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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여, '약소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가"

<실천문학> 기획 '지구적 자본주의와 약소자들' 눈길

"눈을 부릅뜬다고 현실의 균열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체계 안에서 체계 밖을 상상할 수 있을 때 삶의 전망도 발견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적 상상력은 더욱더 열심히 '약소자적'일 필요가 있다." (오창은, '지구적 자본주의와 약소자들'에서)

21세기 문학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실천문학> 2006년 가을호(83호)는 '지구적 자본주의와 약소자들'이라는 근래 보기 드문 묵직한 기획물을 통해 이 질문에 나름의 답을 내놓고 있다. 결국은 수많은 약소자들이 싸우는 삶의 현장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소자(弱小者, minority)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통합한 개념으로 유력자(有力者, major)에 대응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약소자들은 누구일까? 12명의 작가, 평론가의 증언을 따라가노라면, 그들은 바로 당신의 곁에 있음을 알게 된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전태일과 박노해를 기억하는 그들

비토리히 타고르(34)라는 시인이 있다. 본명은 아부 카일. 그는 1996년에 '코리언 드림'을 가슴에 품고 한국으로 건너온 방글라데시의 젊은이였지만, 2005년 3월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게 연행된 뒤 강제 추방됐다.

타고르는 자신의 동료가 프레스에 양 손이 잘리는 사건을 목격한 후 공장 화장실에서 분노와 고발의 마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문학평론가 고영직('어떻게 연대하고 적대할까?')은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얼굴 없는 시인으로 통했던 타고르의 시를 통해 이주노동자의 참담한 현실을 본다.

(…)

새벽까지 일하고 기숙사에 갈 때
하늘 끝 달 보며 눈물 흘린다
엄마 생각난다
엄마 생각난다

요금이 부담돼서
달 전화기 통해서
어머니하고 말씀 나눈다
그것도 며칠뿐이 안 된다
하늘 위의 고급 의자에 앉아서 신이시여
우리 이주노동자의 달을 뺏어간다
고급 의자에 앉아서 신이시여
우리 노동자의 달을 뺏어간다

-비토리히 타고르, '달 전화기' 부분


"가난의 굴레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 조국을 등졌다"는 타고르는 한국에서 "가난하고, 슬프고, 굶주리고 / 헐벗은 자들에게 / 자유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유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장님들"과 "가진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는 신에게 절규한다. "신이시여 우리에게 자유를 주소서 / 자유를 위해 우리는 기꺼이 피를 흘리겠습니다."

지금 전태일과 박노해는 잊혔다. 그러나 어린 시절 "단지 한 권의 어린이 책을 갖는 것"이 꿈이었던 타고르는 지금 그들을 찾는다. 고영직은 타고르의 시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 장차 형성될 이주노동계급의 집단화 가능성을 징후적으로 제기한 첫 사례"라고 진단한다.

(…)

나의 노동자 시절
젖소처럼 매일 착취당한다
나의 꿈이었던 것은
단지 하나의 시집, '노동의 새벽'

인생의 많은 꿈을 희생시켰지만
그러나, '노동의 새벽'을 만났다
우리가 꿈꾸는 오래된 희망은 '바보회'
그리고 전태일의 사진 한 장

-비토리히 타고르, '오래된 희망' 부분


"세뇌당한 것은 주민이 아니라 외부사람이다"
▲ '지구적 자본주의와 약소자들'이라는 묵직한 기획을 전면에 내세운 <실천문학> 2006년 가을호(제83호). ⓒ프레시안

시인 류외향은 5월 4일 '야만의 현장'이었던 대추리를 기억한다('야만은 자본과 함께 온다'). 1970년대에 태어난 그는 전쟁 얘기에 "야릇한 흥분"의 감정까지 느낄 정도였다. 전쟁에 대한 실재적 느낌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5월 4일 대추리는 완전히 실재적인 전쟁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육중한 철조망 뭉치를 하나씩 매단 헬리콥터, 전경의 방패에 찍혀 머리가 터진 동료 작가, 피 칠갑을 하고 쓰러져 있는 수십 명의 부상자를 에워싼 채 서 있기만 하는 전경들. 결국 '여명의 황새울' 작전은 성공했고 그날부터 지금까지 대추리와 도두리는 고립됐다.

그는 난생 처음 전쟁에 대한 실재감을 느끼면서 새삼 잠시 잊고 있었던 진실을 기억한다.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 인권이 향상되었다고 떠든다. 내 귀에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쯤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권력과 자본이 있는 곳에는 민주화도 있고 인권도 있겠다. 그러나 힘도 '빽'도 돈도 없는 곳에는 민주화도 없고 인권도 없다."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미군기지가 왜 평택으로 이전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국민이 태반이다. 국방부의 기관지가 되어버린 대다수 언론의 왜곡·은폐·편파 보도 탓이다. 그 와중에 대추리는 "외부 반미세력에 세뇌당한 주민들"의 근거지로 인식된다.

진실은 정반대다. 평택 기지이전은 세계 패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어디라도 신속하게 이동시킬 수 있도록 하려는 미국 군사전략의 한 부분이다. "주민의 생존권 문제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평화,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와 직결되는 사안이다. 죽고 사는 일이 달린 문제라는 말이다."

지금 여전히 대추리 주민은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이 그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면 이 싸움은 진즉에 끝났을 것이다. 그들의 지난한 역사를 듣고 넓디넓은 들판을 걸어보고 죽어도 논두렁을 베고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느낀 사람이라면 세뇌당하지 않고 배길 수 없다. 정작 세뇌당한 것은 주민이 아니라 외부사람들이다."

"우리는 모두 어디서 온 돌들이지?"

그렇다면 약소자를 다루는 문학의 시선은 어떠 해야 할까? 한국 문학에서 최근 '코시안(Kosian)'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살펴본 허정의 글('코시안과 한국 문학')은 이 질문과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최근 코시안을 다룬 한국 문학에서는 '그들'과 '우리'의 이분법이 사라지고 있다.

(…)

우리는 모두 어디서 온 돌들이지?
우리는 모두모두 어디서 온 돌들이지?
그렇게 모두 흐느껴갈 적에
봄꽃 만발,

서서 앉아서
우리는 모두 어디서 온 꽃들이지?

-장석남, '돌들이 왔다' 부분


장석남의 시 '돌들이 왔다'이다. 이미 축대가 되어 있던 토박이 돌들이 트럭에 가득 실려 온 돌들에 대해 보이는 반응을 인격화해 표현한 이 시는 "어디서 온 들들이지?"라는 의문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자신들도 굴러온 돌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그들'과 '우리'는 다르지 않다.

"코시안의 부모가 제3세계의 빈곤화를 가속화시킨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양산해낸 인간 부초들이었다면, 우리 역시 고용구조의 유연화를 명분으로 내세운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아래 무적자가 되어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같은 병인(病因)을 가진 셈이다."

한국 문학은 지금 머뭇거리고 있다. 이 머뭇거림의 끝에서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이다" "우리는 모두 코시안이다" "우리는 모두 대추리 주민이다" "우리는 모두 성적 소수자다"와 같은 외침이 나올 수 있을까? 시대의 아픔을 증언하고 상처를 보듬었던 '그때 그 문학'이 우리 옆에 다시 한 번 도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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