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는 단순한 무역협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경제 사회와 삶의 틀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할 만한 위력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따라 내년 초로 설정된 한미 양국 정부 간 FTA 협상 타결 예정시점까지 앞으로 4~5개월 동안 국내에서는 이 협정의 문제점에 대한 토론과 찬반 양측의 행동이 가열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참여연대 부설 연구기관인 참여사회연구소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지난 달 27일 '공공성과 한국사회의 진로'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을 열고 한국 사회의 현 단계와 공공성 세우기의 새 길에 관한 토론을 벌이는 가운데 한미 FTA를 주요 주제로 다뤄 눈길을 모았다.
이 심포지엄에서 '한미 FTA와 시장사회로 가는 한국적 길-탈공공화와 제2차 신자유주의 보수혁명'이라는 제목으로 한미 FTA에 관한 발제를 했던 이병천 참여사회연구소장(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이 발제 내용을 간추려 <프레시안>에 보내온 기고문을 4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이 글에서 이 소장은 한미 FTA를 기득권 세력과 자본에 의한 '제2차 신자유주의 보수혁명'의 일환으로 진단하고 그 극복을 위한 대안의 길을 '공공성의 연대정치'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편집자>
이른바 '투자자 보호'의 문제
투자자 보호는 1997년 체제 속에서 추진돼 온 한국의 시장경제 개혁에서 가장 중시된 가치규범에 속한다. 그런데 한미 FTA의 투자협정 분야 협상은 투자자 보호의 내용과 그 무책임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 나라의 주권과 공공성에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이는 위기 이후 시장경제 개혁 과정에서 투자자의 공공적·사회적 책임성, 그리고 투자자본과 기업의 권리에 대항할 수 있는 인민주권, 다시 말해 정치적 보통선거권으로 표현되는 인민주권만이 아닌 사회경제적 삶의 영위라는 수준에서의 인민주권을 빠뜨린 일방적인 투자자 보호 규범과 제도가 원천적으로 얼마나 허점을 가진 것인지도 잘 일깨워 준다.
한미 FTA의 투자분야 협정은 투자자 보호라는 이름 아래 국제자본의 무책임한 특권을 극도로 보호하고, 국가의 주권적·공적 규제력을 돌이킬 수 없이 치명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더욱이 그 효과가 단지 해당 '투자' 분야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 성격상 상품, 서비스, 지적재산권, 경쟁정책 등 공공적 이익이 걸려 있는 모든 분야의 전 범위에 걸쳐 그 위험이 확산된다.
따라서 투자협정은 한미 FTA 협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한미 간에 가장 이견이 적은 분야이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처음부터 협정 초안(8장 '투자' 항목)에 투자자-국가 제소제를 집어넣어, 자진해서 한미 FTA를 또 다른 나프타(NAFTA)로 만들고자 했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홍기빈,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 녹색평론사, 2006, pp.183-203 참조). 정부는 이 제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① 성격: 권력을 앞세운 국가의 횡포로부터 외국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인 제도이며 세계적으로 표준화된 제도다.
② 적용 가능성: 내국인 대우, 이행의무 부과 금지 등 협정의 중요한 의무 위반에 대해서만 제소가 가능하다. 또 나프타의 경우 환경조항이 있어 이 제도의 남용을 막는 기능을 한다.
③ 소송에 대한 해석: 소송 건수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는 것은 기우다. 이 제도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은 소송사건을 피상적으로만 검토했기 때문이다.
④ 정부가 취해야 할 방향: 제소당하지 않도록 외국인 투자 보호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 세계화 시대의 방향이다.
이같은 정부의 이해방식은 시민사회 진영의 이해방식과 너무나 다르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한미 FTA를 대하는 양쪽 입장의 차이, 그리고 한국의 사회경제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양쪽 입장의 차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해 일일이 검토할 수는 없고, 투자조항 전반에 대해 몇 가지 사항들만 지적하고자 한다.
