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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축구 '백년 전쟁', 남아공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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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축구 '백년 전쟁', 남아공에서 계속된다

[프레시안 스포츠] 한국과 일본의 16강 승부차기

일본이 25일 남아공 월드컵에서 덴마크를 3-1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아시아의 두 팀이 원정 월드컵 16강에 오르는 새 역사가 쓰여진 셈이다.

일본 16강 진출의 자극제 됐던 한국 축구

일본이 16강에 진출하는데 가장 큰 자극이자 자양분은 한국이었다. 일본은 지난 5월 24일 평가전에서 한국에 패한 뒤, 차기 감독 영입 프로젝트를 본격 가동할 정도로 다급했다. 오카다 다케시 대표팀 감독의 사퇴 소동까지 있었다. 한국과 일본이 2022년 월드컵 개최권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여서 이 패배의 충격은 더욱 컸다.

하지만 일본이 정작 이번 월드컵에서 카메룬에 이기고, 강호 네덜란드에 0-1로 패하는 등 선전하자 일본 언론은 달라졌다. <요미우리신문>은 22일 "건투하고 있는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3팀(한국, 북한, 호주)이 대패의 아픔을 맛봤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을 확정시킨 일본의 오카다 다케시 감독이 두 주먹을 쥐고 기뻐하고 있다. ⓒ<산케이> 스포츠
틀린 얘기가 아니다. 일본은 불과 한 달 전 한국과의 평가전에서 완패했던 팀이 아니었다. 무엇이 일본을 16강으로 이끈 걸까?

오카다 감독은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체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본의 모델은 2002년에 만개했던 한국의 압박축구. 월드컵 무대에서 기술이 뛰어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체력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셈이다.

일본은 효과적인 수비전술로 16강에 오를 수 있었다. 공을 가진 상대를 순간적으로 에워싸는 부지런함이 돋보였다. 이런 협력수비를 위해서 일본은 그 어느 때 보다 많이 뛰어야 했다.

하지만 일본은 지금까지 신봉해 왔던 기술축구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덴마크전에서 터진 엔도 야스히토(감바 오사카)와 혼다 케이스케(CSKA 모스크바)의 프리킥 골은 일본다운 '기술 축구'의 결정체였다.

차범근 독일 진출 뒤에 숨겨진 '오쿠데라 열풍'

▲ 차범근보다 앞서 분데스리가에 안착했던 일본의 오쿠데라 야스히코
한국과 일본 축구의 도전과 응전의 역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 축구간 라이벌 의식은 양국 축구를 발전시켜 온 밑거름이었다. 그 이면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의식이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1966년 북한의 월드컵 8강 진출에 이어지는 1968년 일본의 올림픽 축구 동메달 획득은 한국 축구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두 차례 강 펀치에 비틀거렸던 한국 축구를 정권 차원에서 그냥 놔둘 수 없었다. 박스컵 축구 대회의 창설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장덕진이 축구협회장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SBS> 해설위원인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진출 뒤에도 "일본에 질 수 없다"는 독일 교민들의 노력이 있었다. 일본 축구 스타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차범근에 앞서 분데스리가에 안착했다.

1978년 오쿠데라는 소속팀 FC 쾰른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함께 자주 독일 언론에 오르내렸다. 재독한인축구협회는 오쿠데라의 대항마를 찾았고, 그게 차범근이었다. 재독한인축구협회는 차범근이 독일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고 독일 생활에 적응할 때까지 결정적 역할을 해줬다.

"일본 스트라이커가 가는 곳이면 화장실까지 쫓아가라"

1954년 이후 월드컵 본선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무려 32년을 기다려야 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 마지막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건 일본이었다.

최종예선 1차전은 일본에서 열렸다. 일본 프로야구 제팬시리즈와 일정이 겹쳤지만 이날 경기가 펼쳐진 일본 요요기 국립경기장은 7만 관중으로 꽉 찼다. '야구'의 나라 일본으로서는 이례적인 일. 하지만 한국은 2-1로 승리했다. 정신력의 승리였다. 김정남 감독은 "일본 스트라이커 하라가 가는 곳이면 화장실까지도 쫓아가라"며 수비수 정용환에게 밀착마크를 주문했을 정도다.

현재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허정무 감독은 서울에서 펼쳐진 최종예선 2차전에서 골을 넣어 한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한국 축구를 넘지 못했던 일본 축구는 또 고개를 숙여야 했다.

2002년 월드컵 개최 불씨를 지핀 '도하의 기적'

일본은 한국 축구를 이기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고, 93년 J리그를 출범시켰다. 많은 유소년 선수들을 주로 브라질에 보내 탄탄한 기본기도 쌓게 했다.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94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일본의 노력은 결실을 맺는 듯 했다.

일본은 브라질 유학파 미우라 카즈요시의 결승골로 마침내 한국을 제압했다. 한 신문은 이 날을 한국 축구의 '국치일'로 표현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하지만 마지막 날 일본이 이라크와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게 됐다. 동점골을 넣은 이라크의 자파르는 한국 축구의 구세주가 됐다.

'도하의 기적'은 한국이 그 때까지 월드컵 유치경쟁에서 앞서가던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은 '일본이 단 한 번도 월드컵에 나간 적이 없는 국가'라는 점을 내세울 수 있었다.

"일본이 졌다고 우리가 져도 된다는 생각을 버려라"

2002년 월드컵의 최대 외부변수는 일본이었다. 공동개최국으로서 누가 16강에 갈 것인가가 주요 관심사였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앞두고 한국은 긴장감이 다소 풀어졌다. 숙적 일본이 터키에 패해 8강이 좌절됐다는 소식 때문. 하지만 히딩크는 선수단에 "일본이 졌다고 우리가 져도 된다는 생각을 버려라"며 일침을 가했다. 그는 한일 축구의 라이벌 의식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의 4강 신화에는 이처럼 일본 효과가 있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한국인들은은 일본과 경기를 펼치는 호주를 응원했다. 히딩크가 호주의 감독이었기 때문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경기 전 "일본을 이겨 한국에 기쁨을 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호주는 일본에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히딩크 감독은 "일본이 넣은 첫 골은 파울이었다"며 "이 경기는 정의가 승리한 경기"라고 규정했다. 한국인들이 우리 팀의 승리 이상으로 호주의 승리에 기뻐했던 이유다.

▲ 5월 24일 오후 일본 사이타마스타디움 2002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일본의 평가전에서 박지성(대한민국)이 선제골을 넣고 있다.ⓒ뉴시스

남아공에서 계속되는 한일축구 백년전쟁

1896년 <독립신문>은 "영어학교 학생들이 오후면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데, 달리거나 이기고자 투쟁심을 내는 활달한 거동이 일본 학생들보다는 백 배 낫다"고 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렇게 한일축구 백년전쟁은 막이 올랐다.

일본의 오카다 감독은 현역 시절 위치선정이 뛰어난 지능적인 수비수였다. 그는 대표 선수로 뛰는 동안 오직 한 골을 성공시켰다. 그 골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한국과의 경기에서였다. 한국은 이 경기에서 1-2로 졌다. 한국은 예선 탈락했다.

오카다 감독은 28년 전 선수로 넣었던 골보다 훨씬 의미 있는 '16강 골'을 넣었다. 겉으로는 서로를 칭찬할지 몰라도 한국과 일본은 이제 남아공에서 승부차기를 하는 심정으로 16강전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첫 번째 키커는 한국이다. 한일 축구 백년전쟁은 남아공에서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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