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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식인의 고백, "나는 잠시 무엇에 홀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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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식인의 고백, "나는 잠시 무엇에 홀렸었다"

[화제의 책] 고종석의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실망은-차라리 환멸은-한동안 공적 발언에 대한 내 의욕을 납작하게 짓눌렀다. 글쓰기가 내게 허락된 유일한 생업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즉 키보드를 치워버렸을 것이다. (…) 불혹지년을 한참 넘겨서, 나는 잠시 무엇에 홀렸었다."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 고종석이 지난 4년간의 흔적을 모았다.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 펴냄)는 고종석이 <한국일보>, <시사저널>, <씨네21> 등의 매체에 실은 글 중에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글들을 솎아낸" 다음 골라 모은 것이다.

고종석이 책의 머리말에서 특별히 언급해 놓았듯이 지난 4년간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생각이다. 2002년 '대통령 노무현'을 "이지적이고 솔직한 인물"이라고 극찬한 것을 염두에 두면 큰 변화다.

"나는 잠시 무엇에 홀렸었다"
▲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고종석 지음, 개마고원, 2006) ⓒ프레시안

그 때 노무현에 홀렸던 지식인은 고종석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홀린 덕에 '한 자리' 차지한 수많은 지식인과 비교했을 때 그는 단연 돋보인다. 그는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기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초반에도 쓴 소리를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 그 폭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바로 참여정부의 탄생을 반겼던 힘없는 사람들이다. 대통령과 정부가 권위와 자존심을 내세울 데는 그 힘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강자에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약자에게 휘두르는 주먹만큼 보기 흉한 것도 없다."

고종석은 2003년 '부안 사태' 때도 이렇게 쓴 소리를 했다. 물론 대통령 노무현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3년 가까이 돼서야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회고했지만, 딱 그뿐이었다. 곧바로 "18년간 미뤄 온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을 해결했다"는 자화자찬이 이어졌다.

그 3년 동안 부안의 '힘없는 사람들'은 온갖 고통을 겪었다. 그들에게 뒤늦은 정부의 사면 조치는 생뚱맞기까지 하다. 역사는 고준위, 중·저준위 폐기물을 분리해 기어이 경주에 처분장 건설을 강행한 대통령 노무현의 판단 역시 '결정적 실수'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신성동맹에 투항하며…조잡한 정치공학 되풀이한 盧 정권"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의 '신성동맹'은 "자본을 매개로 한, 반동 정치세력과 반동 언론권력 사이의 강고한 동맹"을 뜻한다.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향한 개인들의 열망을 위험시하고 억압하는 집단주의자들의 획일주의적 수구동맹"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정권은 출범 이후 지지자들 심정에는 아랑곳없이 신성동맹 눈치를 살피느라 끊임없이 우경화의 길로 매진함으로써 제 지지기반을 허물어 왔다. 그러다가 사면초가다 싶으면 온 나라가 들썩이도록 신성동맹과 각을 세우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는 방식의 조잡한 정치공학을 되풀이해 왔다."

고종석이 '대통령 노무현'에게 느낀 '환멸'은 이렇게 '신성동맹'에 서서히 투항해간 그의 행보 탓이다. 이런 행보 탓에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다. 그는 최근에 2004년 "제발 살고 싶다"며 대통령의 이름을 절규했던 김선일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 유언은 의도하지 않은 유언이라는 점에서, 정부가 마음먹기에 따라선 그 말을 유언으로 만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의 마음에 깊숙한 상처를 남겼다."(<한국일보, 2006년 8월 31일자.)

"어떤 무능도 부끄러움의 능력을 잃은 것만큼 부끄럽지는 않다"

모두가 김선일을 잊은 지금도 그를 잊지 못하며 부끄러워하는 고종석은 또 다른 지식인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 바로 한 때는 고종석과 보조를 맞추며 노무현에게 애정을 줬던 '지식인 유시민'이다.

김선일이 죽기 1년 전인 2003년, 아직 정치 '초짜'였던 유시민은 이라크 파병의 불가피성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 지지와 파병 결정에 대해 부끄러움과 아픔을, 분노와 절망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랬던 유시민은 김선일의 죽음을 놓고서 이렇게 말했다. "콜레라(이라크 파병)와 페스트(한반도 위기) 사이에서 가볍게 앓을 수 있는 콜레라를 선택한 것이 이라크 파병이다." 고종석은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김선일 씨의 참혹한 죽음이 알려진 뒤 기자들 앞에 나와 테러에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말하는 대통령의 얼굴에선, 그리고 '콜레라와 페스트 사이의 선택'이라는 궤변으로 파병을 합리화하는 유시민 의원의 목소리에선 부끄러움이 읽히지 않았다. (…) 인간의 어떤 무능도 부끄러움의 능력을 잃은 것만큼 부끄럽지는 않다."

배신은 누가 했는가?

'대통령 노무현'에게 '기대'를 하면서 쓴 소리를 아끼지 않다 이제 '환멸'하게 된 고종석은 여전히 '객원(客員)'을 떼지 못한 채 글쓰기로 밥벌이를 한다. 반면에 왕년에는 고종석과 비슷한 처지였던 한 지식인은 지금 국회의원을 거쳐 '장관'이 돼 있다. (더 이상 그는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

여전히 '대통령 노무현'에게 기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묻는다. '대통령 노무현'이 힘들어 할 때 헌신짝처럼 저버린 사람이 바로 누구였냐고? 과연 그럴까? 오히려 진실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한 때나마 '노빠'였던 사람들에게 '강추'하고 싶다.

"이 정권은 지난 세 해 반 동안 계급적 배신을 저질러 왔다. 대통령이 되기 전 노무현 씨의, 그리고 국회의원, 국무위원이 되기 전 유시민 씨의 그 진실한 표정과 간절한 말투를 뭉클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배신은 인류라는 종의 비루함을 씁쓸히 곱씹게 하는 재료다. 그들은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선한 표정으로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어쩌면 책임질 생각이 없었던) 제 미래를 진지하게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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