① 수용 관련 분쟁
정부는 수용과 관련된 분쟁을 국내 구제절차에만 제소하도록 하고 국제 중재절차를 배제하자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한미 FTA 국회 통외통위 보고 자료,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2006년 8월 17일).
투자분쟁에 대한 법적 관할권의 이전이 주권양도임을 뒤늦게라도 알아차린 것일까? 정부가 그간 투자자-국가 제소제를 세계표준이라고 우겨온 것을 생각하면 의외다. 정부는 투자계약과 투자인가 위반 사항도 분쟁대상에 포함시키자는 미국의 강화된 요구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
정부가 이런 태도를 보이게 된 데는 시민사회 진영의 반대운동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정부는 처음부터 자진해서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우리 측 초안에 집어넣어 놓은 뒤여서 이미 협상의 입지가 좁은 상태이고, 미국이 한국 정부의 새로운 입장을 받아들일 여지도 아주 좁다. 물론 그 이전에 우리 정부의 새로운 입장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정부가 그러한 입장을 관철할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설사 우리 정부의 견해가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이는 수용 관련 분쟁에만 제한된 것일 뿐 투자협정의 여타 제 조항이 가져올 국제자본의 특권 강화와 정부의 공적규제 능력 파괴라는 문제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② 간접수용
중요한 것은 한국정부가 이미 겁 없이 간접수용을 포함해 수용과 배상에 관한 협정문 본문에 대해 미국과 합의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수용과 동등한(tantamount) 조치'를 보상 대상 수용의 범위에 넣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필경 그랬을 것이다.
남은 쟁점은 미국 측이 제안한 '간접수용 부속서'를 채택할 것인지 여부다. 이 부속서는 간접수용의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무분별한 제소로부터 정부를 보호할 것이라는 게 미국 측의 주장이다. 제안된 부속서의 내용은 두 가지다. 그 중 하나는 어떤 정부행위가 간접수용에 해당하는지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정부행위의 경제적 영향', '투자자의 합리적 기대를 침해하는 정도', '정부 조치의 성격' 등 세 가지를 꼽고 있다.
다른 하나는 공공보건, 안전, 환경과 같이 정당한 공공복지 목적을 보호하기 위한 비차별적 규제 조치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간접수용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송기호에 따르면 미국은 투자자-국가소송제에 대한 자국 내부의 비판을 일부 고려하여 이런 수정을 했고, 그 대신 미국인 투자자를 위한 더 강력한 보호장치로서 '투자계약과 투자인허가 위반 사항도 국제중재에 회부하도록' 하는 조항을 신설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같은 수정은 제한의 내용은 지켜지지 않으면서 투자자 권리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나프타에도 환경조항이 들어 있으나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간접수용(점진적 수용과 규제적 수용을 포함)이라는 범주 자체가 관련 규정의 내용이나 과거의 분쟁 사례로 보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포괄적이고 광범하고 모호한 것이어서 그 그물망에서 벗어난, 정부의 정당한 공적규제의 공간이 너무나 협소하다는 데 있다.
특히 배상을 해야 하는 간접수용과 배상의 필요가 없는 정부의 정당한 공공정책적 규제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 나프타는 물론이고 미국의 양자 간 투자협정 기준도 배상의 필요가 없는 규제(non-compensable regulation)에 대해서는 명시적 규정을 하지 않고 다만 간접수용에 대해서만 규정하고 있다. 한미 FTA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 정부가 이미 간접수용을 받아들인 이상, 수용에 따른 배상의 문제에 시달리게 되거나 적어도 정부당국이 '규제의 공포' 또는 '규제의 오한(regulatory chill)'에 묶일 수밖에 없다.
