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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음악, 금강산 자락에 울려 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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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윤이상 음악, 금강산 자락에 울려 퍼지다

남북 함께 모여 기념음악회…부인과 딸도 참석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음악이 금강산 자락에 울려 퍼졌다.

29일 오후 6시 30분 금강산 온정각 금강산문화회관. 이곳에서 처음으로 윤이상 선생을 기리는 뜻 깊은 음악회가 윤이상평화재단(이사장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 주최로 펼쳐졌다.

윤이상평화재단 설립 1주년을 기념하고 윤이상 선생의 명예회복을 촉진하기 위해 마련된 이날 음악회는 남북 음악인들과 정·재계 인사, 윤이상 관련기관 관계자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우리 측에서는 이종석 통일부 장관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김용태 민예총 회장, 유르카겐 카일 독일문화원장 등 200여 명이, 북측에서는 리종혁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리일남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장 등 40여 명이 각각 참석했다.

특히 현재 독일 베를린과 평양에 있는 두 곳의 자택을 오가며 살고 있는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79) 씨도 딸 윤정 씨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 눈길을 끌었다.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이날 음악회에서는 윤이상 선생의 육성과 친필, 사진 등을 담은 짧은 추모 영상물 상영에 이어 선생의 작품들과 친근한 클래식 곡, 남북한 민요 등 다양한 곡들이 연주됐다.

1부에서는 통영 국제음악제 상주악단인 TIMF앙상블이 파헬벨의 '캐논'을,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이 국악관현악으로 편곡한 윤이상의 초기 가곡 '편지'와 '추천', 백대웅 작곡의 '남도아리랑'을 차례로 들려줬다.

이어 진행된 평양 윤이상 관현악단의 2부 프로그램이 이날 음악회의 '하이라이트'였다. 1990년에 창단된 윤이상 관현악단은 윤이상 음악연구소의 상주 실내악단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정상급 연주단체 중 하나다.

이날 무대에서는 윤이상 작곡의 소관현악 '협주적 단편'과 가곡 '고풍의상' 및 '달무리', 멘델스존의 '현악8중주' 등을 빼어난 실력으로 선보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종석 장관, 현정은 회장과 나란히 앉아 음악회를 지켜본 이수자 씨는 음악회가 끝난 뒤 "(윤이상) 선생님께서 이 자리에 같이 계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며 "이 음악회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윤이상평화재단은 이번 음악회가 앞으로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통한 남북 문화교류를 더욱 활발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장용철 재단 사무처장은 "남측에선 평화재단, 북측에선 윤이상연구소를 축으로 해 윤이상 기념사업을 비롯한 교류활동이 활발해질 수 있을 것"이라며 "내년부터는 윤이상 국제작곡상을 제정해 시상하는 계획도 추진 중"이라고 전했다.

<인터뷰> "동백림 사건, 진상발표 외에 정부의 사과도 필요"

-고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 씨

"동백림 사건 진상 조사 발표로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정부가 사과를 해야지요."
▲ ⓒ연합뉴스

1967년의 이른바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평생 조국을 등지고 살다가 1995년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둔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부인인 이수자(79) 씨가 처음으로 국내 기자단과 만나 남편을 대신해 말문을 열었다.

윤이상평화재단이 주최한 윤이상 기념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 금강산을 방문한 이 씨는 28일 금강산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나 1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결과 발표 등에 대해 조심스럽게 소감을 밝혔다.

이 씨 역시 남편과 마찬가지로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조국과 고향, 가족을 등지고 평생을 살아왔다.

독일 베를린 자택과 북한 정부로부터 받은 평양 근교의 자택을 오가며 살고 있을 뿐 '남편의 명예회복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한국에 갈 수 없다'며 지금까지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지 않고 있다.

기자들과의 첫 만남에 긴장이 됐던 탓인지 이 씨는 기자들의 질문에 미리 준비해온 원고로 답을 하기도 했으며, 간간이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는 등 감정이 북받친 모습이었다.

이 씨는 "고뇌에 가득 차 평생을 슬프고 외롭게 살다 간 남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며 "하루 빨리 남편의 명예회복이 이뤄져 꿈에도 그리던 고향 통영 바다에 가서 한을 풀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씨와의 일문일답.

--국정원의 동백림 사건 진상조사 발표로 사실상 선생의 명예회복이 이뤄진 것이라고 보는데, 이에 대한 소감은.

▲국정원의 이번 발표를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외국 실정을 더 감안해야 한다. 당시 (윤이상) 선생님이 실정법을 위반했다고 돼있는데, 국내와 외국 사정은 다르다. 해외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던 유학생들을 국내로 잡아들여 역사에도 없는 간첩단으로 둔갑시키고 강압적으로 진술시켰다.

