 불안과 초조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가 자살하기 1년 전부터 서독에서 진행된 이른바 '역사가 논쟁'은 마지막 비수였다. 이 논쟁을 주도한 에른스트 놀테(Ernst Nolte), 안드레아스 힐그루버(Andreas Hillgruber) 등이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항상 생기기 마련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는 절망했다.

평생 '인간'을 다시 재건하려던 레비가 보기에 '독일'에서 나온 이런 주장은 그의 평생의 노력을 무화시키는 것이었을 터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한 번 더 '역사의 증언자'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증언에 대한 메아리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서경식은 말한다. "인류는 스스로 경험하고도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게 될까? 나의 예견은 비관적이다."
프리모 레비와 서경식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한국에서 프리모 레비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첫 책이다. 최근까지 유럽에서 그에 대한 수많은 책이 출간된 것과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특히 식민지배, 군사독재 등 '야만의 시대'를 감내해 온 한국의 현대사를 염두에 두면 더욱 더 그렇다. 서경식이 국내에 레비를 소개하는 데 앞장선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서경식이 레비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그의 형 서승, 서준식이 감옥에 있는 상태에서 광주에서 학살이 진행되던 1980년이었다. 그는 두 아들을 감옥에 두고 암세포에 몸을 맡기며 죽어가는 어머니의 병실에서 <이것이 인간인가>의 일본어 판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를 처음 읽었다. 그는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을까?"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같은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

1987년 레비의 자살은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1996년 이탈리아 토리노를 방문한 것은 바로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번역된 책은 그 여정을 따라 레비의 삶과 서경식의 생각이 교차한 결과물이다. 그는 좀 더 많은 일본인에게 레비의 삶과 생각을 알리기 위해 2003년 일본 NHK와 함께 <아우슈비츠 증언자는 왜 자살했나 : 작가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큰 화제를 부른 이 다큐멘터리는 지난 6월 20일 서울 인사동 평화박물관에서 서경식의 해설로 직접 상영되기도 했다. 그의 노력으로 조만간 <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이 돌베개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2005년부터 성공회대에서 연구교수 직을 맡아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서경식은 레비를 통해서 한국 사회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의 서문의 한 대목을 같이 읽어보자.

"나는 한반도의 근대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 평화와 민주주의의 시대에 벌써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음을 느낀다. 이미 때늦은 것일까? 다시 한 번 파국을 경험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는 것일까? 아니, 수차례 파국을 경험한들 결국 인간은 깨달을 리 만무하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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