국제자본에 무한의 자유와 특권을 보장하고 이를 위해 나라의 주권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투자협정'과 공공의 이익과 사회의 통합적 발전을 위해 자본과 기업의 특권을 제어하고 그 사회적 책임성을 요구하는 '공공정책'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③ 투자의 정의, 소송의 대상
나프타에서처럼 한미 FTA에서도 투자는 기업 설립 등 직접투자만이 아니라 주식, 채권, 부동산, 지적재산권 등 사실상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자산' 취득을 포괄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분쟁 사례를 보면, 특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투자자 보호의 조건으로 투자자산의 규모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주 적은 규모의 소액주주와 온갖 종류의 소액투자자도 똑같이 국가주권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소송권을 가진다.
둘째, 소송대상이 되는 조치 속에는 국가 간 재화의 이동이나 폐기물의 이동 등 '시장접근'에 대한 정부의 규제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는 사실상 정부의 거의 모든 사회적, 경제적 규제가 수용/배상에 걸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투자자 보호 조항 중 최저기준 대우(국회 통외통위 자료에서는 '최소대우 기준'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이는 '최저기준 대우'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에 대해서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국제 관습법 상 인정되어 온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를 보장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적법절차를 의미한다"(통외통위 자료)는 식으로 안이하게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세계표준의 적법절차처럼 보이는 이 모호한 조항이 실제로는 '수용과 동등한 조치'에 관한 조항과 더불어 투자자-국가 제소의 대상범위를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한 매우 위험한 조항이다.
서비스의 개방, 경쟁과 탈공공화
국경을 넘는 서비스 무역에는 일반의무사항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간 우리의 시민사회 쪽에서는 이 일반의무사항이 갖고 있는 함정에 대해 상대적으로 주의를 덜 기울였다는 생각이 든다.
서비스 무역의 일반의무사항은 '경쟁정책, 독점공기업, 정부조달' 분야의 조항들과 결합하여 정부의 필수 공공서비스 제공 능력과 공익을 위한 정부의 서비스 규제 능력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서비스의 전반적 시장화, 사유화와 국제자본의 일방적 이익의 보장을 도모하는 큰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한미 간에는 서비스 무역의 일반의무사항으로 포괄주의, 내국민 대우와 최혜국 대우라는 두 가지 비차별 대우, 시장접근 제한 금지, 현지주재 의무 부과 금지, 국내 규제 등이 합의됐다고 한다.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① 포괄주의
서비스 분야는 투자 분야와 마찬가지로 자유화 방식으로 포괄주의 방식(negative list)을 채택하고 있다. 이는 우리 현행 법체계가 채택하고 있는 열거주의 방식에서 벗어나 '개방 유보'를 명시한 부문을 제외하고는 무분별한 전면개방 방식으로 근본적인 전환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의하면 미래에 생겨날 신생 서비스 산업도 자동적으로 개방대상이 된다.
이같은 포괄주의 접근은 한국경제의 조건과 필요에 따라 개방의 속도, 순서, 범위 등을 조절할 수 있는 정부의 정책 자율성과 정책 선택의 여지를 심대하게 제약할 것이다. 또한 미국에 비해 전반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국내 서비스 부문, 특히 공공서비스 부문에 심각한 충격을 줄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비합치 조치(non-conforming measures)'로서 유보 리스트를 열거한 부속서를 협정문에 집어넣는 방식으로 처리하려 하고 있다. '부속서 1(현재유보)'은 현재 합의한 규제의 수준에서 개방을 유보하는 목록인데, 여기에는 유보의 시한이 끝난 후에 일단 개방하면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하는 후퇴방지 조항(레쳇조항, ratcheting)이 적용된다. '부속서 2(미래유보)'는 새로이 규제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있는 목록이다.