유학생활을 하다보면 시시각각 세계에서 들어오는 뉴스를 듣게 되고, 사고의 제약도 없어진다. 당연히 새로운 시각이 생기게 되고, 객관적으로 조국을 보게 된다. 더구나 조국으로부터도 방치된 상황이었다. 아무런 경고조치도 없었다. 선생님은 당시 베를린에 살고 있었는데 동·서 베를린 간 왕래가 자유로웠다. 친구의 소식을 알기 위해 동베를린에 있던 북한공관에 갔던 것뿐이다.

동백림 사건의 영향이 우리에겐 평생 갔다. 선생님은 역사에 남을 인물이다. 누명을 씌워 역사에 남겨서는 안 된다. 아직까지 남쪽 사람들 사이에 선생님은 '간첩두목'이란 인식이 깊이 박혀있다.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 고향 땅에 가지 못했다. 남편의 고뇌에 찬 모습을 꿈에도 잊을 수 없다. 남편의 작품은 영원하고 작품이 살아있는 한 남편도 살아있다고 믿는다.

하루 빨리 정부가 국내, 국외 사정을 충분히 참고해서 국민의 예술가를 제 위치로 되돌려 놓길 바란다. 그래서 어서 빨리 고향 땅을 밟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명예회복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말하는 것인지.

▲당연히 정부에서 사과를 해야 한다. 간첩도 아닌데 간첩으로 몰아 대서특필해서 보도를 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정부가 사과도 하지 않으면서 선생님의 작품을 연주하고, 외국에도 가지고 나가고 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많은 작품을 유산으로 남겼고, 그 유산은 세계 음악사에 남는 명예다. 작품은 마음대로 사용하면서 명예회복은 안 시키는 건 말이 안 된다.

진상조사를 한다고 국정원 관계자들을 베이징에서 만났는데, 그분들이 내게 '선생님은 이제 간첩죄가 없어졌는데 더 무슨 명예회복이 필요하냐'고 하더라. 애초에 간첩두목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한 건 어떻게 할 거냐. 국민들 머리에는 이미 다 박혀있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발표를 한다고 한들 누가 관심 있게 보겠느냐.

--명예회복이 이뤄진다면 남쪽을 방문할 생각이 있는지.

▲명예회복만 이뤄지면 언제든 갈 수 있다. 명예회복이 되어서 고향에 간다면 남편이 꿈에도 잊지 않던 통영 바다에 가서 남편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다.

--평양에서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평양 근교에 김일성 주석이 선물로 준 집이 있다. 산 속에 있는 훌륭한 집이다. 평양에 가면 날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데 그 사람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산다. 산보도 하고 음악도 듣고 윤이상연구소에도 종종 나가기도 한다.

--실제 윤이상 선생은 어떠했나.

▲원래 정의감이 지극하신 분이었다. 음악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는데, 동백림 사건으로 모든 게 다 바뀌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분단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피부로 느꼈다. 분단상황을 용납하지 못해서 남북화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실 분이었다.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음악까지도 버리겠다고 할 정도였다. 온갖 억울한 일, 부조리한 일이 닥치는데 그걸 무시하고 음악만 할 순 없다고 했다. 그래서 민족의 고뇌가 담긴 곡도 많이 썼다. 동백림 사건 후에 더 심해졌다.

--선생은 결국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슬프고, 외롭고, 아픈 생애를 살다 가신 분이다. 자기로선 최대한 민족을 위해 살았지만. 10년 전 베를린에서 돌아가실 때 남쪽에서 많은 기자들이 왔었다. 그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기자들을 만나지 않았는데, 누군가 현관 앞에 꽃다발 하나를 두고 갔다. 어느 기자가 두고 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꽃다발이 고향 땅에서 온 단 하나의 꽃다발이었다. 한국 정부와 남쪽 사람들을 대표해서 온 꽃이라 믿고, 지금도 그것을 가슴에 지니고 산다.

--부산 사범학교 교사 시절 처음 만난 선생과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됐는지.

▲대학 졸업하고 사범학교 취직을 했는데 몇 달 뒤 한 음악선생이 고향에서 요양을 하러 돌아왔다. 당시 나는 아주 어린 나이였고, 그 분은 서른 넘은 노총각이었다. 조건으로 보면 하나도 볼 게 없었다. 학벌도 재산도 없었고, 외모 또한 폐결핵 3기로 병색이 짙었다.

하지만 젊은 선생들과 달리 확실히 눈에 띄었다. 특별한 조건을 없었지만 장차 훌륭히 될 것이라는 빛을 발견했다. 그래서 모든 걸 제쳐놓고 결혼했다.

후에 남편이 어느 정도 유명해진 뒤 남편에게 '내가 땅 밑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고 말하니, 남편도 '그것도 다 안목이 있어야 발견할 수 있다'고 답해 웃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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