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는 '귀족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기와 솔선수범'에서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로 변해 왔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오늘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가진 자의 나눔을 뜻하는 것이며, 그것은 부의 사회 환원, 즉 기부를 통해서 실천될 수 있다.
기부의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카네기를 시발점으로 해서 록펠러, 포드 같은 기업인들이 기부를 통해 부의 사회환원을 지속적으로 행해 오고 있으며,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등에 의해 면면히 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과거에 존재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 나눔의 철학으로 승화되어 계승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라거나 가족이기주의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우리 사회의 삶의 질 양극화 현상은 너무나 심화되고 있고 기부문화의 토양은 척박하기만 하다.
이제 우리도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안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기부는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나 정부의 역할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의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한다. 또 자선적 기부는 사회의 균형발전을 가능하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한다.
우리의 기부 현실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개인의 기부보다 기업의 기부가 많고, 기업의 기부도 준조세적 성격의 비자발적 기부라는 점이 자주 지적되고 있다. 특히 연말연시나 재해가 발생할 때에는 사방에서 무언의 기부 압력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기부를 하는 기업들도 기부를 사회공헌의 일환이라기보다는 면피나 보신을 위한 방책쯤으로 여겨, 기부 자체보다는 그것의 홍보활동에 더 신경을 써 왔다.
게다가 우리 경영자들의 기부는 아직도 대부분 기업의 자금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처럼 개인의 재산을 자선사업에 쾌척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한 우리 사회의 개인 기부는 여전히 일부 계층에 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일회성이고 충동적인 기부에 그치고 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 건전한 기부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의 기부를 기업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 일회성 기부에서 정기 기부로, 비자발적 기부에서 자발적 기부로, 다액 소수에서 소액 다수로 바꿀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건전한 기부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우선 가진 자들의 모범적 기부가 많아져야 한다. 사회지도층의 모범적인 기부행위는 일반 시민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 이 땅에 소액 다수의 기부문화를 뿌리내리게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모범은 같은 계층의 인사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조지 소로스의 거액 기부는 테드 터너의 기부 인생에 영향을 미쳤고, 테드 터너는 빌 게이츠에게, 빌 게이츠는 워렌 버핏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경쟁적으로 기부 문화를 정착시켰다.
이제 우리에게도 위대한 기부자의 등장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모범을 보이는 인물들이 필요하며, 우리 사회는 그런 이들을 영웅으로 대접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오블리주를 다하는 '가진 자'를 노블레스로 대우해야 마땅한 세상이다.
두 번째는 기부에 대한 교육이 가정과 학교 및 직장에서 상시로 이뤄져야 한다. '자선은 가정에서 시작된다'는 외국 속담이 있지만, 이제 우리도 가정에서 기부하고 봉사하는 교육을 해야 할 때다. 선행을 베푸는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선을 베풀게 된다. 학교와 직장에서도 그러한 교육과 관행이 정착되어야만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기부문화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녹아들게 해야 한다.
세 번째는 기부를 장려할 수 있는 여건과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특히 세제상의 공제범위와 관련한 조세제도와 비영리 조직 등에 의한 모금행위를 감독하는 제도가 보다 성숙한 수준에서 마련될 필요가 있다. 기부자의 측면에서는 우선 기부자에 대한 세제혜택의 폭이 커져야 한다.
최근 정부는 다행스럽게도 개인 기부금에 대한 소득세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 개정안에 의하면 개인이 사회복지시설과 소년소녀가장 등 소외계층에 제공하는 기부금에 대한 소득공제 혜택이 '연간 소득금액의 5% 한도'에서 '기부금 전액'으로 확대된다. 또한 학술, 종교, 문화 등 공익단체에 기부하는 금액에 대한 소득공제 한도도 소득금액의 5%에서 10%로 확대된다.
이는 우리나라 비영리단체의 재원확보 방안에 획기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즉 민간부문에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50%, 일본은 25%까지 소득공제를 받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소득공제 혜택은 더 확대되어야 한다.
기부를 받는 쪽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의 정비도 필요하다. 최근 정부가 기부금품모집규제법 시행령 일부를 개정하여 기부금품 모집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하고 모집비용 충당비율을 15%까지 확대하기로 한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그동안 허가제로 시행됨에 따라 특정 단체 또는 특정 목적의 기부금 모금만이 가능해 특혜 논란이 계속돼 왔는데, 등록제로 바뀜에 따라 시민사회단체들의 기부금품 모금활동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기부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기부와 관련한 규제를 철폐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네 번째는 기부의 대상이 되는 비영리 조직들의 투명성과 신뢰성, 그리고 기부금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이 강화되어야 한다. 그동안 기부의 대상이 되는 비영리기관들의 투명성 결여와 경영역량의 부족은 기부자들의 신뢰를 확보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였고, 그것이 일반 시민들의 기부 참여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지적되어 왔다.
기부자들은 자신이 기부한 돈이 꼭 필요한 곳에 쓰였는지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거쳐 사용되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따라서 자선적 기부의 대상이 되는 비영리 조직들은 지배구조의 투명성과 경영능력 및 신뢰성 확보를 위해 항시 노력해야 한다.
끝으로 일반 시민들의 적극적인 기부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다양하고 혁신적인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비영리 단체들은 기부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부상품 개발과 기부자 지향적인 서비스의 체계적인 구축을 위해 조직의 운영에 시급히 마케팅 개념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선진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마케팅은 기업에서만 활용되는 경영기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모든 분야에서 무한경쟁 체제가 형성되면서 비영리조직에서도 경쟁력 확보를 위해 마케팅 개념이 활발하게 도입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 건강한 기부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안들을 통해 자선적 기부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참여를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기부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우리도 이제 우리가 갖고 있는 행복을 조금씩 소외된 이웃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전한 기부문화의 정착이 시급하다. 기부문화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시대정신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도록 하기 위해 사회지도층과 시민들은 물론 기부를 필요로 하는 비영리단체와 언론 및 정부도 동참하는 범국민적 캠페인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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