정부는 현재유보 대상으로 건축설계, 회계, 세무, 통신(지분), 해운 등 52개, 미래유보 대상으로 공공서비스, 취약계층 보호, 방송, 스크린쿼터, 초중등 교육, 보건의료 등 44개를 제시하고 있다(통외통위 자료). 이 유보안이 어떻게 처리될지가 아주 큰 주목거리며, 이 부분에서 특히 완전한 정보공개가 필요하다. 한미 FTA에서는 이처럼 유보안으로 처리하고 있는 반면에 나프타 12장(국경간 서비스 무역)에서는 1201.2 과 1201.3에서 개방에서 제외되는 부분을 본문에서 별도로 규정하고 있다. 협정의 편제로 본다면 나프타에 비해서도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② 내국민 대우와 최혜국 대우
내국민 대우와 최혜국 대우, 이 둘을 합쳐 비차별 대우라고 한다. 내국민 대우란 미국의 서비스 공급자에게 법적으로나 사실적으로나 한국의 서비스 공급자와 동등한 대우를 부여함을 말한다. 내국민 대우는 외국의 공급자에 대한 양적 차별 문제를 넘어 질적 차별 문제에도 확대 적용된다. 이는 경쟁력이 취약한 국내 민간 서비스업 분야 전반에, 특히 중소 영세 서비스 업체에 큰 타격을 가할 것이다. 국내 공급자들에 우호적인 많은 현존 규제들이 차별적인 것으로 판정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공정책 상의 여러 긴요한 이유로 국내 서비스나 국내 서비스 공급자에 유리한 방향으로 경쟁의 조건을 수정하는 것도 협정 위반이 된다는 점이다. 공적으로 자금을 지원해도 차별대우가 된다.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은 미국의 서비스 제공자가 사적 부문에 속하고 국내의 서비스 제공자가 공적 부문에 속한다 해도 양쪽 모두에 공평한 경쟁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중앙정부, 지방정부, 비영리적 목적으로 운영되는 제3부문 할 것 없이 모두가 이 '평평한 자유시장 경쟁판(level playing field)' 안에서 놀아야 한다. 이런 협정은 공공정책을 좌절시키고 공공부문과 제3부문의 쇠약을 불러올 수 있다.
최혜국 대우는 협정 상대국의 서비스나 서비스 공급자에게 협정 비당사국의 서비스나 서비스 공급자보다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단 하나의 외국 기업이 국내에서 얻은 이익도 외국의 모든 기업들에 즉각 무조건적으로 균점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정치외교적, 군사적, 윤리적, 사회정책적, 환경적 목적 등에 비추어 외국과의 통상에 대한 전략 측면에서 우리 정부가 갖고 있어야 할 선택의 폭을 제약할 것이다.
③ 시장접근 제한 금지
이는 '서비스 공급자 수 등 양적 제한 금지'로 서술되어 있다(통외통위 자료). 이 의무는 비차별적인 조치라 해도 거래액 및 생산량, 피용자 수, 법적 실체의 유형 등 그 어떤 수량적 제한도 절대적 수준에서 금지하는 것이다. 보편적 필요를 위한 공적 서비스가 외국의 사적 공급자와 평평한 시장공간에서 같이 경쟁해야 한다. 이는 공적 서비스의 접근성과 질을 떨어뜨리고 그 시장화를 촉진시킬 것이다. 환경적 목적의 규제 또한 제약된다.
나프타 1207조의 '양적 제한'은 지방정부 수준의 규제조치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세계무역기구 규정(WTO/GATS 14조 '시장접근')이 훨씬 더 개방수위가 높다. 그런데 한미 FTA는 거의 틀림없이 후자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
④ 국내 규제(domestic regulation)
통외통위 자료를 보면 "상기 의무에 반하지 않는 정당한 정책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국내 규제는 허용. 다만 무역에 대한 과도한 제약을 가하는 조치 등은 제한됨"이라고 간단히 씌어져 있다. 이 조항은 그 표현방식과 달리 실제로는 전적으로 '비차별적인 국내 규제'의 폐기를 겨냥한 것으로서, 필요 이상으로 무역에 제약을 주는 불필요한 질적 규제장벽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not be more restrictive than necessary)는 내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는 비록 무역과 관련성이 미약하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경제의 운영을 위해 필요한 수많은 국내 규제조치를 포괄적으로 제한하게 될 위험한 규정이다. 국내 규제에 관한 내용이 지금대로 협정문에 들어가게 되면 어떤 서비스 부문이든 전면적으로 개방해야 하는 무차별한 자유경쟁의 바다에서 거의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경쟁정책, 독점공기업 , 정부조달
한미 FTA 협상안은 일반 재화, 서비스, 투자 등의 국가 간 이동 자유화를 위한 규범과 별도로, 나라 안에서의 국가의 질서정책, 시장질서, 그리고 공공부문도 무차별한 자유경쟁시장 논리에 의해 규율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규범을 갖고 있다.
