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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요덕' 수용소를 가다"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4〉 뒤집어 읽어본 <IHT> 사설

"요덕" 수용소 수감자 세 명이 스스로 목을 맸다는 뉴스는 "김정일 위원장"이 세운 강제수용소의 왜곡된 역사를 아는 사람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문명국의 법을 무시하고 절망의 지옥을 만든 것에 대한 불가피한 결과였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적절한 처우, 불편부당한 재판, 그리고 언젠가는 이뤄질 석방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없이 구금되어 있다.

비밀 재판정의 재판관들이 모여 앉아서 누군지 정체도 모르고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보는 것마저 허용되지 않은 자들을 심판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수용소 수감자들은 학대받고, 모욕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때때로 고문당하고 있다. 물론 수감자 가운데 일부는 파괴행위를 자행하여 혹독한 처벌을 받아 마땅한 매우 위험한 사람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수감자 465명 중 단지 10명만이 범죄행위로 기소됐을 뿐이다. 그곳에서 관리직으로 근무했던 사람들에 따르면, 단순히 맨발의 "반체제 활동가"이거나 "미제와 남조선 연합군의 공화국 침략 이후 북조선"에 우연히 살게 된 사람들에 다름 아니다.

"요덕" 수용소의 수감자들은 "북한"의 법정에 도움을 요청하려 애썼고, 그 결과 사건 하나가 "인민 재판소"에 올라오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청원은 "공화국 보위"를 이유로 기각되었다. 수감의 부당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수백 년 이어져 온 권리를 수용소 수감자들에 대해서는 박탈한다는 내용의 새 법이 만들어졌고, 이 때문에 새로이 법원에 청원을 한다 하더라도 기각당할 게 뻔하다. 더군다나 국가가 고용한 변호인들은 이 법을 소급해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현재 걸려 있는 청원 모두를 기각하려 하고 있다.

"요덕"을 비롯해 여러 "북한의 구금소들"은 어떠한 형태의 학대에도 반대하는 인류애의 수호자인 "공화국"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격분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달 국제연합(UN)은 강제수용소들을 폐쇄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한 "김정일 정권"의 반응은 웃기고 있네(defiance)였다.

지난 해 수감자 수십 명이 단식투쟁에 돌입했을 때, 관계당국은 단식자들을 철제 "압박의자"에 잡아매고는 의료진에게 음식물을 강제 투여하라고 명령했다. 군 장교들은 단식자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만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고 말하지만, <뉴욕타임스>는 상태에 상관 없이 모든 단식자들에게 압박의자가 사용됐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행위는 의료단체들을 소름끼치게 만들었지만, 이달 들어 "북한 군부"는 군대 의료진에게 음식물 강제투여를 명령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내용의 새 규정을 발표했다. "요덕"에서 일하는 정신과 의사들의 유일한 역할은 수감자들이 심문 받을 준비가 되도록 돕는데 있는 듯하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수감자들이 자살을 시도하는 게 전혀 놀랍지 않다. 2003년 8월에는 여드레 동안 23명이 자살을 시도했는데, 군부는 18개월 동안 이 사실을 덮어두었다. 그리고 지금 수감자 3명이 자살에 성공했다. 수용소 관리자들은 자살자 한 명이 중간 혹은 고위급의 "간첩 요원"이라고 말한다. 한 명은 "탈북했다가 중국에서" 잡혔다(우리는 그가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요덕 수용소장"이 별도의 분파라고 부르는 단체 출신이다.

자살 사고에 대한 수용소장의 반응은 소름 돋게 만든다. "나는 자살 사고가 절망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에 대항한 비대칭 전쟁의 일환이라고 믿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수감자들은 "우리 것이든 자기 것이든 간에 생명에 대한 관심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그가 말했다.

이런 말들은 인류애로부터 크게 일탈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말들이야 말로 UN 보고서가 설명해주는 것보다 더욱 분명하게 왜 "요덕" 수용소가 폐쇄돼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 * *

"<프레시안>에 이런 <조선일보>에나 실릴 법한 글이?", 하고 놀랐을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6월 13일자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사설을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필자가 술어나 수식어는 그대로 두고 주요한 주어와 목적어들을 고친 것이다.

올바른 번역이 되려면, "요덕"은 "관타나모"로, "김정일 위원장"은 "부시 대통령"으로, "반체제 활동가"는 "탈레반"으로, "미제와 남조선 연합군의 공화국 침략 이후 북조선"은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침략한 나라"로, "북한"은 "미국"으로, "인민재판소"는 "대법원"으로, "공화국 보위"는 "국가 안보"로, "북한의 구금소"는 "미국의 구금소들"로, "공화국"은 "미국"으로, "김정일 정권"은 "부시 행정부"로, "북한 군부"는 "미 국무성"으로, "간첩 요원"은 "알카에다 요원"으로, "탈북했다가 중국에서"는 "전쟁통에 아프가니스탄에서"로, "요덕 수용소장"은 "관타나모 수용소장 해리 해리스 주니어 소장"으로 고쳐져야 한다.

미국이 인권을 들먹이며 북한을 비난하지만, 북한의 수용소나 미국의 수용소나 인권에 반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의 사설을 개역해 보았다. 한국의 '우익'은 한국 정부가 북한의 인권을 비판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자신들이 받들어마지 않는 미국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미국 문제에 대한 우익의 침묵은 고의가 아니면 무지다. 하기야 한국의 우익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독재정권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침묵하다 못해 동조한 과거를 갖고 있다. 미국과 우익이 주장하듯이 "국가 안보를 위해 인권침해가 불가피 할 경우도 있다"고 한다면, 왜 북한에게 동일한 원칙이 적용돼서는 안 되는가. 필자는 한국이든, 미국이든, 북한이든 어디든 상관없이 인권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으며, 인권을 침해하는 자들이 다른 이들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는 위선스러운 모습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 사설을 개역해보았다.

물론 "요덕"이나 "관타나모"를 "한국의 교도소"라고 고친들 크게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을 게 분명하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것이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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