시장경제와 세계경제에서 사적 독점권력의 횡포와 그에 따른 위험을 막아 공정경쟁 질서를 확립하는 것은 질서정책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목표다. 사실 제약회사를 비롯한 미국 다국적 기업체들은 경쟁업체라기보다는 독과점업체이며, 이런 면에서 그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자유무역' 협정은 공정경쟁보다는 강자의 이익을 보장하는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협정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유경쟁을 절대선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자유경쟁 무역을 여과 없이 관철시킨다는 것은 강대국의 이익을 옹호하고 후발국에 대해서는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는 것이 된다. 공정경쟁이라는 관념 자체에 갈등이 내재되어 있으며,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무차별하게 일률적인 공정경쟁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차별적이고 불공정한 것이 될 수 있다.
국민생활의 보편적 필요에 부응하는 안정적인 공공서비스의 공급, 산업정책을 비롯한 중장기 경제발전 정책 상의 목적을 위해서는 자유경쟁을 조절하고 제한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독점이 필요한 분야도 있다. 무엇보다 의료, 교육, 먹을거리, 문화, 금융 등을 사적자본의 이윤쟁탈전에 내맡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경쟁력이 취약한 중소기업, 영세기업을 독과점 기업과의 자유경쟁으로 내몰아 그들이 도태되거나 수탈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경쟁법 조항과 관련해서는 경쟁법 및 경쟁당국의 유지, 비차별적 경쟁법 집행, 경쟁법 집행과 관련한 공정한 절차 보장(증거제출 및 진술 기회 보장) 및 협력(통보, 정보교환) 등에 관해 한미 간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외에 미국은 경쟁법에 의한 조사 및 경쟁법 집행과 관련한 상세한 조항, 동의명령제(consent order)의 도입, 그리고 한국 재벌에 대한 경쟁법 적용 규정 등을 요구하고 있다.
동의명령제란 경쟁당국과 경쟁법 위반혐의를 받고 있는 기업이 상호 합의를 통해 사건을 종료하는 제도로, 그 성격상 위법 독과점 기업에 면죄부를 주게 되는 제도다. 미국은 자국 독과점 다국적 자본이 활동하기에 좋은 추가적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이 조항을 요구한 것이다. 이는 투자 분야에서 규정되는 투자자 보호 조항의 연장선 상에 있는 조항이라 하겠다. 미국에서 회계부정 스캔들로 인해 에너지기업 '엔론' 경영자가 징역 24년4개월 형을 선고받은 점을 생각해보면, 이는 너무도 비대칭적이고 몰염치한 요구다.
그러면서도 미국 정부는 교묘하게도 자국 자본과의 경쟁관계를 의식하면서 한국 재벌에 대해 경쟁법을 적용한다고 명시할 것을 한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동의명령제 도입 요구에 대해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의 일환으로 수용하고 있다. 통외통위 자료에는 우리 정부의 입장이 '유보'로 나와 있었지만, 곧 '수용'으로 바뀌었다. 동의명령제는 그간 재계에서 끈질기게 도입을 요구해 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한미 FTA를 계기로 이런 재계의 요구가 관철되고 있는 셈이다. 중요한 점은 공정위가 수용으로 입장을 바꾸었다는 사실이다(이에 대해서는 "공정위, 미국 요구에 '동의명령제 수용'으로 선회", 2006년 10월 16일자 <프레시안> 기사 참조). 그러나 우리 정부는 재벌에 대한 경쟁법 적용을 명시하라는 미국의 요구에는 반대하고 있다.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독점기업과 공기업 관련조항에 들어있는 함정이다. 미국은 독점기업과 공기업에 대해 아래와 같은 의무를 부과하도록 한국에 요구하고 있다.
① 정부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할 때 FTA 협정 준수
② 판매, 구입 등 영업활동은 상업적 고려에 따라 수행
③ 상대국 투자 및 상품, 서비스 제공자에 대한 비차별적 대우
④ 독점적 지위 남용 금지
독점기관이나 독점기업에 대해서는 이 4가지 의무 모두를 부과하고, 공기업에 대해서는 ①번과 ③번 의무만 부과하자는 것이 미국 측의 요구다. 교역 상대국의 서비스 및 투자 문호가 개방되어 있어도 그 나라 안에 독점 공기업이 있으면 미국 기업이 그 나라에 진출해 자유로운 활동을 하는 데 지장을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위 4가지 사항들은 FTA를 체결한 양국 기업들이 서로 상대방 나라의 시장에서 FTA 상의 혜택과 공정한 대우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기본규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것들은 나프타 1502조, 1503조의 규정과 거의 유사하다.
한국정부는 일단은 독점 공기업의 정의와 의무의 범위가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관련 규정이 정부의 공공정책 수행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흐릿한 사고방식만을 갖고 있는 정부가 과연 나프타 이래 미국이 완강하게 관철시켜 온 경쟁 챕터의 핵심 골격인 위와 같은 요구를 물리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독점기업은 상품과 서비스의 유일한 공급자 또는 구매자로 지정된 기관으로서 중앙정부가 소유지분을 통해 소유하고 통제하는 정부기관 및 정부가 지정한 민간 독점기관, 그리고 그런 기업이 소유하고 통제하는 자회사를 포함한다. 공적 서비스 중 많은 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공급되고 있고, 또 이런 방식으로 새롭게 확대될 수 있다. 그런데 '상업적 고려'와 '비차별적 대우'는 이같은 방식으로 이뤄지는 공공서비스의 공급이나 공적규제를 공동화시키고 공공서비스의 새로운 확대와 창출을 가로막을 것이다.
공기업의 경우도 비차별적 대우와 FTA 준수라는 규정만으로도 내외의 사적 서비스 공급자와의 무차별한 경쟁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비차별적 대우와 FTA 준수라는 규정만으로도 얼마든지 공기업의 위축 또는 사유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 또한 이로 인해 비시장적인 사회적 필요, 다시 말해 보편적인 사회적 시민권에 부응하려는 사회서비스(보건의료, 교육, 주택, 식품), 공공 및 인프라 서비스(물, 전기, 가스, 철도, 통신, 도로), 문화 서비스, 안전 서비스(경찰, 사법 시스템, 군대) 등이 모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정부조달은 특정 생산분야의 선별적 육성, 중소기업 보호, 지역균형 발전, 사회복지 증진, 환경 보호 등 경제적, 사회적, 생태적 목표를 위해 매우 중요한 정책수단이다. 이 분야에서 한국은 민자유치 사업에 대해서는 정부조달 관련 규정의 적용을 배제하고, 학교급식은 예외로 하며, 중소기업 보호를 위한 예외조항을 설정해야 한다고 미국에 요구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서비스, 정부조달, 무역 관련 기술장벽 등의 분야에서 주정부 전체를 협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의 경우는 한미 FTA와 지자체 조례의 상충이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같은 문제는 협정의 불공정성과 연결된 문제인 동시에 통상협정과 국내법이 충돌할 경우 국내법 우선 원칙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확인시켜준다. 미국에서는 주정부가 별도의 법률 주권을 갖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정부에서 협정을 체결한 뒤에 국회의 비준만 받으면 그 협정이 기존의 모든 법률에 우선하는 특별법으로서의 효력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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